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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크노크 Jan 05. 2016

미운 오리 새끼

사회 초년생, 미운 오리 새끼가 되다

어른이 되고 난 후 '다르다'란 말은 종종 공포스럽게 다가온다. 어릴 적에는 평범하게 살다가는 것이 소원이라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난 늘 다르고 싶었다. 왜 아는 것을 모르는  척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걸 못한다고 해야 하며, 내가 싫은 것을 좋다고 말해야 하는지 혹은 내가 좋은 것을 티 내면 안 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닌 만큼 난 시간이 지날수록 '다르기'보다 '비슷한' 삶을 살게 되었다. 수다쟁이였던 나는 부모님의 꾸지람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을 꾸욱 참으며 벙어리 놀이를 해야 했고,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좋아도 싫은 척, 싫어도 좋은  척하며 분위기를 맞춰야 했다. 다르고 싶었던 나는 오히려 '다름'을 병적으로 거부하며 타인 맞춤형 인생을 살아왔다. 그리고 지난 7월 마침내 병이 나서 쓰러지고야 말았다.


대학 때부터 일을 해왔다. 다행스럽게도 일을 할 때만큼은 꽤 자유로웠다. 당시 난 킥오프 미팅이 그 일의 마지막 미팅일만큼 사람을 만나는 일보다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맞춰 혼자 씨름하는 일이 잦은 프리랜서였다. 회사에 다닐 때도 그랬다. 내가 대학원을 다닐 수 있도록 배려해주신 대표님 덕에 나는 동료들과 마주치는 시간보다 혼자 남아 작업하는 시간이 길었다. 내가 맡은 업무가 긴밀한 협업을 요구하지도, 고객 응대를 필요로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새벽까지 야근을 해도 아침 9시에는 반드시 출근을 해야 하는 지금의 직장으로 이직을 하게 되었다. 늘 '혼자' 팀이었던 난, 부서가, 팀이, 파트가 있는 진짜 '조직'에 속하게 되었다. 오래된 조직에서 오는 안정감이 좋았지만, 이를 지탱해온 견고한 관료제가 나를 숨 막히게 했다. 아니 숨 가쁘게 몰아쳤다. 나를 드러내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시스템에 완벽하게 나를 맞춰야 했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었지만 난 여전히 동화를 읽는다. 동화는 인간의 욕망을 오롯이 담고 있기에, 개인의 욕망이 사회구조를 만날 때 벌어지는 성장 과정을 잘 그려내기 때문에 읽을 때마다 새롭고, 해가 지날수록 다르게 읽힌다. 미운 오리 새끼를 다시 읽은 나는 꽤 오랜 시간 생각에 잠겼다. 어릴 적엔 그냥 '미운 오리 새끼가 불쌍하다. 생김새가 다르다고 저렇게 미워할 필요는 없지 않나?' 정도의 생각을 했는데, 이십 대 후반에 읽은 미운 오리 새끼는 한 생명체의 치열한 성장기였다. 그리고 이는 미운 오리 새끼의 저자 안데르센의 자전적 일기이기도 하다.


저자인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Hans ChristianAndersen)은 굉장히 못생겼었다고 한다. 연극을 하고 싶었지만 얼굴이 너무 못생겨서 늘 무대 뒤에서 일해야 했던 그런 사람이었다. 어쩌면 안데르센은 뛰어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는 늘 그의 생김새에 맞는 사회의 요구에 응해야 했다. 그가 속한 세상은 그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았다.


미운 오리 새끼의 원문을 읽어보면, 미운 오리 새끼는 수컷이다. 하지만 주변의 수컷들은 그에게 추근덕거린다. 뿐만 아니라 누가 보아도 오리가 아닌 미운 오리 새끼는 오리의 무리에서 자라며 '다르다'는 이유로 구박을 받는다. 어린 시절, '나쁘다'고 생각했던 주변의 오리들이 이제 자기만의 아집에 빠져 사리판단을 하지 못하는 '바보'처럼 느껴졌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에도 그런 사람이 참 많다. 자신이 보던 세계만을 고집하며, 그 세계의 기준에 타인을 맞추려는 사람들. '다름'을 인정할 수 없어 화를 내는 사람들 말이다.


미운 오리 새끼는 마지막 희망이었던 어미 오리에게마저 버림을 받자 그 사회를 떠난다. 무작정 떠난 길에서 마음씨 좋은 할머니를 만나 할머니 집에 머물게 되지만, 그 집의 고양이와 닭에게도 몹시 괴롭힘을 당한다. 어느 사회에서도 사랑받지 못하고, 자신으로 살아갈 수 없던 미운 오리 새끼는 크게 좌절한다. 미운 오리 새끼에게 너무도 혹독했던 겨울이 가고 봄이 오자, 미운 오리는 자신이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오리가 아니라  백조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미운 오리 새끼는 움츠렸던 지난 과거를 떨치고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을 향해 있는 힘껏 자신을 드러낸다.



경력 말고 직장에서 일한 지 겨우 9개월 차에 접어드는 난 미운 오리 새끼다. 다르게 태어났기 때문에, 다를 수밖에 없는. 숨기고 싶어도 강하게 드러나는 '나' 자신을 어찌할 수 없는 미운 오리 새끼다. 사실 내가 동화 속 미운 오리 새끼처럼  여기저기서 괴롭힘을 당하는 건 아니다. (감사하게도 직장 동료분들은 참 좋은 분들이다.)하지만 너무 다르기 때문에 겪어야 할 심리적인 압박감은 어쩔 수 없다.


미운 오리 새끼의 성장기를 살펴보면, 수동적이었던 미운 오리 새끼는 집을 나와 길을 떠나면서부터 능동적 태도를 갖춰간다. 사실 미운 오리에게 '다름'을 인정해주지 않는 집단에서 나오는 행위 그 자체가 '나'를 찾기 위한, '나'를 증명하기 위한 시작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내 말은 회사가 나를 몰라준다면 당장 뛰쳐나와 '나'를 찾아 나서라는 말이 절대 아니다. 다만 이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  '나'를 세상에 증명하기 위한 노력들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상처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왜, 어떻게 '다르고' 그 다름이 그들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낼 필요가 있다.


미운 오리 새끼는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이 날 수 있는 '백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환경이기 때문에 '나'를 발견하려는 노력을 할 수밖에 없고, '다름'을 지적받는 과정에서 나도 모르던 '나'를 알아갈 수 있다. 솔직히 난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조직의 시스템을 비난하며 지나치게 집단주의적인 사회를 한탄하느라  3개월가량의 시간을 낭비했다. 친구들에게, 선배들에게 전화를 걸어 한참을 징징거리기도 했다. 여전히 나의 업무 스타일과 성향이 견고한 시스템에 부딪혀 좌절하는 일이 많다. 하지만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나'와 내가 어느 정도 맞출 수 있는 것들을 분류해나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도 '나'의 업무 스타일을 어느 정도 이해하려고 하고, 해당 분야에 대해 내 의견을 존중하기 시작했음을 느끼게 되었다. (물론 아직 멀었다)



타인 맞춤형 인생에 지친 나는 다르고 싶다. '나'로 태어났으니, '나'로 살아가고 싶다. 올바른 방법으로 '나'를 증명해내면서 한편으로는 타인의 '다름'을 인정해주면서 성장하고 싶다. 혼자서  고군분투하던 지난 시간의 모퉁이를 돌아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야 하는 시간에 멈춰 섰다. 선택을 해야 한다. '나'를 알아주는 집단, 나에게 꼭 맞는 집단(은 아마 없을 것이다)으로 가거나, 있는 자리에서 '나'를 제대로 증명해나가는 것. 사회 초년생인 나는 불평만하고 징징거리기만 했던 지난 과거를 접고, '나'를 드러내고 '타인'을 인정하며 나만의 날개를 찾아 달아 내 꿈을 향해 비상하고 싶다.


2016년에는 모두 백조가 되어 비상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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