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저널리즘 <알메달렌, 축제의 정치를 만나다> 리뷰
모든 사람이 정치인이다.
누구든 자기 생각을 전하고 움직이면
사회를 바꾸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올로프 팔메 (스웨덴 26대 총리)
이상적인 말이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 이 말을 보았더라면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내가 선 자리에서 조금씩 좋은 방향으로 세상을 바꿔가리라 굳은 다짐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적인'이란 수식어를 붙일 수밖에 없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 할아버지가 내게 하신 유일한 당부는 '건강해라', '장학금 받아라'도 아닌 '절대 운동하지 말아라'였다. (여기서 운동은 집회 등에 참여하여 목소리를 내는 사회 운동을 의미한다.) 운동권 세대가 분명 아님에도 불구하고 중학교 때부터 시민단체 활동을 시작하고 고등학교 땐 그 활동을 학교 동아리로 옮겨온 손녀딸이 걱정이 되셨던 모양이다.
사회에 나와 내 생각을 가지고 움직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부당한 일이 있어 문제를 제기하려고 하면 주변에서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단단한 나무가 먼저 부러진다' 등의 옛 말을 인용하며 두 팔 걷어붙이고 말리곤 했다. 그렇게 난 최대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나를 지켜가는 것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 전 읽었던 최연혁 교수의 <알메달렌, 축제의 정치를 만나다>는 휴일을 이용해 선거 우편물을 보며 '최악'의 선택만 막아야지 싶었던 소극적 시민인 나에게 아주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흥미로운 내용으로 페이지는 빠르게 넘어갔고 읽는 내내 기분 좋은 상상을 할 수 있었지만 책을 덮자 전혀 막다른 현실 앞에서 방관자로 살아가는 나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스웨덴의 선거 투표 참여율은 85퍼센트가 넘는다. 이 참여율은 단순히 높은 숫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스웨덴 시민들의 자발성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에 더 큰 의미가 있다.
저자는 매년 7월 스웨덴 알메달렌에서 열리는 정책 박람회, 알메달렌 주간(Almedalen Week)에 7년 간 참여하면서 목격한 것을 바탕으로 스웨덴의 정치가 어떻게 시민들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 수 있었는지 소개한다.
알메달렌은 우리나라의 제주도와 비슷한 관광지인 고틀란드 섬의 주도 비스뷔 Visby의 시내 중심가다. 고틀란드 섬은 16세기까지 중요한 거점 상업 도시였고, 중세기에는 한자 Hansa 동맹이라는 독일 상업활동의 중심지였다. 그 고틀란드의 핵심 지역이 알메달렌이다. 중세의 성이 감싸고 있는 섬의 중앙에 위치한 알메달렌에서 주간 세미나와 거리 행사, 저녁 축제 등이 모두 열린다. (중략) 독특하고 낭만적인 분위기 속에서 스웨덴의 정치는 축제로 다시 태어난다. (21pp-22pp)
세계인들이 주목하는 이 축제는 1968년 7월 휴가를 내고 고틀란드 섬에 머무르고 있었던 당시 교육부 장관 울로프 팔메의 정책 간담회로부터 시작되었다.
원래 예정된 행사는 아니었고 휴가 중인 팔메가 시당 위원장의 부탁으로 급작스럽게 시민들과 정책 간담회를 열게 된 것이었다. 그가 선 광장에는 달랑 덤프트럭 한 대가 있었고, 팔메가 그곳에 올라 즉석연설을 시작하면서 큰 호응을 얻게 된 것이다.
알메달렌 주간은 이제 모든 정당 대표와 정책 전국에서 모인 시민들로 북적거린다. 휴가철 휴가지에 모인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편안한 차림으로 정책 세미나를 듣고 커피를 마시며 정책을 논의한다. 굳이 휴가를 보내러 정책 박람회에 오다니! 우리 정서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아 책에 서술된 축제의 몇 장면을 그대로 옮겨 보았다.
"빵과 쿠키는 오늘 새벽 제가 구웠어요, 맛있게 드세요." 배경 음악으로 잔잔한 재즈가 들려온다. 아침 햇살이 스며드는 텐트 세미나장은 카페 같기도, 춤을 출 수 있는 클럽 같기도 한 묘한 분위기다. 커피를 마시며 재즈 음악과 함께 들려오는 스웨덴 연금 문제에 대한 토론, 낯설지만 신선하다. 나의 삶이 중요하듯, 남의 삶도 중요하다는 것. 커피를 마시고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친구를 사귀는 것이 연금 문제에 대한 논의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 우연히 들어간 작은 텐트에서의 경험은 일상과 정치가 어떻게 하나가 되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43p)
"눈이 나쁜데도 경제적인 이유로 안경을 쓰지 못하는 어린이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중략) 대답하는 정치인에게 "정당 대표로서 같은 당 도의원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겠느냐?"며 당 차원의 대책을 묻는 질문을 이어갔다.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 건 다름 아닌 5월의 꽃 Majblomman이란 어린이 기자단의 기자였다. (49p)
정치인의 연설과 정책 토론도 내용과 재미가 적절하게 섞이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예술이 될 수 있다. 스웨덴의 정치인들이 사용하는 정제된 수사법은 언어의 감칠맛을 돋우는 양념과도 같다. 함께 웃고 박수를 보내다 보면 정치는 더 이사 어렵거나 무미건조한 메시지가 아니다. 거리에서 쉽게 카페에 들어가 커피 한 잔 마시듯, 쉽게 정치인들의 이야기를 찾아보게 되고 귀담아듣게 된다. (56p)
개방성이 가장 중요한 알메달렌에서는 누구나 총리와 각 정당 대표 같은 유력 인사들에게 접근할 수 있다. 정당 대표들이 연설하는 공원 주위에만 1만 2,000명이 넘는 군중이 운집한다. 정치인이 참석하는 세미나 어디를 가도 아무도 제지하지 않고 바로 앞까지 갈 수 있다. (62p)
휴가지의 여름밤에 이루어지는 알메달렌 주간은 특별하다. 우선 복장이 자유롭고, 청중의 모습 또한 각양각색이다. 1시간에 걸쳐 진행되는 정치인의 연설은 스탠딩 코미디에 가깝다. 자연스러운 톤을 유지하고 재미와 웃음을 주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정책에 대한 문제와 대안은 모두 들어가 있다.
이처럼 스웨덴 시민에게 정치는 어렵고 지루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일상과 직결되어 있는 삶 그 자체다. 알메달렌이 축제이기 때문에 이런 자유로운 모습이 연출되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제 아무리 축제라고 하더라도 휴가 기간 정책 박람회에 참여해 열띤 토론을 나에게 벌이라고 한다면 난 선뜻 그러자고 하진 못할 것이다. 정치인들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의전 없이 1만 명이 운집한 그곳에서 정책을 논의할만한 용기가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알메달렌 위크는 정책을 주제로 한 단발적인 축제가 아니라 시민들이 정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2017년 19대 대선에서 77.2%의 투표율을 보인 대한민국의 정치 풍경은 어떨까? 결이 많이 다르긴 하지만 스웨덴에 알메달렌이 있다면 대한민국엔 촛불집회가 있다. 해가 진 이후 옥외집회 또는 시위를 금지하는 법률에 저촉되는 것을 막기 위해 문화제 형식으로 열려 촛불문화제라고도 부른다.
촛불 집회는 1992년 인터넷 서비스망 하이텔의 유료화에 반대해 처음 열렸고 2002년 효순이 미선이 추모를 위한 촛불 집회가 화제가 되었다. 이후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시위, 2008년 미국 FTA 반대 시위 등이 이어졌고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위한 촛불 집회가 세계적인 화제로 떠올랐다.
2008년부터는 주도세력 없이 자발적 개인들이 모여 촛불을 들었다. 특히 2016년엔 SNS 해시태그, 1인 미디어 등에 실시간 공유되면서 그 영향력이 더욱 커졌고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하며 다양한 모습의 평화 시위로 발전하였다. 촛불집회는 남녀노소 참여해 비폭력적인 주장을 펼쳤다는 점에서 직접민주주의의 새로운 실험으로 평가받기도 했고 조금 더 나은 한국을 만드는 데 큰 몫을 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촛불 집회는 큰 이슈를 두고 단기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 한계를 가진다. 국민들이 특정 문제 혹은 정책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지만, 이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일상에서 더 많은 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기실 우리에게 '정치'는 일상의 영역이 아니다. 전 국민의 입에 정치 이슈가 거론되는 것은 선거철 혹은 대규모 시위가 열릴 때 잠깐이다.
어김없이 선거 기간은 돌아왔고 6.13 지방선거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본격적인 선거운동 기간이 되자 원색의 티셔츠를 입고 후보자 이름과 약력이 적힌 명함을 나눠주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 출퇴근길엔 어김없이 선거홍보용 차량도 동원된 선거유세도 보게 된다. 누구의 목소리가 더 큰 지, 누가 더 좋은 타이밍에 인사를 하는지 경쟁하는 것처럼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불특정 다수를 향한 90도 인사의 횟수는 잦아진다.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온)란 단어가 생각나는 건 나뿐일까. 선거기간에만 나타나 친한 척 시민들에게 악수를 건네는 사람들, 자신의 공약보다 상대 후보의 결점을 더 상세히 말하는 정치인들은 나에게 갑툭튀 존재일 수밖에 없다.
간혹 후보자는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선거 알바를 하시는 아주머니의 얼굴이 구면인 경우가 있다. 아는 분 중에 한 분은 지난 선거 때는 야당 후보자의 선거 캠프에서 알바를 하셨고, 이번 선거 때는 여당 후보자의 선거 캠프에서 알바를 하신다고 한다. 알바도 경력 싸움이라 어렵지 않게 자리를 구하셨다고.
선거를 위한 정치. 선거 기간의 풍경을 보고 있자면 자신의 소명이 마치 선거의 '당선' 뿐인 것처럼 오직 선거만을 위한 행보를 이어가는 정치인들이 많다. 물론 모든 정치인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상에서 마주친 정치는 권력의 또 다른 창구로 보이는 경우가 많다.
정치인들은 선거 기간에 시장을 돌며 '서민'을 운운하지만 막상 카메라 프레임에는 엄청난 선거 유세에도 무관심하게 지나치는 시민들(상단 좌측 사진)이나 허리가 꼿꼿한 정치인과 다르게 허리를 굽히며 두 손으로 악수를 하는 시민들(상단 우측 사진)의 우리나라의 정치 현실이 잘 반영된 사진이 찍히곤 한다.
과연 이 사회의 주인은 누구일까? 저자는 우리나라에서 정치가 권력을 위한 수단으로 정착되어 있음을 스웨덴의 사례를 들어 지적한다.
스웨덴에서는 정계에 진입하는 문이 모두에게 활짝 열려있다. 여성 정치 지망생의 수가 남성과 비교해서 큰 차이가 없다. 지방 정치는 봉사직이기 때문에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 여가 시간을 활용해 정치를 택한다. 자녀의 교육, 학교 문제, 장바구니 경제, 탁아소, 노인 복지 등과 같은 생활 이슈에 비교적 관심도가 높은 여성이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한다. 여성의 참여가 많다 보니 상임 위원 및 상임 위원장 선출에서도 남녀가 균등한 기회를 부여받는다. (35p)
신진 정치인을 수급하는 것이 문제라는 스웨덴 정당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한국에서 온 참가자들이 모두 감탄한다. 한국에서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나 재력을 가진 사람들이 더 큰 권력을 위해 정치에 뛰어드는 일이 일상화되어 있지 않던가. (79p)
우리나라의 정치는 경직되어 있다. 일방적인 연설은 있지만 대화는 부족하다. 여야의 회담은 결렬되지 않는 것이 이상하고 농담이 오가는 대화를 나눈 날이면 어김없이 기사가 난다. 서로의 의견을 견제하기 위해 정당이 있는 것이지만 결국 그들의 공동 목표는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든다는 것일 텐데 양당의 평화로운 대화가 기사거리가 되는 사회라면 무언가 문제가 있지 않을까?
정당마다 추구하는 가치와 정책이 다른데도 수시로 협의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선거 때에는 경쟁자가 되지만, 선거가 끝나면 다양한 현안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대화하고 협의하는 파트너다. 이들은 "서로 싸운다는 것은 자주 만나지 않고 담을 쌓고 지낸 것의 결과물"이라면서 "자주 만나면 첨예하게 맞서던 이슈에서도 결국 합의점을 찾게 된다"라고 말한다. (78p)
우리는 국민의 합의를 도출해내기 위한 합리적 시스템으로 '민주주의'를 선택했고, 정치인들은 그 합의를 도출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그 역할을 인정해 시민들은 세금으로 급여를 주고 많은 권한을 위임한다. 정치인들은 일을 열심히 하는 척 텔레비전에 얼굴을 더 많이 비추기보다 더 많은 시민을 만나고 반대 정당을 만나 대화를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많은 갈등이 발생하겠지만 갈등은 스웨덴 시의원들의 말처럼 더 많은 대화를 통해 극복될 것이다.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우리 사회는 분명 변하고 있고 시민들은 성숙해지고 있다. 해결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은 오히려 성숙한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다.
일상의 사전적 정의는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이다. 얼마 전 국민들을 큰 혼란으로 빠뜨렸던 '비닐 분리배출 중단'과 같은 문제가 바로 일상 속에서 마주칠 수 있는 정치의 일환이다. 지난 1월 중국이 폐자원 수입을 금지하면서 이런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여전히 시민들은 각기 다른 해결책에 갈팡질팡 하고 있다.
권력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취미로 정치에 참여하는 스웨덴이었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을까?
스웨덴 초등학생들은 자신이 '정치에 참여하고 있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다. 대단한 사람이 되면 할 수 있는 정치가 아니라 일상의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모든 과정을 '정치'라고 배우는 아이들은 아주 일찍부터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청년의 때부터 정당 활동을 하며 정치에 참여하곤 한다. 어른들 또한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며 그들이 제기한 문제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스웨덴의 정치를 보며 정치가 일상 속에 스미는 것은 어떤 제도적인 장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화할 자세를 갖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을 읽는 내내 알메달렌 주간에 참여해보고 싶었다.
커피를 마시며 정치를 실현하는 건강한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어 졌다. 그리고 텔레비전이나 선거 유세장에서 만나는 정치인이 아니라 어떤 문제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시민들과 대화하고 반대편에 선 정치인들과 치열하게 토론하는 정치인을 만나고 싶어 졌다.
저자가 책을 마치며 에필로그에 적은 알메달렌의 세 가지 정의를 공유하며 글을 마치려고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알메달렌의 모습을 함께 상상하면 좋을 것 같은 바람에서다.
1. 알메달렌은 정치 학습장이다
일주일간 펼쳐지는 알메달렌에는 4,000여 개 이상의 세미나가 열린다. 웬만한 정책은 총망라되어 있다.
2. 알메달렌은 카페 정치다
알메달렌은 카페 정치다.(중략) 커피 한 잔을 놓고 듣는 정치 토론은 향내만큼이나 운치가 있다. (중략) 카페들은 정치인들의 이름과 토론 주제를 음료 메뉴와 함께 적은 메뉴판을 제공하기도 한다. 휴식의 공간인 카페도 중요한 정치 학습장이 되는 것이다.
3. 알메달렌은 특권을 내려놓은 사람들의 정치 향연이다
정치인을 위한 특별한 의전이 필요 없고, 행사 때마다 유명한 정치인들을 소개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촛불 집회를 하며 많은 것을 바꿨다. 우리 모두 일상에서 정치를 하는 시민이 된다면 더 많은 것이 바뀌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부풀어 올랐다. 톡! 언제 터져 바람이 빠질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일단 맥주 한잔 하며 선거 우편물을 찬찬히 살펴보아야겠다.
*이 책은 스리체어스에서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