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청바지가 물린다.
출근할 때도, 놀 때도, 여행 갈 때도, 아주 더운 날을 빼곤 항상 입던 청바지가 물린다.
갑자기?
갑자기는 아닌 것 같고... 이제 트렌드가 바뀌려나.
1.
청바지는 입으면 입을수록 참 뻔하단 생각을 하게 된다. 리바이스나 리나 랭글러나. 흔히 근본이라고 부르는 브랜드의 청바지는 차이가 있긴 한 것 같다만...
그 차이가 착용감만큼 크진 않은 것 같다. 나 역시 많은 브랜드의 청바지를 경험해보진 않았지만, 대강 12종류 정도는 입어본 것 같은데 사실 뭐... 청바지는 청바지고.
근래 와이드 붐이 불면서 새로웠던 와이드핏 청바지도 입다 보니 그리 와닿지 않는다. 편안한 착용감. 아주 간단하게 꾸밀 수 있는 힙한 감성.
여전히 와이드핏 진은 충분히 입을만한 아이템이고 슬슬 와이드가 물려서 스키니진을 입으려니 이 애매한 느낌이 발목을 잡는다.
그간 스키니의 유행이 끝나고 넓어진 바지핏 탓에 신발도 한치수에서 두 치수 정도 크게 사기도 했고... 막상 스키니 한 바지에 신발을 신으려니 남은 선택지가 부츠나 구두 정도라 손이 안 간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임시방편으로 레귤러 핏을 입자니... 나는 원래 레귤러 핏을 즐겨 입었었지.
여름이 끝나고 날씨가 추워지자 청바지가 물리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여름엔 청바지를 더 입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2.
청바지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청바지라면 근본템.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하는 만능 아이템. 처음 만들어진 이후로 지금까지 살아남은 대표적인 품목이니만큼 오늘도 몇억의 사람들이 데님을 입고 있을 것이다.
그중에 하나인 내가 청바지가 물린 것일 뿐. 여전히 청바지는 어느 브랜드에 가도 잘 팔리는 품목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핏은 다양하지만 내 다리통을 집어넣으면 대게는 핏이 비슷비슷 해지기도 하고. 몇십 만원쯤 하는 고급 청바지들도 결국 세일할 때 8만 원쯤 주고 산 바지와 크게 다른 점을 느끼기가 힘들다.
3.
나는 항상 데님이 치킨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크게 맛없지 않으면 뭐든 괜찮고, 뭐든 일단 튀기면 맛있는 것처럼 청바지도 그렇다. 약간의 변주로 재미를 더할 수도 있고 아주 약간의 변화로 풍이 달라지는 섬세하면서도 어려운.
후라이드 치킨처럼, 파이브 포켓 데님은 밋밋하면서도 맛있다. 다른 워싱진도 때론 자극적이면서도 입에 착착 감기는 양념치킨 같고, 가끔 특이한 데님을 볼 때면 파닭을 먹는 기분이다.
하지만...
결국 치킨은 치킨이고, 기름에 닭을 튀긴 음식이라 매일 같이 먹으면 질리는 것도 사실.
변화라고 해봐야 아주 미묘한 차이일 뿐. 후라이드 치킨에 중식 소스를 부으면 깐풍기 비슷한 치킨이 되는 것처럼.
물론 그런 데님도 맛있게 즐기는 방법이 있다.
근본. 복각 데님을 파기 시작하면 데님을 볼 때 보는 눈이 차원이 달라진다.
가령 밑단의 체인 스티치라든지, 버튼 플라이라든지, 허리 부분의 길이는 얼마나 되고, 밑위는 어디까지 올라가 있으며, 백포켓의 위치나 벨트로프의 너비, 옆면의 봉재는 어떻게 되어있는지, 이런 세세한 부분을 따지기 시작하면 모든 청바지는 다 다르고 나름의 레시피를 가진 요리가 되긴 하지만.
아아 결국 치킨일 뿐인 것인가....
솔직히 청바지 하나 사는데 너무 많은 수고와 노력을 들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유명 브랜드에서 20만 원 딸깍하면 평생 입을 청바지도 살 수가 있는데.
나는 치킨 요리사가 아니라 치킨 먹방러가 되고 싶은 것뿐인데.
4.
돌이켜 보면 애초에 바지라는 장르가 한정적이란 생각도 든다. 오죽하면 버뮤다팬츠 같은 이상하고 난잡스러운 바지가 유행을 하는 것일까.
차라리 치마를 입을 수 있다면 괜찮을까? 가끔 치마를 입고 런웨이에 서는 모델도 보이던데....
요즘 드는 생각이지만 파격은 생각 보다 제법 빠르게 일상이 된다. 분야별로 다르기야 하겠다마는. 조만간 남자들도 기다란 치마를 일상복으로 입는 날이 오지 않을까?
프릴이나 레이스 장식은 조금... 힘들 수도 있겠다 싶은데 톰브라운의 남성 스커트처럼 포멀 한 곳에서부터 차근차근 영역을 넓혀가는 거지.
벌룬 팬츠 같은 장르도 한때 대세로 뽑혀 유행한 것을 보면 언젠가 스커트도 일상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옛날 사람들은 남자도 치마를 입었다고 하니.
5.
고작 데님이 질린다는 말을 길게도 써놓았다. 아니 뭔가 요즘은 데님뿐만 아니라 영원하리라 생각했던 나의 모든 관심들이 다 침체된 느낌이다.
그냥 늘 듣던 음악을 듣고, 입던 옷을 입고, 좋아하던 브랜드를 둘러본다.
변화는 귀찮고, 유지는 질리고...
새로운 유행이란 것도 뭐 코어라면서 결국 10년 전 놈코어의 재탕 같은 느낌에, 다른 유행은 따라갈 엄두도 안 난다.
길게 갈 줄 알았던 y2k도 어쩐지 시들시들해지는 느낌이고... 레트로란 이름의 복각도 새롭진 않으니 재미가 없다.
이젠 정말 옛날 클래식으로 돌아가야 하나. 나도 막 턱시도 입고 출근해? 설마 15세기쯤 되는 시기의 유행이 돌아오는 건 아니겠지..?
6.
그렇다고 새 청바지를 더 살 수도 없다. 이미 내 옷장은 청바지에 잠식당하고 있고, 아직 몇 번 입지 않은 청바지도 있는 마당에 이제 와서 데님을 버릴 수도 없다.
아, 내일 날이 맑으면 모처럼 스키니진을 꺼내 입어볼까.
그래 생각보다 괜찮은지도 몰라.
10년쯤 전만 해도 다 스키니진을 입고 다녔으니까.
하루만 옛날로 돌아가보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