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원더 휠> 리뷰
코니 아일랜드, 1950년, 해변
난 여기서 일을 합니다
영화 <원더 휠>은 해변 안전 요원으로 일하는 등장인물 믹키(저스틴 팀버레이크)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믹키는 마치 극본을 읽는 것처럼 장소, 시간 그리고 주인공에 대한 소개를 이어간다. 믹키 본인의 소개에도 물론 예외는 없다. 자신을 '캐릭터'라고 말하며 1950년대 뉴욕의 가장 화려했던 유원지 코니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어느 여름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자, 캐롤라이나(주노 템플)가 입장합니다.' 믹키의 내레이션과 동시에 뜨거운 태양 그리고 즐거움과 기대로 가득 찬 코니 아일랜드엔 수심 깊은 얼굴의 캐롤라이나가 등장한다.
잘 나가는 이탈리안 갱스터의 아내로 캐롤라이나는 화려한 삶을 살았다. 부모님과 등을 돌리면서까지 '더 짜릿한 경험'을 위해 선택한 결혼은 5년도 지속되지 못한다. 사랑과 모험은 결국 죽음으로 캐롤라이나를 밀어 넣는다. 전형적인 금지된 사랑의 플롯의 결말이다.
등 돌린 아버지 험티(제임스 벨루시)를 찾아간 캐롤라이나가 처음 만난 건 새엄마 지니(케이트 윈슬렛)다. 코니 아일랜드의 한 레스토랑에서 웨이트리스로 일 하는 지니는 한 때 유명한 배우를 꿈 꾸며 무대를 누비던 무명의 배우였다.
인기가 많았던 건 아니지만 미래가 있었고, 맡은 배역이 아무리 작더라도 더 나은 배역을 맡으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이제 지니가 맡은 건 유원지의 레스토랑 웨이트리스. 더 나은 역할을 맡으리라는 작은 희망도 품을 수 없을 만큼 나이가 들었고, 자신을 빛나게 해주던 한 남자를 배신한 죄책감을 쉽게 지울 수 없다.
그녀의 두 번째 남편 험티의 행복한 삶은 똑똑하고 사랑스러운 딸 캐롤라이나가 갱스터와 결혼을 하면서 무너져 내렸다. 딸을 떠나보낸 부인은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고 그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암흑의 시절 한 줄기 빛이 된 지니와 결혼 생활을 이어가지만 그 빛은 위태롭기만 하다.
과거는 자꾸만 등장인물들의 발목을 잡는다. 비참한 일상을 겨우 버티던 주인공들에게 찾아온 손님은 반짝이던 과거를 떠올리게 만든다. 지니와 캐롤라이나에겐 믹키가 그런 사람이었고, 험티에게는 캐롤라이나가 그랬다.
여름의 한가운데, 해변이 비는 시간은 비가 오는 날 뿐이다. 비가 내리는 텅 빈 해변을 걷는 지니에게 믹키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다가온다. 배우를 꿈꾸던 지니에게 작가 지망생 믹키는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와 같다. 둘은 금세 마음과 몸을 섞으며 내연 관계가 된다. 지니는 사랑하는 남자를 자신의 외도로 떠나보내 평생 후회를 안고 살아왔지만 믹키로 인해 또다시 외도를 하게 된다.
믹키가 살고 있는 곳은 코니 아일랜드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장소다. 마치 무대에 오르는 배우처럼 지니와 믹키는 사랑을 나눈다. 무대를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온 지니의 삶은 더욱 비참해진다.
방화를 저지르는 골칫덩이 아들, 공감은커녕 일상의 대화조차 이어가기 힘든 남편. 여기에 갑작스러운 캐롤라이나의 등장은 지니의 두통을 더욱 심화시킨다.
좁은 코니 아일랜드에서 매력적인 캐롤라이나는 곧 많은 남자들의 구애를 받는다. 믹키와 캐롤라이나와의 만남은 지니를 더욱 불안하게 만든다. 외모적으로 가장 반짝이는 순간을 살고 있는 캐롤라이나. 과거마저 화려한 캐롤라이나에게 빠져드는 믹키를 보며 지니는 병적인 불안감을 느낀다.
믹키에 대한 지니의 마음이 커질수록 지니는 두려워진다. 자신은 결코 가질 수 없는 '젊음'을 가진 믹키와 캐롤라이나의 사랑이 염려되기 때문이다. 지니가 일상을 외면할수록 지니의 아들은 엄마의 관심을 갖기 위해 잦은 방화를 저지르지만 지니의 관심은 오직 언제 떠날지 모르는 믹키에게 향한다.
깨어난 욕망은 걷잡을 수가 없다. 지니는 아이의 치료비 100달러는 없다고 하지만, 믹키의 마음을 잡기 위해 남편 험티의 비상금 400달러를 훔쳐 믹키가 가지고 싶던 시계를 선물한다. 이미 캐롤라이나에게 마음이 기운 믹키는 시계를 거절하고 욕망을 주체할 수 없는 지니는 시계를 해변에 던져버리고 그 자리를 떠난다.
지니는 믹키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자 큰 상심에 빠진다. 술을 마시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 레스토랑에 출근을 한 지니는 갱스터가 캐롤라이나를 찾아 믹키와 지니가 데이트하는 피자집에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빨리 몸을 피하라고 피자집에 전화를 걸지만 하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캐롤라이나는 행적을 감춘다. 험티와 믹키가 차례로 찾아와 지니를 의심하고 원망하지만 지니는 오히려 배우 시절 입었던 반짝이는 드레스를 입고, 반짝이는 소품을 몸에 걸친다.
어쩌면 지니에게 믹키는 허구의 인물일지도 모른다. 비참한 일상을 견딜 수 없어 스스로 만들어 낸 허구일지도 모른다. 놀랍도록 매력적이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지니의 마음을 잘 이해한다. 마치 잘 짜인 극본처럼 두 사람의 사랑은 깊어진다. 그리고 캐롤라이나로 인해 갈등이 생기고 둘은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사실 믹키가 중간에 없더라도 결말은 같을 수 있다. 지니는 말이 통하지 않는 주정뱅이 남편 험티와 상습 방화범인 어린 아들 그리고 뒤늦게 나타나 험티의 돈을 축내는 험티의 희망, 젊고 예쁜 캐롤라이나에게서 벗어나고 싶다. 지긋지긋한 웨이트리스 배역을 때려치우고 핀 조명을 받으며 무대에 올라 다양한 삶을 살고 싶다. 지니의 그런 욕망이 '믹키'라는 허구를 불러내 갈등을 심화시켰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빛바랜 유원지 코니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네 남녀의 이야기는 반짝이던 과거를 대하는 인간의 욕망을 잘 나타낸다. 서서히 올랐다가 서서히 내려가는 관람차 원더 휠(Wonder Wheel)처럼 우리네 인생은 서서히 올라 가장 높은 곳에서 행복하고 아름다운 광경을 내려다본다. 그리고 서서히 내려와 다시 일상에 정착한다. 유원지 밖에서 볼 때 반짝이는 관람차는 아름답다.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의 개인사와는 상관없이 어김없이 아름다운 풍경이 된다. 찰리 채플린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사람들이 과거를 마주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다. 아름다운 풍경으로 남기기도 하고, 다시 돌아갈 수 없어 더욱 간절한 꿈이 되기도 한다. 반짝이던 시간은 도리어 비수가 되어 마음에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희극인 것처럼 잔뜩 쾌활하게 시작해 툭 비극을 내던지는 영화 <원더 휠>의 전개가 꽤 마음에 든다. 틈만 나면 불을 내던 아이의 손동작에서 외로움을, 자꾸만 과거의 연극 소품을 꺼내 보며 과거를 회상하는 지니에게서 후회를, 행방을 알 수 없게 된 캐롤라이나에게서 운명을, 지나치게 감정적이며 작가적인 '캐릭터' 믹키에게서 인간의 욕망을, 혼자가 되기 싫어 폭언과 구애를 반복하는 험티에게서 나약함을 엿볼 수 있었다. 생동적인 배경과 아름다운 색감 위에 대수롭지 않게 펼쳐지는 삶의 비극이 참 인상 깊었던 영화였다.
자, 당신의 반짝이던 시간을 위한 건배사, 원더 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