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기 위해 씁니다 - 2018 연말결산(1)
2018년도 다사다난했다. 연말이 되면 어느 해든 후회가 남기 마련이고 올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입사를 했고, 퇴사를 했다. 팔순잔치에도 초대하고 싶은 좋은 동료와 함께 서비스를 개선하는 작업은 즐거웠다. 둘이서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좌절했고, 피드백을 주고 받으며 조금씩 성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와 나를 두고 생각해보면 계속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불편했다. 옷을 수선할 수 없다면 스스로 체형을 바꿔야 하는데 그럴 자신이 없었다. 사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여느 때 같으면 크게 자책하면서 어떻게든 적응하려고 했을텐데, 어느 순간 그 관성 자체를 끊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5월부터 계속 퇴사를 생각했는데, 10월이 되서야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렇게 동료와 함께 회사를 나왔다.
상대가 나를 바꾸려 할 때
나도 바뀌려고 하는 것,
그것이 가장 무서운 일이다
- 스즈키 이치로
가까스로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올 한해 여러 권의 책을 읽으면서 지겹도록 떠올렸던 단어 '본질(essence)' 덕분이다. 본질은 충분조건이라기 보다 필수조건에 가깝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중세시대 사람들은 본질의 중요한 의미 중 하나를 "어떤 것을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이게 만드는 것(that by which it is rather than something else)"이라고 보았다. 다른 종과의 구별을 위한 원리가 아니라 어떤 종에 속하기 위해 반드시 지녀야 하는 모든 필연적 규정성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1] 다른 사람과 구별되기 위한 '나'가 아닌, 내가 '나'이기 위한 모든 필연적 요소들을 생각해보는 과정에서 좀 더 나다운 선택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본질에 충실하기란 어렵다.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것만큼이나 지난한 과정은 없기 때문이다. 학부 시절 드라마 작법 수업 때였다. 동화의 상징적 의미를 배우고 이를 작품 해석에 적용하는 것이 그날의 과제였다. 욕망으로 점철된 동화의 여러 상징물들 덕분에 까맣게 잊고 있던 나의 과거를 마주했다. 이를 글로 표현해 과제로 제출하는 과정은 무척 고통스러웠고 참지 못한 나는 교수님의 방문을 두드렸다. 두서없이 속에 있는 이야기를 꺼냈고, 혼자 서러움에 취해 펑펑 울어버린 못난 제자에게 교수님은 달콤한 커피를 타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글을 쓰는 건, 발가벗고 다른 사람들 앞에 서는 것과 같아. 그게 부끄럽다면, 너무 고통스럽다면 글을 쓰는 걸 그만둬야지. 작가는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용기를 내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사람이야.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상처를 어루만져 줄 수 없거든. 오직 자신만 상처를 들여다보고, 만져볼 수 있어."
그럴싸하게 글을 적는 것보다, 용기를 내서 조금 더 솔직한 '나'를 글에 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고 한동안 제출하기 챙피할만큼 못생긴 글을 많이도 써냈다. 교수님은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지난 시간 학생들이 쓴 글의 일부를 익명으로 읽어주셨는데, 내 솔직한 한 문장이 익명에 기대 읽힐 때마다 알 수 없는 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루는 동기들과 밥을 먹으면서 동기 중 한 명이 그 구절을 누가 썼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공감이 되서 눈물이 났다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답게 글을 적길 잘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대학원에 진학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본질'은 다시 잊혀졌다. 본질을 잊고 살면서 무슨 일을 하든 중간 이상을 해냈던 나의 장점은 곧 어떤 일이든 '면피'할 정도로만 해내는 단점으로 전락했다. 면피할 정도로만 일을 하기 위해선 본질을 외면하고 뭐든지 '보통'의 기준을 세워 획일화하면 된다. 본질을 무시해야만, 그럴싸한 보통의 기준에 부합할 수 있다.
최근 일 때문에 몇몇 사람들을 인터뷰 할 기회가 생겼다. 유명한 사람들도 아니고, 딱히 눈에 띄는 사람들도 아닌데 이야기를 나눠보니 매우 독특한 사람들이었다. 인터뷰 녹취를 풀면서도 내내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인터뷰 질문마다 '보통은 이렇지 않나요?'라고 습관처럼 묻는 내 목소리가 심하게 거슬리기 시작했다. 메모에 '차별화'라고 적어둔 걸 보면 의도한 질문이었던 것 같지만 '보통'이란 단어를 내뱉지 못해 안달난 사람처럼 보통의 기준에 집착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었다. 인터뷰 중 일부는 완전히 실패했다.
스스로에게 출처를 알 수 없는 '보통'의 기준을 강요해왔던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일단 질문이 사라졌다. 낯선 곳에 가면 물음표가 산처럼 쌓이기 마련인데, 그곳의 '평균' 혹은 '룰'이라고 믿고 물음표를 삼켰다. 물음표를 싫어하는 집단에 속해 있을 땐 의도적으로 물음표를 꺼내지 않고 서둘러 마침표를 찍었던 것 같다. 해소되지 않은 질문들이 쌓였고, 마치 쓰레기장에 쓰레기가 쌓이는 것이 당연하듯 바라보는 쓰레기장 관리자처럼 나뒹구는 물음표를 뒷짐지고 구경만 했다. 물음표가 제 기능을 하지못하자 느낌표 하나를 찍는 것이 가뭄에 콩나듯 어려운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을 제대로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 있는 법. 귀찮아서, 힘들어서 외면하던 나의 본질을 2018년엔 지겹도록 마주해야 했다. 물론 작정하고 '본질'을 외쳤던 건 아니다. 여러 권의 책을 읽고, 비교적 색깔이 뚜렷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서서히 고민이 시작됐다. 첫 번째 계기는 북저널리즘 시리즈 중 하나인 <Why, YC>란 책이었다. 실리콘밸리의 유명한 엑셀러레이터 와이콤비네이터 출신 스타트업 대표 6명을 인터뷰한 책이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일의 '본질'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보통봇이었던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답이 정해져있기보다 본질적인 질문이 오가는 곳에서 일하고 싶었다. 닥치는대로 적응하며 일을 하려고 했던 내가 '어떻게' 일하고 싶은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완벽한 답을 찾진 못했다.
체어메이트를 하면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지금 함께 일하는 팀원들을 5월(기억이 맞다면)부터 만나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알게 모르게 큰 자극이 되었다. 스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하는 사람들, 꾸준히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채워가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무언가 끝없이 했지만 결국 어떤 것도 내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는데, 누군가는 하나를 하더라도, 굳이 자신의 것을 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자신이 되는 사람들을 보면서 정말 많은 자극을 받았다. 무엇보다 그들이 내게 툭- 던지는 질문에 한 마디 답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매우 고통스러운 한편 '살아있음'을 느끼게 만들었다.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만큼 자극적인 사람도 있었지만, 곁에 둔 덕에 습관처럼 '네' 혹은 '아 정말요?'를 외치며 영혼없이 답하던 버릇을 조금은 고칠 수 있었다. 이전 회사에서 함께 일한 동료 덕분에 '나다움'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매우 큰 복이었다.
열심히 고민하고, 충분히 고통스러워하며 본질에 대해 생각해봤지만 만족할만한 답을 찾진 못했다. 내가 나이기 위해 필연적으로 있는 요소들을 고민하는 과정이 쉬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도둑놈 심보로 요행만을 바라는 것 같다. 그래도 약간의 성과가 있었다.
1. 나는 생각이 많고, 질문도 (매우) 많다.
2.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 또한 정말 즐겁고 덕분에 좋은 자극을 받았다.
(그동안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과만 어울리며, 또래친구와는 잘 맞지 않는다고 단정지었다)
3. 가장 꾸준히 해온 일은 '글쓰는 일'이며 이 일이 크게 부담스럽지 않다.
4. 자율과 책임이 강하게 주어지는 환경에서 더 많이 성장한다.
(책임감 때문에 성장할만큼 책임이라는 것에 민감하다)
5. 누가 시키는 일만 하는 것을 굉장히 힘들어 한다.
6. 사람들과 부대끼며 무언가를 완성하는 일이 즐겁다.
7. 오버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8. 생각보다 더 행동이 적극적인 사람이다.
9. 피드백 받는 것이 즐겁다.
(오랜기간 일방적인 지시환경에 노출되어 있었음을 다시금 깨달았다)
10. 이해는 느리지만 일단 이해가 되면 실행이 빠르다.
그냥 당연한 걸 나열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위에 적힌 열 가지 중에 여덟가지 정도는 내가 외면해왔던 내 모습이다. 퇴사와 동시에 전혀 다른 환경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일을 시작하면서 더욱 극명하게 깨달았고 비슷한 시기에 기존에 만나왔던 사람들과 전혀 다른 사람들을 자주 만나면서 새롭게 발견한 모습들이다. 모두 제 몫을 하고 있는 팀에 들어갔더니, 누가 무언갈 시키지 않아도 해야할 일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혹시 폐가 되면 어쩌지 싶은 마음에 따로 시간을 내어 스터디도 시작했다. 유일한 스트레스 요소는 내가 계획한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수시로 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긍정적인 에너지로 가득찬 사람들과 사부작사부작 이야기를 나누며 잘 극복해가고 있다.
솔직히 객관적인 상황과 제약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어쩌면 더 나쁜 상황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기대를 하거나 함부로 추측하는 일은 잠시 멈춰야겠다. 대신 본질을 고민하다 얼떨결에 스스로의 생김새를 인정하게 된 스물아홉의 청년을 조금 더 다독여주기로 했다. 서른을 앞두고 본질이란 단어를 내뱉기라도 해본 것을 자축하면서! 20대 내내 (비교적)깨끗했던 얼굴에 불꽃처럼 뾰루지가 번지긴 했지만, 그래! 20대의 끝에서 너마저 발악하는구나 싶어 지켜보기로 했다. 곧 잠잠해지겠지(는 무슨... 성인여드름 치료에 효과적인 방법 좀 가르쳐주세요).
앞으로 발견할 나의 본질이 궁금하다. 그리고 본질을 잃지않고 탄탄해져갈 내가 기대된다.(기대하지 않기로 한 사람 어디갔지?) 아무튼 2018년 올해의 내 단어는 고맙게도 '본질'이었다.
[1] 중세는 정말 암흑기였나, 살림지식총서,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