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인의 사랑> 후기
시인이 되겠다는 아이에게 그리 나이도 많지 않은 어른이 말했다.
시만 써서 어떻게 밥을 벌어 먹고살겠니?
시와 밥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도 모르는 아이에게 어른은 자꾸만 먹고 살 걱정을 시켰다. 아이는 지레 시인은 '밥도 벌어먹지 못하는' 사람 정도로 생각하며 자랐고, 지난한 교육 과정을 거치며 시는 그저 시험을 위해 배우는 문학 장르로 인식했다. 대학에 가서 시는 완전히 잊힌 듯했다. 그러다가 첫사랑의 상처 위에 시 구절 하나가 마음을 간질였고 어른이 된 아이는 다시 시가 참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취업, 직장생활에 치여 시는 그저 시가 되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마흔 줄의 시인은 돈도, 타고난 재능도 없다. 없다 없다 정자마저 2개밖에 남지 않았다는 진단을 받는다. 그런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는 아내가 있지만 그에게는 그녀에 대한 애정마저 뜨듯 미지근하다. 계속되는 인공 수정 실패와 좀처럼 다듬어지지 않는 시구절에 상심한 시인에게 아내는 새로 생긴 도넛 가게의 도넛을 한 상자 선물한다. 달달한 도넛의 맛에 푹 빠진 시인은 매일같이 도넛 가게에 출근도장을 찍는다.
어느 날 시인의 아내는 시인의 수첩을 보고 그가 사랑에 빠졌음을 알아차린다. 수첩에 적힌 문장 하나에 마음을 담아내기까지 무수한 고민이 있었으리라. 그리고 그 고민의 흔적을 단숨에 알아차리기까지 아내는 남편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쌓았을 것이다. 어떤 여자인지 몰아치는 아내에게 시인의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건 시인의 마음에 담겨 한 구절의 시가 된 이는 아직 스물도 되지 않는 사내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매일같이 출근 도장을 찍는 도넛 가게 아르바이트생에게 관심을 두기 시작한다. 시인은 도넛 가게의 화장실에서 아르바이트생이 어느 대낮에 여자와 정사를 벌이는 것을 보고 아주 오랜만에 성적 쾌감을 느끼기도 하고, 어느 어두운 밤 술에 취한 그의 뒤를 따라 들어선 골목에서 오랜 병으로 고생하는 그의 아버지와 병시중과 경제 활동에 지친 그의 어머니 그리고 이로 인해 완전히 침잠된 그의 뒷모습을 목격하기도 한다. 그렇게 시인의 마음에 젊고 철없지만 어찌 보면 여린 그가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가 아버지를 여의고 갈 곳 없이 떠돌자 시인의 마음은 극에 치닫는다. 아내가 간절히 소망하던 아이가 생겼지만 시인의 사랑은 오직 그를 향해있다. 아이를 가졌다는 아내의 간곡한 부탁에 시인을 거절한 그. 시간이 흘러 우연한 장소에서 다시 만난 시인에게 그는 다시 손을 내밀어보지만 이번에는 시인이 거절하고 둘의 인연은 끝이 난다. 둘은 사랑이었을까. 시를 쉽게 정의할 수 없듯 시인의 마음에 깃든 불혹의 사랑 또한 쉽게 정의되지 않는다. 영화는 시처럼 상세한 설명보다는 드문드문 정제된 마음 한 뭉텅이를 정성스럽게 배열한다. 여기에 제주도 정취와 특성이 어우러져 심상이 완성된다.
영화에서 시인의 유일한 수입원인 초등학교 방과 후 시 수업에서 시인은 시인이 무엇이냐 묻는 학생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시인은 다른 사람을 위해 대신 울어주는 사람이야.
그럼 매일이 슬프지 않냐는 학생의 말에 시인은 그 눈물로 시를 짓는다고 덧붙인다. 시만 써서 어떻게 밥을 벌어 먹고살겠냐던 어른의 말이 어른이 된 아이의 뇌리를 스친다. 영화를 보며 시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현실과 이상 어쩌면 그 둘 중 아무것도 아닐 순간의 '시'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이 꿈과 같고 꿈이 현실과 같은 시가 우리 앞에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