오케스트라 선율로 만나는 게임의 풍경
20대 초반, 게임을 시작했다.
주변의 권유에 의해 시작했는데 곧 좋아하게 되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난 발컨(발로 컨트롤)이었다. 게임은 하는데 레벨은 오르지 않았고, 게임 동작에 맞춰 온 몸이 춤을 추니 '방' 이외의 공간에서 게임을 하는 건 굉장히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민폐가 되지 않으려 MMORPG 게임을 멀리하고 간간히 인디게임을 하면서 게임 방송에 만족을 하게 된 요즘도 게임을 잘 하는 꿈을 꾼다. 쓸데없이 진지한 것 같지만 사실이 그렇다.
막상 게임을 할 땐 몰랐는데 게임방송을 보면서 게임의 여러 요소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게임은 이야기, 영상, 시스템 그리고 사운드가 한데 어우러져 입체적인 경험을 만들어낸다. 비록 '능동적인' 경험을 할 순 없었지만 여러 게이머들의 플레이를 보면서 각각 다른 느낌을 경험할 수 있었다. 특히 게임을 할 땐 동작 자체에 집중하느라 들리지도 않던 사운드의 묘미를 알게 되었달까. 학과 선배의 도움을 받아 겨우 FPS계의 혁신이라는 밸브(Valve)사의 게임 '포탈(Potal)'의 엔딩을 맞이했을 때 과제를 할 때도 남아 있지 않던 자정의 과방에 울려 퍼졌던 엔딩곡 스틸어라이브(Still Alive)의 가사와 선율을 아직도 선연하게 기억하는 걸 보면 음악은 게임의 기억에서 꽤 중요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공연 <게임 속의 오케스트라>의 포스터를 보는 순간, '이거다!' 싶었다. 비록 내가 플레이(라 쓰고 시청이라 읽는) 했던 게임은 많지 않았지만 퀄리티 있는 작업으로 게임 커뮤니티에서는 이래저래 유명한 곡들이 라인업 되어 있는 걸 보고 오케스트라로 빵빵하게 게임 음악을 듣겠구나 싶었다. 무엇보다 게임 영상과 함께 관람하는 오케스트라의 풍경이 어떨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지휘자 이병욱씨의 지휘와 해설 그리고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진행된 이번 공연은 기대보다는 호기심이 앞 선 공연이었다.
공연의 시작, 단원들이 모두 자리에 앉고 무대 중앙에 위치한 대형 스크린에는 게임 로그인 화면이 나타났다. 아이디와 패스워드가 입력되는 동안 관객석은 스크린을 가리키며 "야, 진짜 게임처럼 만들었네~", "오오 연출~" 등의 감탄사를 내뱉으며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케스트라 연주에 와서 '잡담'을 듣게 되다니 이 또한 새로운 경험이었다. 드디어 로그인! 공연이 시작되었다. '게임' 속의 오케스트라에 로그인을 한 기분으로 관객석은 좀 전의 소란을 차분히 가라 앉히고 집중했다. 우선 출발이 좋았다.
문화시장에서의 게임의 입지가 넓어진 건 게임의 퀄리티 향상과도 큰 상관관계가 있다. 기존의 2D 픽셀 그래픽에서 지금은 영화만큼이나 멋진 그래픽 영상으로 발전하였고 일렉트로닉 음악에 머물던 BGM도 영화 산업의 성장과 동시에 영화음악의 팬이 등장했던 것처럼 게임음악의 팬이 등장할 정도로 그 수준이 발전하였다. 특히 공연의 포문을 연 NC 소프트의 리니지 2의 BGM은 세계적인 게임, 영화 음악 작곡가인 빌 브라운(Bill Brown)이 참여해 큰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게임에서 음악은 이제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관을 전달하거나 게이머들의 몰입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풍경은 어떤 정경이나 상황을 가리키는 단어로 시각적 요소뿐 아니라 후각, 촉각, 청각 그리고 미각 등 모든 감각 요소를 포괄한다. 같은 거리를 걷더라도 저마다 마주치는 풍경이 다르듯, 같은 것을 경험하더라도 기억 속에는 저마다 다른 풍경을 간직할 수밖에 없다. 음악은 어떤 풍경에 대한 향수를 일으키기에 매력적인 자극제가 된다. 연인과 함께 듣던 그 노래, 눈물을 한 바가지 쏟았던 감동적인 영화의 ost, 전 국민을 울고 웃긴 드라마의 ost, 또래 친구들과의 추억이 가득 담긴 특정 시대의 인기 가요들. 음악을 매개로 우린 공통의 기억을 떠올리고 공감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개인적인 풍경들을 떠올리며 나만의 추억에 빠져들기도 한다.
리니지를 플레이했던 사람이라면 공연의 시작과 동시에 10세기 전후 유럽의 아덴 왕국을 누비던 순간을 떠올리며 게임에서 마주한 여러 풍경들을 떠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혹은 리니지를 하던 시기에 있었던 어떤 기억의 실마리를 찾았을지도 모른다. 리니지를 플레이하지 않았던 사람은 스크린에서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영상과 오케스트라의 선율을 통해 새로운 리니지 세계란 새로운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1부는 리니지 2의 BGM 4곡으로 시작해 리니지, 블레이드&소울의 BGM으로 이어졌다.
처음엔 음악과 함께 차창 밖 풍경을 마주하는 느낌으로 몰입할 수 있었지만 다섯 곡이 넘어갈 무렵 게임을 플레이했었더라면 더욱 깊게 음미할 수 있지 않았을까. 더 재미있게 공연을 즐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낯선 풍경은 새로움에서 오는 기대와 아쉬움을 모두 남기고 그렇게 지나갔다.
기억만큼이나 우리의 마음을 순간적으로 자극하는 것이 또 있을까. 2부의 시작, 스크린에는 우리 모두가 아는 국민 게임 '테트리스'의 화면이 띄어졌다.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시작되었는데도 객석은 여전히 들떠 있었다.
앞자리에 있던 아저씨는 박수를 치려던 손을 민망하게 내려놓고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맞춰 어깨를 들썩이셨다. 오케스트라 공연을 와서 이렇게 신났던 적이 있을까. 잠을 자려고 누우면 늘 둥둥 떠다녔던 테트리스 블록들이 생각나 미소 지었고, 슈퍼마리오 팩 게임을 하기 위해 친구 집에 아침부터 밤까지 있다가 엄마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오던 추억에 괜히 웃음도 났다. 함께 간 언니는 자기 집에 있던 게임 패키지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다며 자꾸만 내 옆구리를 찔러댔다.
미소 정도만 유지하며 평정심을 유지하던 나도 크레이지 아케이드 영상과 BGM에선 '아!'하고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아는 게임'이기도 했거니와 대학생이 되서까지도 동기들과 피시방에 모여서 온갖 추억을 담아 넣었던 게임이었기 때문이었다. 평소엔 기억도 나지 않았는데 막상 음악이 나오니 리듬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기억났다. 더운 여름, 에어컨이 고장 나 선풍기만 켜고 거실에서 크아를 하다가 어린 동생에게 도움이 안 된다며 엄마에게 콩! 꿀밤을 맞았던 기억까지 모두 떠올리고 나니 연주가 한없이 짧게 느껴졌다. 어찌나 아쉽던지. 이곳에서 듣고 싶은 게임 음악 리스트를 머릿속에 그려보기까지 했다.
공연 내내 플레이해보지 않았던 게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아쉬움이 남았는데, 2부에선 이병욱 지휘자의 해설이 더해져 리니지 2의 BGM은 조금 더 가볍게 소화할 수 있었다. 주요 세계관과 스크린 위에 펼쳐진 장면이 무엇을 그린 것인지, 음악이 어떤 느낌으로 연주되는지 정도만 알려주었는데도 훨씬 수월하게 몰입할 수 있었다.
해설과 함께 영상이 착 감겼던 것은 게임 <아이온>! 친한 언니가 게임 <아이온>을 플레이하다가 지금의 남편을 만나 7년 연애 끝에 작년 12월 결혼을 했다. 그들이 사랑을 키웠다는 세계는 보는 이를 압도시킬만큼 아름다운 공중 대도시 엘리시움이었고, 오케스트라 선율이 그 배경음악 '천상의 궁전'을 연주하니 그들의 사랑이 시작되고 결실을 맺을 법도 한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아이온의 음악은 부산 아시안 게임의 공식 주제가 'Frontier!'로 유명한 양방언이 참여해 화제가 되었다고 하는데 공연장에서 영상과 함께 오케스트라 연주를 들으니 더욱 몰입하며 즐길 수 있었다.
게임 속의 오케스트라. 게임이라는 주제 때문에 흥미를 가졌던 공연이었는데 기대 이상의 좋은 영상들과 너무 자연스럽게 귀에 감기는 오케스트라의 선율에 공연 전체의 조합에 큰 만족을 느꼈던 공연이었다. 다만 게임을 플레이 한 관객에게는 조금 더 생생한 기억의 고리가, 게임을 플레이하지 않았던 관객들에게는 조금 더 친절한 해설이 곁들여지면 좋을 것 같았다. 덧붙여 고전 게임과 같이 하나의 테마를 가지고 재미있게 메들리를 구성하는 공연이 시리즈로 나온다면 기대 부푼 마음으로 누군가를 생각하며 공연을 예매하지 않을까싶다.
봄이 온 탓인지 공연이 끝나고 나왔는데 그리 늦은 느낌이 아니었다. 음악 분수에 모여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눈에 보였고 어쩐지 들뜬 사람들의 모습에 기분이 좋았다. 긴 연휴를 앞둔 탓인지 사람들의 여유 있는 모습이 좋았고 함께 공연을 보러 간 언니와 공연 이야기를 하며 역까지 걸어가는 길이 참 정겨웠다. 게임을 주제로 누군가와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게 언제였는지. 집에 가서 오랜만에 스팀 사이트에 접속을 했다. 시간을 돌리는 Shift 버튼을 마음껏 누를 수 있는 <브레이드 Braid>의 플레이를 시작하면서 꽤 긴 여운을 남긴 공연 <게임 속의 오케스트라>에서 로그아웃을 해본다. 공연장에서 게임의 새로운 테마로 로그인할 날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