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리뷰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는 다소 충격적인 제목을 가진 이 영화는 주인공 사쿠라의 일기장인 공병문고(共病文庫)로부터 시작된다. 공병문고의 의미가 영화에 설명되진 않았지만 한자의 뜻을 미루어볼 때 췌장의 병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쿠라가 남긴 '병과 함께한' 시간에 대한 기록물임을 알 수 있다.
프롤로그(Prologue)
#읽어버리고 말았다, 공병문고
사쿠라는 자신의 병이 매우 두렵지만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쉽지 않은 결정이지만 소중하게 남은 삶마저 병이라는 녀석 때문에 슬픔에 빠져 지내고 싶지 않아 모두에게 병에 걸린 것을 비밀로 한다. 하지만 맹장수술 실밥을 풀러 병원에 온 같은 반 하루키가 우연히 사쿠라의 공병문고를 읽게 되고 사쿠라의 병을 알게 된다.
"비밀을 말하지 않을 테니 감시하지 않아도 돼."
사쿠라는 자신을 알게 된 하루키의 주변을 맴돈다. 도서위원으로 책 분류 작업을 하는 하루키에게 사쿠라는 무척 신경 쓰이는 존재다. 스스로를 외톨이라 칭하며 어떤 누구와도 친구 관계를 맺지 않는 하루키는 사쿠라에게 비밀을 말하지 않을 테니, 감시하지 않아도 된다며 안심시키지만 사쿠라는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일상'처럼 만들어 줄 책임을 하루키에게 부가하며 둘만의 비밀스러운 일정을 만든다.
#1. 사이좋은 클래스메이트
스스로 외톨이를 자처한 하루키에게 반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학생인 사쿠라는 부담스러운 존재다. 그림자처럼 조용하게 학교를 오가던 그는 사쿠라와의 비밀스러운 이벤트 덕에 일약 관심의 대상이 된다. 실제 원작에서 하루키는 이름이 아닌 외톨이 '나'로 서술된다. '나'와 다르게 모두의 사랑과 관심을 받는 사쿠라와의 관계는 당황스럽기만 하다. 사쿠라는 모두에게 '사이좋은 클래스메이트'라고 둘 사이를 설명한다.
처음에 하루키는 사쿠라의 비밀 때문에 엉겁결에 맺게 된 계약 관계의 '사이좋은 클래스메이트'라고 생각하지만 점차 사쿠라의 삶이 지속되길, 그녀의 병이 낫길 기도하게 된다. 사쿠라 또한 '사이좋은 클래스메이트'인 하루키 덕에 일상을 유지하고 친구 그 이상의 감정을 넘나 든다.
하루키는 두 사람이 친구가 된 것, 하루키가 사쿠라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서로의 선택이 만들어 낸 결과라는 사쿠라의 말에 동의하게 된다. 사쿠라의 말대로 하루키 자신이 도서관에 앉아 조용히 문고판 책을 읽는 대신 새롭게 도서위원이 된 사쿠라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가르쳐주기로 결정했고, 시한부 선고를 받은 그녀를 위해 그녀의 특별한 제안에 수긍하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사이좋은 클래스메이트'가 되길 선택했고 그 선택은 두 사람의 인생에 큰 의미가 된다.
#2. 공병문고와 도서관
도서위원인 하루키는 촘촘히 도서목록을 정리한다. 이 장면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완성해가는 하루키의 성격이 여실히 드러난다. 책이 미아가 되면 슬플 것이라며 꼼꼼하게 책의 좌표를 기록하는 하루키에게 사쿠라는 미아가 된 책을 열심히 찾아 다시 발견했을 때의 기쁨을 이야기한다. 사쿠라와 쌓은 도서관에서의 추억은 사쿠라가 죽은 뒤 12년 후 선생님이 되어 도서관을 찾은 하루키가 공병문고를 다시 꺼내 들게 만드는 계기가 되고, 미아가 된 책을 열심히 찾아 12년 전 그녀의 흔적을 다시 느끼게 만드는 기쁨이 된다.
사쿠라는 '나 아닌 누군가와 서로 마음을 통하게 하는 것을 가리켜 산다라고 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하루키가 그녀의 친구 쿄코와도 친구가 되길, 다른 누구와도 마음을 열고 함께 살아가길 간절히 바란다. 공병문고는 병 중에 적는 삶의 기록인 동시에 자신의 마음과 통할 누군가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있다. 사쿠라와 은밀하게 병의 비밀을 간직하며 하루하루를 보낸 하루키는 공병문고의 유일한 독자가 된다. 사쿠라의 죽음 이후 하루키는 누군가와 깊은 마음을 나누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만 12년 후 도서관에서 사쿠라의 흔적을 발견하고 다시 꺼내 든 공병문고를 통해 누군가와 깊은 마음을 나누는 일이 무척 소중한 일임을 깨닫는다.
#3.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사쿠라는 하루키에게 옛사람들은 자신이 안 좋은 부분이 있으면 다른 동물의 그 부분을 먹으면 괜찮아진다고 믿었다며 "너의 췌장을 먹고 싶다"라고 말한다. 농담처럼 이야기하는 사쿠라와 달리 하루키의 표정은 사뭇 심각하다. 이후에도 사쿠라는 동물의 내장을 먹으러 가자며 하루키를 이끌고 곱창전골을 먹으러 가기도 한다. 하루키는 사쿠라의 말이 농담임을 알면서도 췌장을 먹고 싶다는 사쿠라의 표현에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다.
사쿠라는 장기의 일부를 먹으면 그 사람 안에서 평생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을 덧붙이며 하루키에게 자신의 췌장을 먹어달라는 말도 한다. 문장 자체로는 무시무시한 사쿠라의 말에 하루키는 당황하지만 이내 사쿠라에게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라는 문자를 보내고 그녀의 반응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하루키와의 벚꽃 여행을 위해 잠깐 퇴원한 사쿠라가 췌장암이 아니라 묻지 마 살인으로 갑작스럽게 살해되면서 하루키는 사쿠라에게 어떤 답장도 받지 못한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답을 기다리며 느낀 설렘이 슬픔과 좌절로 어렵게 열린 하루키의 마음을 다시 어둠 속으로 가둔다.
에필로그(Epilogue)
#기억할게, 공병문고
12년이 지난 뒤 어렵게 발견한 사쿠라의 유서로 하루키는 다시 마음을 열고 살아갈 힘을 얻는다. 누군가와 마음을 통하게 하는 것이 '산다'라고 정의한 사쿠라의 말을 믿어보기로 한 것이다. 누군가를 그 사람 자체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사랑하고, 미워하고,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기뻐하면서 함께 나아가는 것을 조금씩 노력하기로 한다. 하루키에게 사쿠라가 남긴 공병문고는 꽉 닫힌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이자, 평생 사쿠라를 마음속에 담아두게 할 췌장이 된다.
하루키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려 비로소 "췌장을 먹고 싶다"는 사쿠라의 말을 이해하게 된다. 누군가의 삶이 변화하는 데 있어 한 사람의 역할은 꽤나 중요하다. 이야기의 전개는 전형적인 일본 청춘 로맨스라 다소 신파적인 느낌도 있었다. '감정'에 대해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영화를 오랜만에 본 덕분에 쉽게 적응이 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10여 년 전에 내 마음을 설레게 했던 오구리 슌의 나이 듦을 발견하여 마음 한 구석이 씁쓸해지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사쿠라의 몇 마디와 하루키의 눈물 그리고 공병문고가 마음에 남는 것이 싫지 않은 영화였다.
이렇게 <너의 췌장을 먹고싶어>는 쌀쌀해진 날씨에 보기 좋은, 인간관계에 상심한 지난 1년을 위로하기에 꽤 좋은 영화로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