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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크노크 Sep 18. 2017

완벽의 재정의

영화 <어 퍼펙트 데이>를 설명하는 완벽한 세 가지

영화 <어 퍼펙트 데이>는 보스니아 내전 이후 심각한 전쟁 후유증을 앓고 있는 마을과 이곳에 파견된 NGO 국제구호요원 맘브루(베네치오 델 토로)와 그 팀원들의 하루를 조명하고 있다. 전쟁이 '완벽'하게 망가뜨린 일상은 참혹하기만 하고, 참혹함 속에서 인간은 역설적인 무기력함을 느낀다. 불모지가 돼버린 땅에서 다시 '생명'과 '일상'이 이어지도록 돕는 구호단체 팀원의 하루는 생각보다 영웅스럽지도 않고, 거창하지도 않다. 영화의 이야기와 메시지를 잘 보여줄 세 가지를 통해 <어 퍼펙트 데이>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01. 우물 

모든 사건의 발단은 '우물의 오염'에서 시작된다. 마을의 유일한 식수인 우물에 누군가 시체를 던져 우물을 오염시킨다. 24시간 내에 시체를 꺼내 우물 안의 물을 정수하지 않으면 마을민들은 물에 대한 기본적인 권리마저 보호받지 못하게 된다. 우물은 보스니아 내전 이후의 모든 상황을 상징한다. 

오염된 우물과 시체에 연결된 밧줄

꼭 필요하기 때문에 중요한 우물은 결코 '개인'의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고 우물의 오염은 곧 마을민의 생명을 위협한다. 전쟁 또한 마찬가지다. 많은 생명을 앗아간 전쟁은 시간 내에 회복되지 않으면 더 많은 생명을 앗아가고 또 다른 전쟁을 양산한다. 우물이 오염되자 터무니없는 가격에 물을 파는 악덕업자들이 발생하고 물을 차지하기 위한 사람들의 사투는 또 다른 전쟁으로 이어진다. 우물 속의 시체는 쉽게 꺼낼 수 없다. 물리적으로는 시체의 상당한 무게 때문에, 상황적으로는 전쟁 후에 구하기 어려운 밧줄 때문에, 누군가의 엉터리 원칙에 의하면 평화와 안전 때문에 문제인 줄 알면서도 쉽게 해결할 수가 없다. 


02. 밧줄 

밧줄은 전쟁이 남긴 인간의 참혹함을 상징하는 동시에 새로운 희망을 상징한다. 낡고 힘이 없는 밧줄은 상당한 덩치의 시체를 버티지 못하고 힘없이 끊어진다. 전쟁 이후 상점에서 쉽게 살 수 있던 밧줄은 마을민 누구에게서도 구할 수 없는 '귀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 구호단체 요원 맘브루와 그 오랜 팀원 B(팀 로빈스), 현장이 처음인 신입 소피(멜리나 티에리), 통역사 다미르(페자 스투칸)는 직접 밧줄을 찾기 위한 여정에 나서고 이들을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현장 분석가 카티야(올가 쿠릴렌코)도 엉겁결에 합류하게 된다. 

맘브루와 니콜라

상점에서도 밧줄을 구하는 건 쉽지 않다. 상점에 밧줄이 많지만 주인은 팔지 않는다. 저마다의 이유로 밧줄을 구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왜 밧줄을 구할 수 없는가에 대한 질문과 그 답은 전쟁의 잔혹한 손톱과 그로 인한 상처, 여전히 끝나지 않은 전쟁의 영향을 생각해보게 만든다. 밧줄을 구하지 못하고 헤매던 중 할아버지와 단둘이 산다는 그 지역 꼬마 니콜라의 제보로 니콜라의 집에 밧줄을 가지러 간다. 밧줄이 있다던 니콜라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으나 사납다 못해 미친개에게 묶인 목줄이 니콜라가 말한 밧줄이었을 뿐. 설상가상 무너져 가는 집안에 들어가 공을 찾아오겠다며 나서는 니콜라 때문에 맘브루와 소피는 집안으로 들어간다. 


파괴된 집 내부에는 전쟁의 잔혹함이 먼지처럼 앉아 시간을 가두고 있었다. 그리고 맘브루와 소피는 몸을 피해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던 니콜라의 부모가 교수형 된 시체를 발견하고 만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이 서린 그 밧줄은 다시 우물 속 시체를 꺼낼 희망의 밧줄이 되어 차에 실린다. 영화에서 밧줄은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가는 동시의 누군가의 삶을 견인하는 역할을 한다. 


03. 소 

영화의 도입, 현장이 처음인 소피는 현장에 도가 튼 B와 같은 차를 탄다. 길가에 버려진 소의 시체를 보고 B는 저 소의 양 옆 중 하나에 지뢰가 묻혀 있을 것이라고 잔뜩 겁을 주고 거칠게 차를 몰아 소의 시체를 밟고 그 길을 통과한다. 소피에게 이 모든 것은 충격 그 자체가 된다.

소의 시체와 좌우에 묻혔을지 모르는 지뢰

니콜라 부모의 시신과 여러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소피와 그 일행의 눈 앞에 다시 나타난 소의 시체는 밧줄을 구해 마을로 향하는 팀원들에게 심각한 장애물이 된다. B의 농담과 달리 이번엔 안전책임자 맘브루가 볼 때도 지뢰가 묻힌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어렵게 밧줄을 구했지만 우물을 정화하러 가지 못할 또 하나의 이유가 생겼고 소라는 생명체의 죽음 아래 또 다른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이다. 이들은 우선 멈춰 섰다. 

죽은 소 앞에 멈춰 밤을 보내는 멤버들

차에 있는 통조림으로 식사를 해결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는 저물어 가고 있었다. 안간힘을 써도 반드시 멈춰야 하는 무기력의 순간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동이 틀 무렵 그들은 소를 통해 다시금 길을 열어 간다. 소를 이끌고 지뢰를 피해 마을로 돌아가는 노파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소를 몰아 마을로 돌아가는 노파 

영리한 노파는 소를 앞세워 지뢰가 없는 곳을 피해 마을로 돌아가는 중이었고, 맘브루와 팀원들은 노파의 뒤를 쫓아 운전을 해서 마을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00. 전쟁 혹은 원칙 

이제 모든 것은 우물 안 시체를 꺼내 마을을 살릴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시체를 반쯤 들어 올렸을 때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한다. 도움을 거절한 UN이 지역의 평화와 안전 수칙을 들먹이며 작업을 중단시킨 것이다. 평화를 지킨다는 UN군에 의해 어렵게 구한 밧줄은 다시 끊어진다. 

UN군과 그 호송차 

전쟁은 언제나 '명분'이 있다. 돌이켜보면 모든 잔인함을 설명할 만큼 타당한 명분이 없지만 그럼에도 늘 명분이 있다. 전쟁 이후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인간의 '원칙'에는 언제나 불합리성이 있다. 이것을 타개할만한 인간의 용기는 가끔 인간이 만든 원칙에 의해 모든 것이 무산된다. 


맘브루와 팀원들은 다시 마을을 살리기 위해 차에 올라탄다. 그럭저럭 맘처럼 되지 않는 이 모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던 찰나 '비만 안 오면 되지'라는 B의 말에 비가 한 방울 씩 떨어지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완벽한 하루다. 극한의 상황에서 혹은 일상에서 인생은 '거시적인' 관점보다 '미시적인' 지금 당장의 상황에 몰입할 필요가 있다. 내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오늘 당장의 상황에 집중하다 보면 '완벽함'은 발휘될 수 있다. 인간은 완벽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돌아갈 수 있는 것, 조금 더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이 조금씩 완벽한 행복을 만들어갈 수 있다. 전쟁의 참혹함과 영화 속에 그려지는 상황은 처참했지만 자연은 아름다웠고 팀원들의 농담은 위기 속에서 더욱 빛났다. 꽤나 완벽한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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