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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크노크 Jul 15. 2016

망설임의 순간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듯 망설임의 순간에도 이유가 있다

꽤 여러 날 글을 쓰지 못했다. 마음도 복잡했고 더운 날씨에 글을 쓰며 마음까지 덥히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이 바뀌고, 마음의 온도가 오르내렸다. 여느 때처럼 타인의 핑계를 대며 어물쩍 넘겨보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무언가를 규정짓는 것이 아니라 계속 망설이는 순간. 바로 그 시간이 내게 찾아온 것이다. 망설임의 순간에는 이유가 있다. 이유는 어쩌면 그 상황 자체에 있는지도 모른다.  


첫 번째 순간 

미세먼지가 가득한 날, 동네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이십 대 중반으로 추정되는 남녀가 함께 뛰어온다. 두 사람 연인 일까? 잠시 물음표가 남는다. 여자가 숨을 헐떡이며 정류장에 진입하는 153번에 올라탄다. "잘 가" 정류장에 남겨진 남자에게 나름 애틋한 인사를 건넨다. 여자가 돌아서기도 전에 남자는 뒤를 돌아왔던 길을 되돌아 간다. 다정하게 뛰어오는 모습이 영락없는 연인 같았는데, 여자의 애틋한 인사와 달리 남자의 발걸음이 무심해 외사랑이구나 싶었다. 한 장면으로 단정 지을 순 없지만, 만일 내가 저 여자라면 슬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가는 뒷모습을 보며 아쉬워할 5초의 시간이 내 연인에게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휙 돌린 남자가 저만치 멀어지는 동안에도 내 버스는 오지 않는다. 덥다. 여름이 왔나 보다.


두 번째 순간 

'꼼짝도 않는다고, 그의 맘이 1도 움직이지 않는다고' 내내 우울해하는 너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그의 맘을 부여잡고 몇 달을 끙끙 앓는다고 그의 맘이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네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노력할 만큼 노력했다면 바꿀 수 없는 그의 맘이 아니라, 바꿀 수 있는 너의 맘을 바꾸는 것이 더 현명한 일임을 이제는 너도 깨닫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이름 앞에서 효율을 따지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 싶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는 것 또한 별 의미가 없다. 이제 나는 네가 그만 그를 잊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툭 건드려서 움직일 마음이었으면, 어떤 장치를 하든 작은 일에도 툭 나가떨어질 테니까. 해가 길어져 아직도 밝은 퇴근길에 회사 건물 코너에서 전화를 붙잡고 우는 여자를 발견한다. 그를 잊지 못한다는 그녀의 이야기를 가만히 서서 듣는다. 머리 속으로 천 번은 더 정리했지만 결코 정리할 수 없는 그와의 관계를 머리 속으로 그려 본다. 수화기 너머의 그는 아무 대답이 없다. 그래서 내가 대신 '괜찮다고, 애초에 널 향한 그의 맘이 너의 것이 아니듯, 돌아선 그 맘 또한 그의 것이니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나지막이 말해 본다.


세 번째 순간 

계속 걸었다. 우연이라도 마주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계속 걸었다. 우연이라도 마주치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몇 날 며칠을 헤매다 집으로 돌아왔다. 모든 것이 끝이라고, 이제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널 생각할 땐, 그렇게 보이지 않던 네가 스르륵 감아버린 두 눈에 가득 나타났다. 내가 서성인 시간보다 더 오래 너는 내 마음속을 서성거렸다. 손을 내밀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 네가 있다. 손이 닿으면 사라질 것 같은 모양으로 네가 서 있다. 아마도 내가 꿈을 꾸는가 보다.(2011.11)


네 번째 순간 

그저 그런 맘이라면 주지 말아야 하고, 그저 그런 맘이라고 여겨진다면 받지도 말아야 한다. 남녀 관계로 이해하면 가장 쉽겠지만, 실상 따지고 보면 사람과 사람 관계가 다 그렇다. 그저 그런 맘이었는데, 너무 소중하게 여겨주었던 사람들을 난 모두 기억한다. 미안했던 만큼 더욱 사랑한다. 우연히 다시 만난 네가 참 반갑다. 여전히 밝은 네가 참 고맙다. 그저 그런 맘이라도 좋아해주었던 네가 그립다. 


다섯 번째 순간 

사랑하는 마음에도 공식이 있다면 아마 곱셈일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크면 그 곱절만큼 마음이 간다. 반면 그 마음이 0일 땐 그 어떤 큰 마음이 와도 결괏값은 0일뿐이다. 매우 불공평한 것 같지만 우리가 수학 공식을 바꿀 수 없듯이 사랑의 공식도 바꾸기가 어렵다. 지속적으로 0의 결괏값을 가지는 사랑은 힘이 없다. 조금 슬프지만 진실이다. 벌써 몇 달째 그녀에게 연락하는 너와 오늘은 곱셈 놀이를 해야겠다. 시큰둥 미지근한 대답 하나에도 기뻐하는 네가 나는 마음 아프다. 단답형의 문자에 오만가지 의미를 부여하던 스무 살의 내가 떠올라, 언제 다시 그 일을 반복하게 될지 모를 내가 걱정되어 어떻게든 곱셈 놀이를 해야겠다.



아빠가 말했다. 망설임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그냥 넘길 수 없다면 그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면 된다고.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조각조각 적어둔 일기를 보며 아빠의 말을 어렴풋 이해하게 된다. 사소한 인사말이 굳게 닫혔던 맘을 열게 하기도 하고, 아주 작은 실수가 활짝 열렸던 마음을 굳게 닫아버리기도 한다. 망설임에는 이유가 있다. 가만히 그 상황을 들여다보면 망설였던 순간의 내가 진짜 원하던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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