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틀 포레스트> 리뷰
* 본 영화는 브런치 무비패스로 감상하였습니다.
아니, 대체 왜 이 시골로 다시 돌아온 거야?라는 친구 은숙의 대답에 혜원은 이렇게 답한다.
배가 고파서
진짜야, 배가 고파서 온 거야
스무 살,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간 혜원은 늘 허기진 삶을 산다. 혜원의 냉장고엔 날짜가 지난 편의점 도시락, 검게 변한 바나나, 유통기한 따위는 잊은 지 오래된 유제품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혜원은 먹지만 배가 부르지 않다. 서울살이는 시간과 돈 그리고 복잡한 관계에 쫓기지만 정작 내 몫의 꿈 하나 챙기기도 버거운 삶의 연속이었다. 임용고시에 또 떨어지자 혜원은 도망치듯 고향으로 향한다.
스무 살이 되던 해, 혜원의 엄마는 훌쩍 떠난다. 어떤 예고도 없이. 혜원에게 엄마가 남긴 것은 계절과 마음을 담아내는 레시피와 맛있는 음식을 함께 만들어 먹던 시간뿐이다. 엄마가 사라지자 혜원에게 끼니는 그저 살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혜원이 남자친구를 위해 정성껏 만든 도시락은 남자친구에게조차 시간을 '낭비'하는 행위로 치부되기도 한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정작 지어먹는 일에 관심이 없는 도시에서의 삶은 혜원을 점점 굶주리게 만들었다.
도시에서는 계절을 잘 느끼지 못한다. 슈퍼에 가면 언제든 원하는 음식을 살 수 있다. 무엇이 제철 과일인지, 제철 채소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신선 식품 코너에서 랩에 포장된 채소가 저렴하면 제철, 아니면 제철은 아닐 거라 추측 할 뿐이다.
혜원의 음식엔 계절이 담긴다.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와서 얼마 남지 않은 쌀로 밥을 짓고, 쌓인 눈을 치워 밭에서 꺼낸 배추잎으로 배춧국을 끓여 먹는다. 찬도 없고 재료도 부실하지만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채 겨울을 맞은 이에게 꼭 적당한 음식이다.
묵은 김치를 꺼내 갓 부친 전은 미리 만들어 둔 막걸리와 어우러져 긴 겨울밤을 풍요롭게 한다. 늙은 호박으로 만든 설기떡은 마음까지 든든하게 채워준다. 아카시아 꽃이 필 땐 아카시아 꽃으로 튀김을 만들고, 꽃으로 파스타를 만든다. 여름엔 콩물을 만들어 시원한 콩국수로 더위를 달랜다. 신선한 양배추와 닭이 낳은 달걀 그리고 마요네즈가 만나면 환상적인 샌드위치가 완성된다. 레시피에 계절을 담기 위해 혜원은 늘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움직이지 않으면 계절은 지나고 계절이 주는 선물을 맛있게 누릴 수가 없다.
기분에 따라 먹고 싶은 음식이 달라진다. 어떤 음식이 먹고 싶다는 건, 우리 몸이 그 음식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라고 엄마는 말했다. 영화에서 혜원의 요리엔 늘 마음이 담긴다. 엄마의 레시피와 다르게 떡을 만들며 엄마를 떠올린다. 단단히 마음이 상한 친구 은숙에게는 어린 시절,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해 마음이 상한 혜원에게 엄마가 만들어주었던 크렘 브륄레를 주며 마음을 녹인다.
막걸리를 마시는 엄마 앞에 앉아 식혜를 마시던 어린 혜원은 자라서 '어른의 맛'을 내는 막걸리를 담근다. 막걸리 잔에는 엄마와의 추억이, 친구들과의 우정이 담긴다.
직장에서 잔뜩 열이 받은 은숙에게 혜원은 셀프요리를 권한다. 은숙은 청양고추를 듬뿍, 고추장을 듬뿍 풀어 얼큰하고 매운 떡볶이를 만들어낸다. 은숙의 마음이 고스란히 들어간 떡볶이를 나눠먹으며 세 친구는 연신 물을 마셔댄다. 매움이 해소되는 만큼 은숙의 마음도 가라앉는다.
그렇다 음식에는 그날의 기분이, 마음이 반영될수록 만족감이 높다. 그리고 마음이 잔뜩 복잡해질 땐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 맛있는 음식을 만들면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가장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기다림은 필수적이다. 금세 요리로 담아내는 타이밍도 중요하지만 맛있는 요리 재료가 되길 기다리는 시간 또한 필요하다.
맛있는 곶감을 먹기 위해서는 단감을 깎아 손질해 걸어두고 중간중간 모양을 잡아줘야 한다. 시간이 흐르지 않으면 결코 맛있는 곶감을 먹을 수 없다. 눈을 치우고 난 뒤 뜨끈한 수제비를 먹으려면 눈을 치우기 전에 반죽을 치대 놓아야 한다. 막걸리도 누룩이 발효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달콤한 밤조림도 양념이 밤에 스밀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적게는 몇 시간에서 많게는 몇 달이 걸린다.
땅이 녹으면 씨를 심어야 하고, 나무에 열매가 맺길 기다려야 한다. 그 기다림 속에서 인간은 어느 하나 같은 방식으로 자라나는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토마토는 그냥 꼬다리를 아무렇게나 던져놓아도 흙의 양분을 받아 자라지만 양파는 잠깐 심었다가 싹이 나면 완전히 심는 아주심기를 해야 한다.
비라도 한 번 심하게 내리면 1년 간의 기다림이 물거품이 되기도 하지만 그럼 더 기다려야 한다. 조급하게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분명 탈이 나고 만다. 리틀 포레스트의 레시피엔 분명 기다림이 큰 몫을 차지한다.
리틀 포레스트, 작은 숲이다. 시골에 심겨 시골에서 자란 혜원에게 시골은 뿌리다. 누구에게나 다시 돌아가 쉴 수 있는 양분 가득한 토양이, 안락한 그늘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바로 지금 그 작은 숲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그래서 과감히 복잡한 것을 내려놓고 자신만의 작은 숲을 향해 가는 결단이 필요하다.
함께 심겨 흙 안에서 어우러진 친구들과 복작거리는 시간은 인생이란 요리에 쓸 가장 훌륭한 재료가 된다. 누구나 작은 숲이 필요하다. 어느 정도 자랐다고 해서 방치하면 곧 기력을 잃고 쓰러지고 만다. 다시 돌아가 힘을 채우고 더 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작은 숲이 필요하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보면서 내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을 나의 작은 숲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슬슬 봄이다. 추위에 웅크렸던 지난 날을 깨끗하게 세탁해 장롱에 넣고 기지개를 펴야겠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아직은 온전하지 않은 나의 작은 숲을 가꿔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