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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크노크 Dec 10. 2015

하기 힘든 말

가까워지긴 어려워도 멀어지는 건 참 쉽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꼽으라면 난 늘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린다. 많이 외로웠고, 불안했던 그 시간들은 다시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학교를 벗어난 지 십 년이 다 되어가는데, 생각하기만 해도 여전히 버거운 무게가 나의 마음을 짓누른다. 하루 종일 앉아 공부를 하는 것도 힘들었고, 획일화된 교육 체계,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는 것도 힘들었다.


나는 소위 전교 10위권 아이들만 모인다는 특목고를 졸업했다. 전교 1등을 안 해 본 아이들이 없었고, 누구 하나 멍청한 아이들이 없었다. 수업 시간에는 영어 원서에 나온 문법이 틀렸다고 지적했고, 15점 사이에서 1등과 60등이 모두 결정되었다. 모두가 똑똑하니 모두가 행복해야 할 테지만 입학하자마자 같이 입학한 친구 한 명이 세상을 등졌고, 고 3 땐 모두가 야자를 하던 시간에 다른 반 친구 한 명이 자살을 시도했었다. 다행스럽게 그 친구는 살아서 무사히 졸업했지만, 난 여전히 그날의 앰뷸런스 소리를 기억하고 있다. 야자 시간이 끝났지만 누구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던 그 불길한 분위기... 다음 날 학교 곳곳에 설치된 폴리스 라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애써 모른 척 우리의 일상을 살아냈었다.


수능을 목표로 달린 힘든 레이스가 끝나고 난 급격히 하락한 나의 수능 점수보다 더 충격적인 일을 겪게 되었다.


어차피 이제 우린 볼 일이 없으니깐,
어차피 이제 우린 만날 일이 없으니깐
이제 더 이상 아는  척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너와 이야기를 하는 게 싫어
이유는 없어
그냥 아는  척하지 말았으면 해


3년 동안 친하게 지낸 친구가 수능이 끝나고 나서 내게 한 말이다.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던 친구였다. 우리는 급식을 함께 먹었고, 같은 동아리 활동을 하며 어울려 다녔다. 소풍을 갈 때도, 수학여행을 갈 때도 늘 함께 했던 친구였다. 나와 이 친구를 포함한 여섯 명은 늘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시시콜콜한 일상을 공유하며 나름대로 즐거운 학창시절을 보냈었다. 학교를 중도에 그만두지 않고 힘든 시간을 견딜 수 있던 건 이 시기를 나 혼자 견디는 것이 아니라, 이 친구들과 함께 견디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난 영문도 모르고 3년 동안 가장 가까웠던 친구 중 한 명과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함께 어울리던 친구들에게 이유를 물었지만, 친구들도 '모른다'는 대답뿐이었다. 짐작되는 일도 없었고 그저 '이 친구가 날 참 싫어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며 매일 같은 교실에서 마주치던 그 친구를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3년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 하며 견고하게 쌓은 우정이라고 생각했는데, 3일도 되지 않아서 모르는 사람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그때 처음 깨달았다.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는 건 어렵지만, 멀어지는 건 한 순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물론 친구의 예측과 다르게 난 그 친구를 대학에 가서도, 대학원에 가서도 마주쳤다.


종로의 한 카페에서도 우연히 마주쳤고,  또다시 같은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캠퍼스 곳곳에서 얼굴을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마주칠 때마다 친구는 민망해했고, 당시에 나에게 심한 말을 했던 것을 사과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 왜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는 끝내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난 그 친구 마음의 문제였을 뿐이라고 생각하며 넘기는 수밖에 없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느낀 건,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일보다 멀어지는 일이 더 쉬울 수 있다는 사실이다. 보통 누군가와 친해지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 시간과 노력에 비해 친해지는 일은 어렵고, 마음의 벽을 허무는 것은 더욱 난해한 일이다. 각종  이해관계가 중첩되면서 서로의 마음을 터놓는 순수한 관계는 더욱 지속되기  어려워진다. 고등학교 때 나에게 이별을 고한 친구는 이제 '연락하지 말자'라는 메시지라고 보냈지만, 직장생활에서 만나는 상당수의 사람들은 '이별'을 고하지도 않고 그냥 자연스럽게 멀어진다.


이전 직장에서 친하게 지냈던 선배가 있었다. 같은 부서, 같은 파트여서 출장도 함께 가고, 회의도 자주 하면서 친해지게 됐다. 선후배 관계라고는 하지만 우리는 나이 차이가 많았고, 경력을 쌓아온 분야도 달라서 가까워지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속마음을 털어놓기까지 꽤 많은 술병을 비워내야 했다. 사실 우리 파트에게 배정된 일이 어렵지 않아서 경력이 많지 않았던 나도 쉽게  핸들링할 수 있었고, 선배도 그걸 알았는지 모든 일을 나에게 맡겼다. 일을 다 하면 선배에게 보고를 했고, 선배는 제대로 보지도 않고 컨펌을 해주었다. 난 당시 선배가 날 신뢰하기 때문에 이런 행동을 보인다고 생각했고 그런 상황이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일이 끝나고 나면 늘 술을 마시러 가거나 재미있는 공연을 보러 갔었다. 선배와 난 열 살이 넘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말을 편하게 할 정도로 친해졌다. 누구 하나 억지로 끼워 맞춘 관계도 아니었고, 자연스럽게 공유된 시간 때문에 유지된 관계였다. 하지만 우리 파트의 업무가 가중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새로운 파트원이 들어왔고, 나를 편하게 생각한 선배는 여전히 모든 일을 나에게만 맡기고 모른 척했다. 자연스럽게 나와 새로운 파트원이 주도적으로 일을 끌고 갔고, 아무 의견도 없는 선배는 프로젝트에서 도퇴되어 갔다. 선배는 나와 '친하기 때문에' 이 일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나에게 진행사항을 묻거나, 공식적인 자리에서의 임기응변을 준비할 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와 새로운 파트원은 선배 때문에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았고, 우리는 점점 선배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실 새로운 파트원과 선배 그리고 나는 굉장히 친한 사이였다. 함께 모든 이야기를 공유하고 회사 생활에 있어 비밀이 없을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다. 선배의 무책임한 행동은 우리가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더욱 거슬리고, 스트레스를 받는 사안이 되었다.


친한  사이일수록 서로 이해와 배려가 필요하다. 물론 기본적인 신뢰관계도 유지되어야 한다. 가까워지는 것이 어려웠던 만큼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나와 새로운 파트원은 결국 선배에게 우리가 겪는 마음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선배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아주 차분히 그리고 정중하게 이야기를 했다. 선배는 우리 이야기를 듣는 듯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멀어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너무 쉽게 사이가 벌어졌다. 업무 이야기가 아니면 절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매일 일과를 시시콜콜 이야기하던 사이가 며칠 만에 데면데면한 사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하기 힘든 말'이 있다. 어느 정도 거리가 있을 땐 별로 어색하지 않을 이야기들이 친한 사이에선 한없이 어색하고 차갑게 느껴져 자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일수록 우린 하기 힘든 말을 입 밖으로 꺼내야 한다. 합리적인 이야기이고,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기 위한 이야기라면  더욱더 적극적으로 대화할 필요가 있다. 고등학교 때 나에게 절교를 선언한 친구 또한 내게 하기 힘든 말을 끝내 하지 못하고 날 그냥 자신의 삶에서 밀어냈던 것이 아닐까? 카페에서 우연히 마주친 친구를 보며 난 아주 많은 생각을 했었다. 몇 년 전엔 친구가 미웠고, 짜증 났고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제 와 생각해보니 우리가 친했기 때문에 이 친구가 내게 이야기하기 힘든 말들을 속으로 담아두기만 했던 건 아니었는지, 친구의 말에 난 귀 기울였던 적이 있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다.


멀어져버리는 건 정말 한 순간이다.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한 시간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멀어지는 건 한 순간이다. 이런 순간은 허무하고 슬프다. 나중에는 이 마저 익숙해져서 나 아닌 그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게 만든다. 설령 멀어짐의 이유가 내게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허탈함을 극복하기 위해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미루어왔던 '하기 힘든 말'을 하자. 가까운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조금은 어려울지도 모르는 이 시간들이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 가까워진 당신의 사람들과 더 가까운 사이를 유지시키는 과정이 되어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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