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과는 다른 매력을 위해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간과한 건 아닐까
*이번 리뷰는 애니메이션 <인랑>을 보시지 않은 분들께는 다소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브런치 무비 패스로 감상한 영화입니다.
오시이 마모루 감독이 각본을 쓰고 오키우라 히로유키 감독이 연출한 애니메이션 <인랑>(2000)을 처음 본 건 2011년이었다. 김지운 감독이 애니메이션 <인랑>을 실사화해 영화로 만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음 세 가지가 가장 궁금했고 실망하고 싶지 않아 손톱만큼의 기대도 품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영화가 상영되고 시각적으로 만족이 되자 숨겨뒀던 기대감이 폭발해버렸다.
1. 애니메이션 속 세계관을 어떻게 한국에 적용해 이야기 전반을 끌어갈 것인지
2. 다소 비현실적인 캐릭터들을 어떻게 살려낼 것인지
3. 극 전반에 깔린 사이버펑크 분위기를 어떻게 실사화 할 것인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 <인랑>에 크게 기대한 것만큼 큰 실망을 하게 되었다. 엄밀히 말해 김지운 감독에 대한 기대감이 너무 컸던 것 같다. 다행히 가장 기대했던 3번은 시각적인 만족감을 선사했지만 1번과 2번은 생각했던 것보다 큰 아쉬움을 남겼다. 1번과 2번에서 생긴 큰 구멍은 강동원, 한효주, 정우성, 한예리 같은 호화 캐스팅도 막을 수 없었고 관객 입장에서는 다시없을 배우 조합이 빛을 보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까웠다.
누굴 원망해야 할지
모른다는 게 제일 억울해
극 중 '이윤희(한효주)'의 대사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위험에 처하고 타인마저 위험에 빠뜨려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동화 <빨간 모자>에 빗대 표현한 대사다. 엄마 심부름으로 할머니에게 가던 빨간 모자가 늑대의 꾐에 넘어가 꽃밭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고 그 사이 늑대는 빨간 모자의 할머니 집으로 가서 할머니를 잡아먹게 된다. 우리가 아는 <빨간 모자>의 엔딩은 사냥꾼의 도움으로 늑대의 배 속에서 할머니를 꺼내고 늑대의 배에 돌을 집어넣어 우물에 빠뜨리지만, 영화 <인랑>에서 이윤희는 할머니에 이어 소녀가 늑대의 먹이가 되는 새드엔딩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를 듣고 있는 임중경(강동원)에게 질문을 던진다. 소녀는 심부름을 보낸 엄마를 원망해야 할지, 할머니와 소녀를 잡아먹은 늑대를 원망해야 할지, 늑대를 굶주리게 만든 상황을 원망해야 할지.
영화 <인랑>엔 반정부 무장테러단체 '섹트', '섹트'를 진압하기 위해 설립된 대통력 직속의 경찰 조직 '특기대' 그리고 기존의 국가정보기관 '공안부'가 이렇게 세 개의 조직이 등장한다. '남북통일'을 위해 정부가 통일준비 5개년 계획을 발표하면서 이 세 조직의 갈등은 심화되는데 극의 초반부터 서로의 알력을 다투기 위한 명분 그 이상의 세계관은 설명되지 않는다. (설명하고 있지만 설득되지 않는다가 조금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먹고살기 위해 반정부 무장테러단체 '섹트'에 가입했다가 '공안부'에 엮여 '특기대' 소속의 임중경을 곤경에 빠뜨리는 역할인 이윤희의 "누굴 원망해야 할지 모른다는 게 제일 억울해"란 대사는 앞서 말한 것처럼 극 중 이윤희가 처했던 상황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도대체 왜 이런 알력 다툼 속에서 '인랑'이라는 무자비한 캐릭터가 만들어져야 하며, 그 무자비한 캐릭터가 어떤 부분에서 갈등을 겪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관객의 한 마디가 될 수도 있겠다. 도대체 이 영화를 보며 누굴 원망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 제일 아쉽달까.
어느 한쪽에라도 감정이입을 해보고 싶지만 관객은 영화 속 상황이 극적으로 치닫을수록 갈팡질팡하며 극에 몰입하기 어려워진다. 폭탄테러를 하며 자폭하는 섹트의 어린 소녀는 갈등의 시발점이 되기에 그렇다 쳐도 소녀의 사건을 통해 지난 트라우마를 떠올리고, 소녀의 언니를 통해 특기대 소속의 일원으로 어떤 개인적인 결정도 하지 못하고 임무에 투입되어 살생을 저지르는 임중경의 마음에 이입하기까지는 섹트와 공안부 그리고 특기대의 갈등이 한없이 성긴 느낌이다. 특히 이 세 조직을 오가며 임중경의 내적 갈등과 극의 긴장을 고조시켜야 하는 이윤희 역할은 한없이 연약하고 가벼워 독자들의 마음마저 가볍게 만든다.
이윤희는 섹트에서 훈련을 받고, 살기 위해 공안부의 임무에 협조하는 역할인데 임중경 앞에서는 자신의 몸 하나 지키지 못한다. 이윤희와 함께 훈련을 받았다는 섹트의 멤버 구미경(한예리)도 자신과 조직을 지키기 위해 격한 몸싸움을 벌이지만 장소가 바뀌기도 전에 특기대에 붙잡히고 이윤희가 그랬던 것처럼 개인의 안위를 위해 2억 여원의 돈과 새로운 신분증을 약속받고 특기대에 협조한다. 그녀들의 강렬했던 첫 등장이 무색해지는 설정이다. 나는 몰입할 수 없는 어설픈 세계관을 원망해야 할까. 일관성 없이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이는 매력 없는 캐릭터를 원망해야 할까. 이미 원작을 너무 재미있게 본 나 자신을 원망해야 할까.
늑대의 탈을 쓴 인간
VS 인간의 탈을 쓴 늑대
애니메이션 <인랑>과 영화 <인랑> 모두 동화 <빨간 모자>를 모티브로 한 작품으로 동화에 대한 감독의 해석이 작품의 중심축이 된다. 애니메이션 <인랑>은 영화 <인랑>보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동화 <빨간 모자>와 인랑 그리고 인랑의 내적 갈등을 심화시키는 폭탄 운반 담당 소녀 '빨간 모자'를 연결시킨다.
영화 <인랑>의 도입 또한 애니메이션 <인랑>의 매력적인 도입을 멋지게 실사화 한다. 특히 애니메이션에서 보았던 컴컴한 지하통로에서 대치한 인랑의 빨간 눈과 소녀의 빨간 코트를 기대한 것 이상으로 멋지게 실사화된다. 이 점은 정말 부정할 수 없는 김지운 감독의 능력이다. 물이 가득 고인 지하통로 속 발자국 소리와 인랑의 전투복 소리가 자아내는 공포감 또한 원작에 밀리지 않은 연출이었다.
하지만 영화 <인랑>은 애니메이션 <인랑>과는 다른 결말을 선택하며 극의 흐름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애니메이션 <인랑>은 조직의 명령에 따라 살생하는 '인랑'의 존재를 늑대의 탈을 쓴 인간이 아닌, 인간의 탈을 쓴 늑대로 설정한다. 인랑이 조직에 의해 인간성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결국 조직의 임무를 수행한다는 명분 뒤에 본성을 숨긴 늑대였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김지운 감독은 이윤희를 통해 조직의 명령에 의해 무자비한 살생마저 감행하던 임중경이 감정을 회복하면서 늑대의 탈 즉 인랑의 전투복을 벗고 인간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개인적으로 김지운 감독이 원작과 다른 해석을 한 것이 아쉽다기보다는 해석을 바꾸기 위해 만든 이윤희란 캐릭터가 너무 어설프고 억지스러웠다는 것이 무척 아쉬웠다.
폭탄을 안고 자폭한 빨간 코트의 소녀로 시작된 임중경의 내적 갈등이 그 소녀의 언니라고 말하며 접근한 이윤희와의 관계로 옮겨가면서 소녀가 자폭을 할 만큼 강력하게 자리 잡았던 극의 세계관은 무너지고 임중경이 이윤희에게 느끼는 알 수 없는 연민과 개연성 없는 로맨스가 힘없이 싹트게 된 느낌이다. 극이 진행될수록 액션은 스펙터클하고 상황도 뭔가 클라이맥스를 향해가는 듯 하지만 이 알 수 없는 로맨스의 등장이 특기대를 지휘하고 임중경을 인랑으로 만든 장진태(정우성)의 다그침과 명령조의 설득마저 우습게 만들고 임중경의 내적 갈등을 가볍게 만든다. 동물과 인간을 구분 짓는 '감정'을 통해 임중경의 최종 선택을 설득하기 위한 장치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정된 시간 안에 극의 진행을 돕기 위해 '연약함', '무결함' 등의 클리셰를 이윤희라는 캐릭터에 욱여넣다 보니 극의 긴장감과 캐릭터의 매력도가 떨어진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너무 큰 기대를 했기 때문일까. 영화 <인랑>에서 애니메이션 <인랑>의 매력과 완성도를 찾아보긴 어려웠다. 원작과는 다른 매력, 원작과 다른 신선함을 얻기 위해 김지운 감독이 놓친 것은 원작에서 충분히 고민하고 설계한 극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오랜만에 애니메이션 <인랑>이 다시 보고 싶어 졌다. 한동안 인간의 본성에 대해, 사회의 역할에 대해 힘겨운 고민을 이어가게 했던 어떤 메시지를 다시 떠올리고 싶어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