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국제여성영화제 <김선민 감독 추모전>
달력엔 빨간색으로 숫자 6과 현충일이란 검정 글자가 적혀있었지만, 내 머릿속엔 '선민 언니 추모전' 이란 글자가 내내 떠나지 않았다.
하필 비가 내렸다. 오전 내내 날이 꾸물거리더니 배가 고플 무렵 비가 한 두 방울 떨어졌다.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기어코 맥주 한 캔을 꺼내 마셨다. 지난밤 마감을 끝내 놓고도 괜히 찝찝해 일을 만지작만지작 쉬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아닌 상태로 한참을 보내다가 대충 머리만 감고 느릿느릿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타야 할 버스가 연속 두 대나 지나갔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빗방울이 굵어졌다. 마침 영화제에 미리 와서 티켓팅을 하고 있다는 대학원 친구가 있어 영화 시작 전 잠시 만나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시험 기간이라 그런지 신촌 대학가 카페에는 프랜차이즈, 개인 카페 할 것 없이 만석이었다. 우리는 이곳저곳 전전하다가 큰 규모의 베이커리에 들어가 중앙, 애매한 자리에 앉았다. 오랜만이라 안부도 묻고, 편한 사이니깐 평소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오전 내내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시간은 금세 흘러 영화 상영 시간과 가까워졌다. 우리는 함께 일어나 영화제가 열리는 신촌 메가박스로 향했고 티켓 부스 앞에서 서로 다른 영화를 보기 위해 헤어졌다. 원래 친구도 추모전을 보려고 했지만 티켓이 매진이라 다른 영화를 택했다고 했다. 나의 경우 조금의 도움도 드리지 못했는데 부끄럽게도 영화제 측에서 내 몫의 티켓을 마련해주셔서 그 시간을 함께할 수 있었다. 감사한 일이었다. 담당자께 인사를 드리고 들어가 앉았는데 익숙한 얼굴의 꼬마가 있었다. 4살짜리 꼬마가 어찌나 예쁘고 야물던지 영락없는 언니의 딸이었다. 내 옆자리엔 언니의 가족들이 미리 와 앉아계셨다. 하필 그 자리였다.
첫 번째 상영된 영화는 <달팽이의 꿈>이었다. 구로에 대한 영상 스케치와 함께 구로에 대한 내레이션이 흘러나왔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옆의 꼬마 녀석이 먼저 알아차렸다. "엄마 목소리야?" 언니였다. 사회에서 가정에서 소외된 아이들과 '함께' 만든 이 영화는 그냥 언니의 꿈이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아이에게 꿈을 묻고, 꿈이 없다는 그 아이가 언니에게 나중에 무엇을 하고 싶냐는 질문을 했다. 구로의 빽빽한 쪽방촌처럼 영상에 담긴 아이들의 삶은 팍팍하기만 했다. 미로처럼 엉킨 그 삶에 언니는 카메라 하나를 놓았다. 프레임 저 밖에서 본 구로는 그저 낙후되고 소외된 곳이었는데, 프레임을 따라 본 그곳은 조금 더 복잡할 뿐 출구가 있는 여느 길과 같았다. 영화의 후반부 "영화 찍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언니의 짧은 인터뷰에 옆자리 꼬마는 아빠 품을 벗어나 엄마를 향해 조금 더 다가갔다. 하필 너무 귀여운 뒷모습이었다.
두 번째 영화는 <가리베가스>였다. 쪽방촌에 사는 선화의 이야기. 언니와 구로 투어를 할 때 스산한 골목이 늘어선 쪽방촌에 간 적이 있다. 너무 익숙하게 한 집에 들어서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언니, 안 무서워?"라는 내 질문에 "내가 살았던 곳인데 뭐가 무서워~" 영화를 위해 이 곳에서 살았던 언니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선화가 오르내리던 그 계단을 수없이 오르내렸다고 했다. 구로란 공간 자체가 낯설었던 난 솔직히 빨리 그 집을 나오고 싶었다. 아마도 익숙하지 않은 환경을 위험하다고 느낀 탓이었을 것이다. 영화 속 선화가 이사 가던 날, 부서진 장롱 문짝과 그 문짝이 남긴 이마의 상처는 공장 이전에 따라 구로를 떠나야 했던 선화의 마음을 대변했다. 그렇게 선화는 구로를 떠났고 구로의 노동자들도 하나둘씩 세상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떠나간 구로에서 언니는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을 기억했다.
<수출의 여인>과 <수추르 여인을 찾아서>는 사라진 노동자들, 사라진 구로의 이야기에 관한 기록물이다. 한 때 한국경제를 지탱하던 장소와 그것을 가득 채우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다. 언니는 늘 명자 언니와 영자 언니의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실제 명자 언니와 영자 언니를 소개하여주기도 했다. 일이 바쁘단 핑계로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하진 못했지만 전화기 너머 들리는 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마음속 깊이 응원을 하곤 했다. 경제적 가치만을 생각하며 일을 하던 내가 퇴사를 하고 가장 먼저 언니가 떠오른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구로에 있던 동상 '수출의 여인' 빈 터에 언니가 올라섰다. 옆의 꼬마는 연신 "엄마다"라고 작은 목소리를 냈다. 부끄럽게도 영상을 통해 투병하던 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다. 어찌나 그립던지. 하필 언니가 내게 와줬으면 하고 전화를 걸었던 날의 기록이었다.
상영회가 끝났다. GV를 준비하는 스텝들 사이를 지나 상영관을 나왔다. 나오려던 건 아니었는데 나도 모르게 몸이 반응을 했다. 본격적인 언니 영화 이야기를 듣고 나면 어쩐지 오늘 하루의 끝이 참 힘들 것 같았다. 이번만큼은 그냥 내가 느낀 언니만으로도 충분했다. 마지막 영상을 제외하고는 다 1~2번씩은 본 작품이었는데 추모전 내내 어찌나 새롭던지, 영화의 프레임마다 언니가 보여 어찌나 그립던지... 영화관을 나왔는데 비가 계속 내렸다. 피곤이 몰려와 재빨리 집에 가는 버스를 탔다. 중간에 갈아타려고 내린 버스 정류장의 실시간 버스정보 안내판은 하필 고장이 나서 언제 올 지 모를 버스를 기다리게 되었다. 여름의 시작, 하필 추운 날씨에 하필 버스는 오지 않았고 꽤 긴 시간 기다려 탄 버스에는 앉을자리가 없었다.
이런 귀한 자리를 마련해주신 영화제 측에 몇 번이고 감사하다는 말을 해야 마땅하지만 아직 언니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는 나와 몇몇 친구들에게 그 시간은 꽤 힘든 시간이었다. 이별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내게는 참 별 게 다 이상한 날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괜히 언니와 시장통에서 먹던 떡볶이가 생각나 다 먹지도 못할 만큼 떡볶이를 사 왔다. 떡볶이는 반절도 먹지 못한 체 함께 언니를 추억하는 친구에게 연락해 7월의 더운 어느 날 구로의 은행나무집에서 소주 한잔을 하기로 약속도 했다.
하필 그날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그립다기보다는 하필 그런 이별을 한 내가 꽤 원망스러운 시간이었다. 다음에 이런 귀한 자리가 또 주어진다면 그땐 좀 편하게 언니를 추억할 수 있게 되길... 하필 이 글은 끝을 맺기가 어렵다. 하필 이 글은 어느 매거진에 담아야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