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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크노크 Aug 26. 2017

A day of Table, track4

영화 <더 테이블> 후기 

네 개의 이야기가 하나의 테이블 위에 놓인다. 카페에 우두커니 앉아 커피를 마시다 보면 나도 모르게 옆 테이블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때가 있다. 미용실에서 무심결에 펼친 잡지의 한 페이지가 앞 뒤 맥락이 없어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기듯 카페에서 듣는 타인의 대화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리 좋은 습관은 아니지만 아주 가끔 맞은편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질 때가 있다. 


<더 테이블>은 인적 드문 카페의 창가 자리 테이블의 하루를 담아낸 영화다. 비가 오는 어느 날 새벽 빗소리와 함께 적절한 볼륨의 라디오에서 들려주는 사연처럼, 영화 속 테이블을 매개로 들려주는 네 개의 에피소드는 촉촉한 감성과 담담한 어조가 어우러져 이런저런 일상에 치여 굳게 닫았던 마음을 비집고 들어온다. 굳이 집중하지 않아도 괜스레 몰입하게 되는 그와 그녀의 이야기는 언젠가 한 번 마주쳤을 법한 나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track 1. 오전 11시, 유진과 창석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유진(정유미)이 먼저 카페에 들어와 앉는다. 쭈뼛쭈뼛 창석(정준원)이 들어와 주변을 살핀다. 막상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야 할 유명 여배우 유진은 오히려 담담하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도 하지만, 자리가 사람을 몰아가기도 한다. 좋은 추억을 이야기하기도 짧은 그 시간에 창석은 지나간 옛사랑 유진을 그저 자신의 '잘 나갔던 과거'를 증명할 가십의 증거로 전락시킨다. 

유명 여배우가 된 유진과 연인관계였음을 인증하려는 창석


track2. 오후 2시 30분, 경진과 민호 

하룻밤을 보낸 남녀가 5개월이 지나 다시 만났다. 민호(전성우)는 여러 나라를 여행했고, 경진(정은채)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이직을 했다. 내 앞길마저 불안한 청춘에게 사랑은, 그리고 우연히 보낸 하룻밤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어느 것 하나 확실하지 않은 미래야 그렇다 쳐도 하룻밤을 보낸 사람의 마음마저 확신할 수 없었으니 서로에게 기대 한발 더 나가고 싶다는 마음을 확인하기까지 그들은 얼마나 애가 탔을까. 

하룻밤을 지내고 아무런 연락없이 5개월을 지낸 뒤 재회한 진경과 민호 

track3. 오후 5시, 은희와 숙자

사기꾼은 사기꾼을 알아보고 정말 외로운 사람은 외로운 사람을 알아본다. 결혼식장에서 엄마 역할을 대신해 줄 사람을 찾던 은희(한예리)는 옥살이를 하느라 친딸의 결혼식에는 막상 가지 못했던 숙자(김혜옥)를 만나게 된다. 돈 많은 남자를 꼬시려다 그 밑의 직원과 사랑에 빠져 결혼식을 올리게 된 은희의 마음을 숙자만은 깊이 이해한다. 첫 만남이었지만, '거짓'을 위해 이어진 사이지만 누구보다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track4. 저녁 9시, 혜경과 운철 

결혼은 현실이라고 했다. 나이가 들수록 '현실'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알아간다. 가끔 '사랑'은 '현실'이란 단어를 무력화하지만 보통의 삶에서 '현실'은 '사랑'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든다. 현실은 시간이 갈수록 또렷해지지만, 사랑은 시간이 갈수록 희미해지기 때문이다. 예외도 있겠지만 우리네 삶이 예외에 속하기란 영 쉽지 않다. 혜경과 운철의 사랑은 '현실'로 점철되어 '이별'의 결과를 낫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좀처럼 떨칠 수 없던 미련은 '현실'이란 잣대 덕에 비교적 명쾌하게 정리된다.

담담하게 완벽한 '안녕'을 이야기하는 혜경과 운철


네 개의 이야기가 하나의 테이블 위에 놓인다. 하필 그 장소, 그 시간에만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테이블을 스쳐간다. 스쳐 지나갈 이야기이기 때문에 더욱 애착이 간다. 


얼마 전, 카페에서 일을 하다가 나에게 닥친 상황이 너무 버거워 엉엉 울어버린 적이 있다. 오랜만에 통화를 한 친구에게 이런저런 가벼운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나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졌다. 휴대폰을 붙잡고 한참 울고 보니 내가 '카페'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누구도 날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어쩐지 난 그 카페에 다시 갈 자신이 없다. 정말 맛있는 청포도 민트 초콜릿 케이크 한 조각을 아메리카노와 함께 깨끗하게 비운 뒤였는데 여전히 그 케이크의 맛이 기억나는 걸 보면 몇 달이 지난 뒤에야 다시 가서 케이크를 주문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를 보면서 위로가 됐다. 구구절절 나의 하루를 뒤흔든 어떤 이야기는 누군가에게 그저 스쳐가는 이야기이다. 나와 커피 그리고 시간을 나누던 이에게는 잊지 못할 이야기겠지만 그마저도 시간에 의해 휘발되어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 참 위안이 되게 만든 영화였다. 테이블에 선율이 흐른다. 네 개의 트랙이 있다. 가볍게 하나씩 듣다 보면 내 가슴에 더욱 와 닿는 선율이 있다. 흔하디 흔한 말 한마디가 가슴에 콕 박혀 쉽게 지워지지 않는 순간이 있다. 영화 <더 테이블>이 들려준 하루가 그랬다. 바쁜 일을 끝내면 카페에 우두커니 앉아 처음 보는 이가 만들어내는 선율을 듣고 싶다. 선택해 들을 순 없지만 선택해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외롭던 마음이 맥주 한 캔 그리고 테이블의 하루 트랙 3과 함께 가라앉는다. 괜찮다. 이 정도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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