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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크노크 Feb 08. 2017

사랑을 시작하지 못하는 이유

그, 그녀 그리고 나

분명 고백의 순간이었다. 지금 바로 고백하면 별다른 고민 없이 그가 내민 손을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원래 남녀 관계에선 분위기가 중요한 거니깐. 이쯤 되면 서로 알만큼 알았고, 설령 모른다고 하더라도 알아갈 만큼의 호감이나 신뢰는 쌓인 것 같았으니깐. 한 잔 술에 기분도 적당히 좋았고, 마침 떠들썩하던 바의 분위기도 한층 가라앉았다. 분위기 때문인지, 내 귀에는 그의 목소리만 들리는 것도 같았다. 순간 먼저 고백하고 싶은 충동도 들었다. 하지만 이게 웬 걸. 촉촉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그가 꺼낸 첫마디는 ‘구여친’이었다.


지루하다 못해 지겹다. 만나는 남자들마다 조금 친해졌다 싶으면 어김없이 구여친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구여친에게 상처받았던 일을 이야기하며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닌 것 같아서 참 좋다고 말하거나, 구여친 참 좋은 사람이었는데, 자기가 부족해서 그랬다며 앞으로 만나는 사람에게는 그러고 싶지 않다고 다짐 아닌 다짐을 한다. 솔직히 그가 어떤 사람과 만났고, 어떤 연애를 했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궁금하다. 하지만 시작의 순간에 굳이 그 이야기를 듣고 싶지는 않다. 어쩐지 구여친을 기준으로 그의 삶에 내가 놓이게 되는 것 같아 불쾌하고 찝찝하다. 아무것도 모르던 스물둘엔 구여친을 팔아 달콤한 미래를 약속하는 그에게서 알 수 없는 매력을 느끼기도 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구여친을 팔아 혹은 구남친을 팔아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역시나 구여친을 들먹인 그에 대한 애정이 조금씩 식어간다. 도대체 어쩌라고.


가장 듣기 싫은 건 구여친에 대한 칭찬이요, 가장 듣기 껄끄러운 건 구여친에 대한 험담이다. 듣기 싫고 껄끄러운 구여친에 이야기는 백해무익이다. 그렇게 괜찮은 여자랑 왜 헤어진 거야?라는 질문부터 나랑도 헤어지면 저렇게 두고두고 새로운 사랑을 위한 총알로 쓰이진 않을까 하는 걱정까지 다양한 종류의 부정적인 감정을 양산시키기 때문이다. 백 번 양보해 구여친에 대해 듣기 괜찮은 말이 있다면, 그저 ‘잊었노라’ 이 한 마디가 아닐까 싶다. 상대방이 구여친에 대해 무슨 말이든 해오면, 나도 꼭 구남친에 대해 이야기 해주곤 한다. 사실 별로 기억나는 것이 없어해줄 말은 없지만 레퍼토리 하나 정해서 적당하게 구남친의 지분이 나에게도 있음을 확인시키곤 한다. 굳이 귀찮게 상대의 구여친에 구남친을 맞받아쳤지만 패배감이 드는 건 사실이다. 구남친과 구여친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자연스럽게 상대방에 대한 호감이 급격하게 줄어든다.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될 것 같은 기분은, 굳이 그가 아니어도 될 것 같다는 확신으로 이어진다.


글로 쓰다 보니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른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나만 이런가 싶어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도 물어보았다. 모든 남자들이 다 그런 건지 내가 만나는 남자들만 그러는 건지 알고 싶었다. 친구는 깊이 공감하며 자기가 만난 남자들도 모두 그런 레퍼토리를 꺼내 들었다고 한다. 친구도 나처럼 처음엔 그는 진솔한 사람이구나 싶어 호감을 가졌다가, 횟수가 거듭될수록 들어주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가 말해준 그녀와의 추억이 그를 만나는 내내 큰 장벽이 되었다고 했다. 지금 이 장소에서 그녀와도 좋은 시간을 보냈겠거니 싶어 씁쓸했고, 저 습관이 그녀로 인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매력적이기만 했던 그의 습관이 싫어졌다고 했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들과의 과거로 인해 지금의 그가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굳이 그의 입으로 그것들을 확인하고 싶진 않은 나의 바람은 과연 과한 것일까. 솔직하게 그에게 듣기 싫다고 말한다면 나를 향한 그의 맘은 수그러들게 될까. 때 아닌 물음표가 머릿속을 휘젓는다. 이제 막 좋아지기 시작했는데, 그래서 조금 더 알아가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대방은 여전히 과거를 떨치지 못한다. 그의 눈을 바로 보며 그런 이야기는 넣어두라고 말하고 싶다. 지금 우리의 시간에 더 집중하자고 말하고 싶다. 차라리 지금 당신이 느끼는 나에 대해 더 이야기해달라고 말하고 싶다. 용기가 없는 나는 이도 저도 아닌 리액션을 하며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올까 잔뜩 긴장한 채로 그의 이야기가 끝나길 기다린다. 그리고 무슨 답을 해줘야 할지 한참을 고민한다.


“그랬구나...” 이 한 마디밖에 하지 못할 걸 알지만, 그래도 일단 고민은 해본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이야기를 난 “그랬구나...”하며 듣는다. 내 연애의 패턴이 변하지 않는 건 이 “그랬구나...” 때문인 것 같아 때아닌 좌절감을 느낀다. 그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머리가 아릴만큼 춥다. 나는 내내 그의 과거란 빙판길 위에서 중심을 못 잡고 휘청거린다.



내 글을 읽고 그의 그녀 때문에 힘들어 하는 네가 복잡한 마음을 조금은 정리할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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