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각

by 낙낙

수고스러움이 묻어난 제품은 항상 감동이 있다. 혼을 담아 워싱을 낸 빈티지 제품은 더더욱.


트렌드 한 느낌에서 조금 벗어났지만 난 빈티지한 느낌이 좋다. 중고 제품은 싫지만 손 때가 묻어 조금 너덜너덜해진 그런 감성은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가는 치트키라고나 할까.


1.


빈티지. 이런 장르가 유행하던 때도 있었다. 물론 내가 옷에 관심을 가진 시기는 아니어서 이 시기의 패션은 잘 모른다.


다만, 나의 빈티지 경험은 굉장히 이른 나이부터 시작됐는데, 아마 덩치가 비슷한 형제가 있는 사람들은 공감하겠지만, 난 옷을 물려 입었다.


무려 10살이나 많은 형의 옷을 물려 입었다.


불만을 가질 법도 하지만 나의 형은 옷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진 몰라도 형이 입던 옷은 항상 품질이나 착용감이 좋았다.


어린 나는 언제 형 옷을 뺏어 입을 수 있을까 기대하며 키가 얼마나 자랐는지 확인하곤 했다.


2.


고등학생 때까지도 난 형 옷을 입었다. 입을만했던 것이 그때 물려받은 옷이라고 하면, 랄프로렌의 체크셔츠, 노스페이스의 패딩, 상당한 고가의 청바지였기 때문에 물려 입는 맛이 있었다.


특히 랄프로렌의 체크셔츠는 사이즈도 큰 데다가 부드러워서 착용감이 말도 안 되게 좋았다. 착 감기는 랄프로렌의 패턴, 이미 세탁할 대로 세탁해서 고급스러움이 사라지긴 했지만 그와 비례해서 편안함은 올라갔다. 어느 정도였냐면 나는 수능 때도 그 체크셔츠를 입고 시험장에 들어갔다.


이 당시 물려받았던 구형 노스페이스 패딩도 세탁을 자주하여 필파워는 많이 떨어진 상태였지만 낡아도 노스페이스는 노스페이스, 충분한 보온력에 오히려 살짝 여유롭여진 덕에 착용감이 무척 좋았다. 기장감은 살짝 길었지만 이 당시 노스페이스 패딩은 나름 인기 제품이었기 때문에 곧잘 입고 다녔다.


더 이전으로 돌아가자면, 라코스테의 카라티라든지, 카파 체육복 세트, 나이키 신발, 등... 수 없이 많은 브랜드 제품들이 있었다.


워낙 좋은 제품도 많고 상태도 괜찮아서 나는 물려 입는 게 좋았다.


형이준 청바지에 형이준 후드티, 아 생각해 보니 금색으로 칠한 아디다스 져지도 있었구나.


이 당시 유행하는 아이템들은 거의 다 물려 입었던 것 같다. 이렇다 보니 중고 제품에 거부감은 없었지만 역시 민감한 사춘기였던 탓일까.


그래도 대학생 때까지 옷을 물려 입을 수는 없으니, 나도 새 옷을 바라게 되었다.


3.


새 제품은 좋다. 반짝반짝한 광택감, 촤고 떨어지는 찰기, 새 제품 특유의 상쾌함이라고 할까... 뭔가 중고 제품에서 느껴지는 텁텁함과는 사뭇 다른 느낌.


새 옷에 둘러싸일 수 있는 백화점은 옷을 좋아하는 내겐 피톤치드를 내뿜는 국립공원과 다를 바가 없으니. 산림욕이 아니라 의림욕이라고 불러야 할까.


하지만 새 제품을 입다 보면 그 편안한 착용감이 그리워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때의 나는 한창 다이어트를 끝낸 후 '나만의 옷'을 만드는데 열심이었다.


4.


새 제품을 내 몸에 맞게 변화시키는 용어가 따로 있는지는 모르겠다. 청바지라면 소킹 작업이 될 테고, 면 종류의 소재는 경년변화라고 부르던데...


뭔가 애매하니 대충 경년변화라고 통칭하자.


이때 나는 튼튼한 옷을 찾아 헤맸다. 당시 접한 아메카지란 패션 스타일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으니 딱딱한 데님과 가죽부츠를 구매해 이 당시 구매한 두 제품을 아직도 신고 있다.


당시 구매한 데님은 리바이스 502의 진청.


부츠는 닥터마틴의 블랙 8홀 부츠였다.


문제가 있다고 하면.. 데님은 물이 빠지지 않았고 부츠는, 그 당시 페이크레더와 진짜 가죽을 구분하지 못했던 내가 페이크레더를 사는 바람에 여전히 반짝반짝하단 점이다.


5.


첫 경년변화는 처참한 실패였다. 그런 와중에 튼튼해서 아직도 입고 있다는 게 참으로 우습다. 부수려고 산 방패였는데... 생각보다 너무 단단해서 그냥 방패로 쓰고 있는 셈이지...


나의 이런 경험 탓에 아니 대체 데님 마니아들이 말하는 경년변화는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조사를 했다.


그러다 복각이라는 의류 장르를 알게 되었고 이 심오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복각이라 함은 옛날 옷들을 현대에 재구성하는 장르인데 주로 그 대상이 되는 의복은 군복이나 청바지 종류다.


부자재나 원단 심지어 만드는 기술까지 그 당시와 동일하게 구성해 나가는 제작자들을 보면 어떤 광기마저 느껴진다.


요컨대, 옛날 옷을 옛날 기술로, 옛날 원단을 이용한 옷이라는 말이다.


그야말로 장인 정신. 광기의 장인 정신, 미국에도 없는 옛날 리바이스를 기어이 복구해버리고 마는 그들의 열정은 한편으론 미련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그 문화를 사랑한다는 증거이지 않을까.


6.


그런데. 그렇다고 내게 복각 제품이 좋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진 않다고 할 것 같다.


내게 처참한 실패를 안겨준 리바이스 502 제품은 바꿔 말하면 오랜 시간 동안 물이 빠지지 않는 좋은 청바지인 것이고, 닥터마틴의 페이크레더 부츠도 바꿔 말하면 처음 샀을 때의 반짝거림을 유지하는 아주 좋은 옷이다.


음악을 할 때도 지향점이 다르듯, 경년변화가 일어난다고 좋은 옷은 아니니까.


경년변화가 난다는 것은 아무래도 옷에 손상이 간다는 것이다. 옷의 염료가 벗겨지고 마찰로 인해 옷의 색이 바래고. 주변 사람들 말을 들어보면 가폭이라고 해서, 가랑이가 터지는 경우도 제법 있는 모양이니.


물론 경년변화를 견뎌내기 위해 옷은 튼튼하게 만들겠지만, 경년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365일 주야장천 한 옷만 입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경년 변화 있는 옷은 결국 체질적 한계가 있다고나 할까.


옛날처럼 추석에나 새 옷을 입는 시대도 아니고, 매일매일 새 옷을 입을 수 있는 시대이니만큼 이런 단점은 아주 작은 부분일지도 모르지만 확실한 호불호의 영역에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가장 좋은 건 변하지 않는 옷과 변하는 옷, 각 한벌씩 구매해 두고 천천히 복각 제품을 즐기는 것이겠지만, 평범한 직장인이 된 나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소비이기도 하지.


7.


결과적으로 난 요즘 복각 제품을 굳이 찾아 입진 않는다. 워싱이 예쁜 옷을 사면 샀지.


여전히 경년변화가 제대로 일어난 옷들을 보면 가슴이 뛰긴 하지만, 우선 당장 월요일부터 출근해야 하는 내가 단벌 신사로 버티기엔 5일은 너무나 긴 시간이고 앞서 말했지만 굳이 복각이 아니라도 예쁜 옷이 너무 많다.


그 덕에 내 옷장엔 중청바지들이 가득 쌓여가지만, 여전히 마음속엔 헛된 희망이 있다.


언젠가 이 중청바지들이 물이 빠져 단체로 연청이 되진 않을까?


그리로 최근엔 리바이스 stf를 구매해 경년변화를 간접적으로 느끼고 있기도 하고.


알아갈 땐 너무나 신비하고 완벽해 보였는데. 어느새 복각의 단점을 생각하는 낭만 없는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다.


아마 이번달은 힘들겠지만 또 몰라. 언제 또 복각의 매력에 빠져 1년 동안 같은 바지만 입고 다닐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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