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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크노크 Jan 26. 2017

너라는 문장

거칠게 튀어나온 단어 하나에 난 마음을 내주었다

너라는 문장이 내 마음을 붙잡았다.


정제된 문장이 아니었고 그리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거칠게 튀어나온 단어 하나에 마음 한 줄기가 단단히 걸려버렸다.

이렇게라도


너를 처음 만난 곳은 비엔나의 한 호스텔이었다. 처음으로 혼자 떠난 유럽여행의 마지막 여행지. 그곳에서 나는 너를 만났다. 세계 젊은이들이 많이 모여든다는 호스텔에 예약을 하면서도 새로운 만남에 대한 큰 기대를 하진 않았다. 그저 나의 세계가 그리 넓지 않았고, 세상에는 다양한 삶이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확인받고 싶었을 뿐. 체크인을 할 때 혼성 도미토리를 예약했지만 카운터 직원은 내가 동양인임을 확인하고 여성 도미토리로 방을 바꾸겠냐고 물었다. 마침 도미토리에 자리가 생겼다고 했다. 예약 당시 여성 도미토리가 없어 혼성 도미토리를 신청한 거라 선뜻 그러겠다고 했다. 그렇게 바꾼 방에서 나는 너를 만났다.


"Isn't it hot?" 이라며 손부채질을 하며 네가 들어왔다. 강한 호주식 억양을 듣고 나는 네가 국적을 말하기도 전에 네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었다. 너는 굉장히 활달한 편이라 방에 있는 모두에게 서슴없이 말을 걸었다. 너는 호주에서 왔고 47일째 유럽을 여행 중이며 이틀간 비엔나에서 머문 뒤 독일로 넘어가 친구를 만난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네가 그냥 말이 많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좋아하는 사람 정도로 생각했다. 너는 하필 나에게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난 이미 저녁을 먹었지만 할 일이 없어 그렇게 하자고 했고, 채식주의자인 너는 나를 옆에 앉히고 깐깐히 메뉴를 골랐다.


일본에 간 적이 있는데 한국에도 너무 가고 싶다며 '두부'요리를 골랐다. 무슨 맥락인지 몰랐지만 별 생각이 없었던 나는 그러려니 너의 이야기를 들었다. 일본에 갔던 경험이 좋았는지 거기서 만난 일본인들이 좋았는지 너는 계속 그 이야기를 했고, 내가 처음으로 만난 한국인이라며 신기해했다. 한국 음식 사진을 보여주었더니 떡볶이에 큰 관심을 가졌다. 이런저런 잡다한 이야기를 하던 중 너는 아주 갑자기 내 나이를 물었다. 당황한 내 표정을 보고 나이를 맞춰보겠다고 했다. 스물둘 정도 돼 보인다고 말하는 네 덕에 난 기분이 좋아져서 원래 내 나이를 알려주었다. 놀란 표정을 짓더니 너는 나에게 너의 나이도 맞춰보라고 했다.


내 나이를 말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네가 나를 한 6살 정도 아래로 봐주었으니 나도 6살 정도 낮춰 스물넷?이라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너는 마구 웃으며 "내가 좀 나이 들어 보이지? 나 열아홉이야."라고 말했다. 민망한 마음에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때부터였다. 너라는 문장에 내 마음이 가기 시작한 것이. 들뜬 목소리로 다가오는 새해에는 대학생이 되어 의학을 전공한다는 너의 말에 나는 축하와 응원의 말을 해주었다. 너는 고심하며 고른 칵테일을 한 모금 들이키며 내게 말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이 너무 힘들 것 같아서...
낙태한 뒤에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어.

얼굴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목소리 톤은 낮아졌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너는 아무렇지 않게 맛있는 음식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해버렸다. 다시 쾌활한 목소리로 돌아간 너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접시를 깨끗하게 비웠다. 호스텔로 돌아오는 내내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아무렇지 않게 많은 걸 이야기하는 네 덕분에 나도 여행 내내 입밖에 내지 않았던 나의 고민들을 몇 개 꺼내놓을 수 있었다. 그 날, 너라는 문장은 거칠었고 맥락이 없었지만 내 마음을 잡아끌었다. 웃음 뒤에 숨은 너의 아픔이 느껴졌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힘들 것 같아 새로운 도전을 하는 너를 나는 아마도 계속 응원할 것 같다.  


가끔 내 마음을 잡아끄는 문장들이 있다. 훌륭하기 때문이 아니라, 부족하기 때문에 내 마음에 계속 내려앉는 문장들이 있다. 거칠게 튀어나온 단어 하나에 마음을 열게 하는 문장들이 있다. 정제된 문장들 속에 거친 문장들이 종종 끼어들 수밖에 없는 건 아마 우리 삶이 늘 평탄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 않을까. 여행의 끝에 널 만났던 건 아마도 피하고 싶은 내 내면의 문제들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는 기회가 아니었을까. 너는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체크아웃을 해버렸다. 혹시 내가 실수를 했나 싶어 마음이 어쩐지 무거웠는데 내가 체크아웃을 하는 날 데스크에서 너의 쪽지를 전달받았다. 너무 좋은 시간을 보냈지만, 너무 더워서 숙소를 옮긴다고. 처음과 끝이 같은 너라서 나는 피식 웃음이 났다.


여행에서 돌아왔지만 문득 난 네 생각이 났고 너라는 문장을 기억하기 위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아직 여행 중에 있을 네가 더 많은 위로의 시간을 보내길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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