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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크노크 May 06. 2016

중년이라는 배역

오정희 우화소설 <돼지꿈>을 읽고

남들이 쌍지팡이 들고 말리는 사람과 평생을 약속한 건 '사랑' 때문이라고 했다. 남들이 말린 이유를 뼈저리게 실감하면서도 살을 비비고 몇 년을 산 건 '정' 때문이라고 했다. 남 입에 오르내리기도 지겨운 그와 벌써 몇십 년을 산 건 그것이 그저 '삶'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각기 다른 언어로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말했지만 메시지는 같았다. 삶은 얼마나 하찮은가. 모든 것이 시들해져 가는 과정을 우리는 삶이라고들 부른다. 몇 번이고 삶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그리 무모하게 시들어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차 시들어가는 한 번의 삶이 가치 있음은 그것이 다시 오지 않을 우연과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의 집합이기 때문일 것이다. 스물 하나의 나이에 중년 여성의 피로를 감히 소설로 담아낸 내게 소설가 교수님은 여성의 삶이 변했고, 소설은 이를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코멘트했었다. 고상한 이 코멘트를 교수님 의도대로 쉽게 풀자면 내가 그려낸 소설 속 인물은 이제 현실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구닥다리 캐릭터라는 것이었다. 당시 난 신파로 물들고 닳고 단 나의 상상력에 좌절하고 말았다.

하지만 소위 말해 진취적 여성의 삶을 살아가는 내가 이십 대 후반이 되어서도 중년 여성의 피로감에, 중년의 무심함에 공감하는 것은 아마도 여전히 내가 가장 잘 아는 중년, 나의 부모가 그런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행복하다' 말하면서도 우울의 나락을 매일 같이 드나드는 갱년기 여성과 '죽겠다' 말하면서도 소소하게 낚시며, 등산이며 자신만의 평화를 찾아가는 갱년기 남성을 보면서  나는 생각한다. 이 보편적이고 구닥다리인 캐릭터들이 만들어내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가 종종 상상하지 못할 만큼 우리 마음을 저릿하게 만드는 엄청난 무언가가 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오정희의 문장력은 언제나 놀랍다. 분명 간결하고 쉽지만 굉장히 힘이 세다. 한 문장 안에 슬픔이, 사랑이 응축된다. 이를 곱게 풀어내는 것은 문장에 때려 맞고 엉겁결에 열린 내 마음의 문 안의 여러 감정들 이리라. 오정희의 소설 <돼지꿈>은 죄다 중년의 삶을 그린다. 무디고 무딘, 산전수전 다 겪고 놀랄 것도 없는 그들의 삶에 찾아든 작은 빈틈을 파고들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시작된 줄도, 끝인 줄도 모르고 독자들은 벌써 여러 명의 삶을 드나들게 된다. 오정희의 우화소설 <돼지꿈>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중년이라는 배역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 과연 어떤 존재일까. 잠시 그녀가 풀어낸 인생의 굽이를 펼쳐본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아서 자로 잰 듯한 삶의 문장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중년이라는 배역에 이다지도 넓은 스펙트럼이 이렇게도 묵직하게 존재했음을 왜 예전에는 미처 몰랐을까. 


'사는 것이 계단 오르기와 같았다. 계단을 오를 때 한 발을 올려놓으면 다른 한 발은 자동적으로 바로 위 계단을 향한 허공에 떠 있게 마련이고 그 허공에서 잠시 한 눈을 팔거나 보폭이 불안하면 영락없이 헛디딤, 추락의 위험이 있는 것이다.' - <돼지꿈>, 떠 있는 방 중에서-

'말끝마다 남자를 아느냐고, 남자들이 살아야 하는 세계의 치열함과 외로움을 아느냐고 비장한 폼을 잡는 당신은, 그렇다면 여자를 아는가. 여자들이 살아야 하는 세계의 답답함과 폐쇄성, 그리고 숨은 불씨처럼 때때로 참을 수 없는 자기 모멸감과 은밀한 탈출의 꿈틀거림을. 바람 센 날이면 젖은 머리 말리는 척 창문을 활짝 연 베란다에 서서 긴 머리칼을 하염없이 날리며 밖을 내다보는 것, 낙엽 쌓이는 가을 길, 눈 내리는 겨울바다를 보고 싶어 하는 것 따위를 당신은 유치한 소녀적 감상이라 비웃지만 그것은 이미 어찌해볼 수 없는 삶의 절망감, 생활에 대한 회의의 조용한 표현인지를 모를 것이다.' - <돼지꿈>, 맞불 지르기 중에서 -


하필 어버이날을 맞이해 어설픈 효녀 코스프레를 하러 집에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꺼내든 책이 위에서 소개한 문장들이 수록된 <돼지꿈>이었다. 단편 소설이 묶인 이 책의 모든 이야기를 소개하긴 어렵고 제목과 동일한 <돼지꿈>을 잠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청량리행 경춘선에서 아이와 자신을 버리고 간 남편의 부모를 찾아 춘천을 사흘 내리 헤매었지만 결국 허탕을 쳤다는 젊은 여자를 소설 속 '나'는 잠시나마 안타깝게 여긴다. 인정이 없고 사람이 박해 남편 먼저 보내고 자식 한 번 가진 적이 없다고 손가락질받던 '나'는 돈 삼백을 들고 튄 친척을 잡으러 가는 길이었다. 아이를 맡기고 한 시간이 되도록 오지 않는 젊은 여자를 기다리다 종점인 청량리에 도착한 '나'는 애엄마를 기다리다가 역무원에게 쫓겨 기차에서 내리면서 지난밤 꾼 돼지꿈을 떠올린다. 소설의 끝이 '나'가 아이를 데려다 길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알 수 없는 결말보다도 소설 중간중간 읽힌 '날 것 그대로의 인간'이 마음에 남는다. 부모라는 이름으로,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천륜으로 엮이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각기 어떤 삶들을 풀어내고 있을까. 이 진부한 관계들 없이 신박한 개인사가 탄생할 순 있을까.



소설책을 다 읽어갈 무렵 엄마에게 카톡이 온다. 엄마는 아빠가 기차역으로 날 데리러 온다는 걸 통보(?)한다. 언제부터인가 허리가 아프다는 아빠가 굳이 기차역으로 마중 나오신다는 걸 말리지 않는다. 자가용으로는 7분, 버스를 타도 15분이면 가는 집이지만 그래도 아빠의 차를 얻어 타는 그 시간이 매번 새롭다. '빵을 사와도 좋고'라고 말하며, 세세한 빵 이름까지 말하는 엄마의 전화에 다른 건 뭐 더 필요한 거 없고?를 묻기까지는 별로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정희의 소설을 읽으며 자꾸 내 부모님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것은, 어찌 보면 지질한 소설 속 사연들을 질척한 눈물보다는 마음의 온기로 받아 들 일 수 있는 것은 그저 '나'라는 독자에게만 해당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용돈과 선물을 기대하던 어린이가 어느 새 자라 부모에게 드릴 선물과 용돈을 챙길 나이가 되면 조금씩은 공감할 법한 이야기임은 분명하다. 소설 속 주인공들과 동년배의 중년이라면 말할 것도 없겠지.

다시 4년 전 그 소설을 봐주던 소설가 교수님께 가서 이야기하고 싶다.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진부한 그 캐릭터들로 인해 마음의 온기를 얻는 사람이 있노라고. 그리고 그들과의 관계를 통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오늘의 내가 있노라고, 중년이라는 배역을 신파와 신박함 두 갈래로 나누기에는 그들이 살아온 인생의 갈래가 너무도 많고, 쌓아온 인생의 굽이가 너무도 깊어 그 진부함 마저도 미처 다 경험할 수 없었노라고 말이다. 아직은 먼 얘기 같지만 나 또한 중년이라는 배역을 향해 간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중년이라는 배역은 새로운 느낌을 준다. 당연한 듯 당연할 수 없는 미묘한 시간에 정의 내리기를 포기한다. 


역 광장에 차를 대고 기다린다는 아빠의 전화를 벌써 두 번이나 받았다. 얼른 역에 있는 빵집에 들러 엄마가 좋아하시는 치아바타와 치즈 브리오슈를 사서 아빠에게 달려가야겠다. 나의 마음은 싱숭생숭한 봄을 지나 뜨거운 여름을 향해 간다. 간지럽던 봄철의 '내 마음'이 아니라, 중년의 겨울을 이제 막 빠져나온 부모님의 마음에 부대끼며 땀나는 여름이 왔음을 느끼고 와야겠다. 책을 덮는다. 기차는 플랫폼에서 정차한다. 저 계단을 오르면 아빠가 허리 흔들기 운동을 하며 두 달만에 집에 온 둘째 딸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뛰어오는 딸에게 '천천히 뛰지 말고'를 거듭 말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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