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값

by 낙낙

요즘 옷 쇼핑을 못하고 있다. 아니 맘에 드는 옷을 살 구매력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


직장을 가진 후엔 며칠 소비를 늘려도 어찌어찌 복구가 가능했는데 최근 한달, 예상치 못한 소비와 비정기적인 지출과 예정된 지출이 몰려 거의 두 달 치를 소비한 탓이 크다.


수입이 늘어난 만큼이나 소비도 늘어버린 것이다.


1.


옛날 옷들을 생각했다. 10만 원, 진짜 힘 좀 준다 싶으면 지갑에 딱 30만 원 가지고 백화점에 갔다. 영롱한 겨울 재킷들이 20만 원, 내년 겨울까지 입을 수 있는 튼튼하고 질 좋은 바지가 10만 원.


겨울철 쇼핑도 30만 원이면 두렵지 않았다.


물론 백화점 기준이고, 아웃렛에 가면 더 싸고 좋은 브랜드의 제품을 살 수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은 30만 원이면 겨울철 옷은 둘째치고 간신히 후드티 하나 사게 생겼다. 하....


백화점에서 옷을 산 게 언젠지 기억도 안나는 요즘, 예쁜 디자인에 돈을 투자할 가치를 느꼈던 적이 언젠지 기억도 가물가물해지는 요즘.


단적으로 말하자면 옷이 너무 비싸다.


2.


물론 제자리에 서있는 브랜드도 있고 여전히 좋은 가격대를 보여주는 스파 브랜드도 있다. 당장 생각나는 톱텐이나, 스파오라든지, 에 잇세컨즈라든지... 시골 청년에겐 낯설지만 여전히 가치 있는 흐앤므, 자라도 있고. 상당히 비호감 이미지가 됐지만 유니클로도 버티고 서있다.


심지어,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최근엔 스파 브랜드들의 옷이 부쩍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디자인도 제법 괜찮고 가격을 보면 가슴이 뛴다.


옛날엔 품질이 별로였던 곳들도 전체적으로 품질이 올라간 것 같은 느낌도 있고... 전체적으로 옷이 좀 좋아진 느낌. 아니 어쩌면 최근 높아진 가격으로 내 옷보는 눈이 낮아진 걸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 옷이 비싸져서 만족스러운 쇼핑을 못한다? 그럼 눈을 낮추면 해결될 것을.


3.


난 직장인이 되고 난 후부터 명품까진 아니고 매스티지쯤 되는 브랜드의 옷들을 사서 모으고 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최근 유행하는 도메스틱 브랜드에 돈을 쓰긴 뭔가 애매하고... 그렇다고 명품 브랜드들을 사자니 너무 비싸고....


명품도 아니고 도메스틱도 아니고 그 중간 언저리쯤 있는 옷들을 사게 된 것인데, 뭔가... 요즘엔 이게 정답인 것 같다.


합리적 소비나 자원의 희소성 같은 단어를 가르치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합리적 선택을 하지 못하는 현실이란.


어른이 되고 약간 겉치레에 신경을 쓰게 됐다. 뭔가 중요한 자리에 스파 브랜드 정장을 입으면 안 될 것 같고, 데이트를 갈 때도 좋은 구두를 신어야 할 것 같고, 겉보기에 깔끔한 걸 넘어서 브랜드까지 신경 쓰고 있다.


누군가는 뭘 그런 걸 신경 쓰냐라고 말하지만, 정작 좋은 차를 사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면 좋은 옷 정도야 괜찮지 않은가 싶다.


물론 돈을 아껴서 나중을 위해 투자하라는 말도 있었지만, 에이... 지금 멋 좀 부려봐야지. 나중에 늙어서 예쁜 옷을 어떻게 입고 다니냐.


그런 관점에서 메스티지는 더할 나위가 없다. 일단 어떤 식으로든 이름값은 있으면서도 품질도 가격만큼이나 훌륭하고, 디자인 적으로도 메리트가 있는 상품들이 많기 때문에.


4.


하지만 가끔 그런 생각도 든다. 어라... 이 돈으로 그냥 싼 옷을 여러 개 사서 다양하게 입으면 좋지 않을까?


아 그런데 입다 보니까 또 그렇지 만은 않은 것이... 경험상 싼 옷을 주르륵 사놔도 결국 입던 것만 입게 된다.


가령 셔츠를 색깔별로 사두면 결국 검은색 셔츠는 버려진다. 맨투맨을 쭉 사놔도 흰색 맨투맨은 손도 안 대고, 후드티를 사려고 보니 이젠 후드티도 살짝 부담스럽다.


이럴 거면, 어차피 입을 것만 입는다면. 내가 뭘 좋아하고 즐겨 입는지 알고 있다는 생각 하에 옷의 급을 조금씩 올리면 되지 않을까 싶어 지금에 이른다.


지금까지 쇼핑을 하며 느낀 나의 특징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옷은 재킷이다.


특히 기장은 딱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일반적인 기장에 소매가 약간 손목을 덮고 목을 감싸는 카라가 두껍지 않으며, 셔츠 칼라처럼 세워진 게 아니라 시옷처럼 눕혀져 있는 디자인.


이런 옷이 뭐가 있을까 찾다가 눈에 들어온 게 스톤 아일랜드, cp컴퍼니 쪽 제품들이었다. 근데 스톤은 뭔가... 습.. 좀 그래서 cp컴퍼니 제품으로 사실상 거의 종결을 한 상태고...


두 번째로 좋아하는 옷은 셔츠다.


셔츠 중에서도 품은 딱 맞고, 기장도 여유롭게 아래까지 떨어지고, 카라가 너무 넓지 않으면서 적당히 얇아 내 두꺼운 목을 커버할 수 있고, 팔길이까지 적당한 셔츠. 근데 셔츠는 아직 종결을 못했다. Cp컴퍼니 제품과 겹치는 구석도 있고 셔츠란 품목이 정말 어디서나 나오는 느낌이라 뭔가 아직까지 인생 셔츠란 걸 경험해보진 못한 것 같다.


다만 몇 가지 적자면, 시리즈에서 발매하는 셔츠, 유니온블루에서 발매하는 런드리셔츠, 네이더스에서 판매하는 고래 로고가 인상적인 셔츠가 있고 좀 더 두꺼운 셔츠는 역시 랄프로렌이지.


유니온블루 빼고 가격대는 제법 있지만 하나같이 버리기 아까운 셔츠들이다.


물론 셔츠를 소모품으로 생각한다면 스파 브랜드의 셔츠가 제격이다. 내 경우엔 반팔 셔츠를 스파 브랜드에서 주로 구매한다. 기가 막히게 딱 여름 내도록 작살나게 입으면 옷의 수명이 다한다.


참 옷사기 어렵다니까... 예전엔 그냥 툭툭 걸치면 됐는데 요즘엔 별의별 것들을 다 생각해야 하니...


하지만 결과적으론 입을 옷만 비싼 걸로 사서 남겨 놓으니 지금 내 옷장은 혹여나 불이라도 나서 불에 탄다면 최신형 컴퓨터 한 세트 정도는 너끈하게 뽑을 수 있는 돈이 날아갈 내 보물창고가 되었다.


5.


물론 이래도 아이고 무슨 옷에 신경을 그리 쓰냐라고 물을 수도 있지만, 그런 생각을 하지 마시고 일단 아웃렛에 한 번 가보셔라, 이름만 듣던 옷들이 꽤 살만한 가격에 진열되어 있는 걸 보면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간다.


내가 좋은 차를 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허세 섞인 마음을 유일하게 이해하는 지점이 옷이다. 좋은 옷... 좋은 옷은 좀 유치하다만 분명히 자신감을 올려준다.


물론 그에 따른 옷 값에 투자할 가치를 느끼는 게 먼저겠지만.


다시 돌아와서, 나는 비싼 옷을 좋아한다. 특히 다년간의 쇼핑 경험으로 내 취향을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에 비싼 옷을 샀을 때 느끼는 만족감도 상당하다.


입을 옷을 비싸고 좋은 옷으로 바꾸는 과정은 차곡차곡 저축하는 느낌도 들고, 뭔가 자신감도 생긴다.


하지만 그래서... 요즘 나온 옷들을 그 돈 내고 살 수 있냐라고 물어보면.... 글쎄...


6.


난 요즘 옷을 볼 때 가불기에 걸려있다.


디자인이 약한 옷을 보면 그래서 이걸 이 돈 주고 사? 란 질문을 떠올리고.


디자인이 강하면 그래서 이걸 입고 다녀? 란 생각을 한다.


결국 사게 되는 건 내가 용납 가능한 디자인을 가진 유명 브랜드의 옷인데 그러다 보니 사는 옷이 다 비슷비슷하다.


흔히 말해 내 취향이 고이기 시작한 것이다. 샀던데서 또 사고 또 사고...


그런데 막상 다른 옷을 사려고 보니,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무지 재킷이 40만 원쯤 하고, 코트는 80만 원쯤 줘야 하는 데다가...


다른 브랜드는 비슷한 가격대에 온갖 휘황찬란한 디테일을 수놓아 대체 이걸 입고 다니란 건지 구경거리가 되란 건지 의심스러운 옷들이 많고...


무지의 밋밋한 옷을 사려니, 비싼 데서 느껴지는 고급스러움은 나만 느끼는 것 같고.


디자인이 많은 옷을 사려니 옷 비싸다고 자랑하는 것 같은....


결국 다시 절충안을 짜서 중간쯤 되는 매스티지 브랜드를 구매한다.


나름의 디자인도 디자인인데.... 글쎄 솔직히 말하면 결국 이름값이다.


7.


가령.


내가 간절기용 재킷을 산다고 했을 때.


진짜 옷질 좀 해야 알 수 있는 신생 브랜드에서 발매한 옷을 사는 것과.


대충 브랜드 이름 말하면 아는 옷을 사는 것.


둘 중에 정답은 없지만 내 경우엔 후자가 더 났다고 생각했다.


예전이라면 전자의 옷을 좀 더 싸다는 이유로 구매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요즘 옷들은 이름 값있는 브랜드건, 이름값이 좀 부족한 브랜드건, 하나같이 기본 40만 원이다. 여기서 말하는 건 당연히 스파 브랜드 이상의 옷을 말하고...


옷을 살 때 급을 나누는 게 참 위험한 일이란 건 알지만.


40만 원이란 적지 않은 돈을 쓰는데 이름값도 없는 브랜드에서 소비를 하면 뭔가 손해 보는 것 같고... 내가 이 옷을 사서, 이 옷이 좋은 이유를 설명해야 되는 것 같은 느낌이 싫었다.


솔직히 비싼 옷 사는 게 다 자신감 좀 채우려고 사는 건데.


물론. 옷을 구매할 때 디자인을 보고, 뭐.. 어떤 디테일을 보고 구매할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결국 그걸 모르니까.


그냥 브랜드 딸깍하면 얼마나 편한가. 지금 내가 입은 옷의 가치를 브랜드 로고 하나로 설명하는 간편함.


나는 이 간편함에 잡아 먹혀버렸다.


8.


옷 값이 비싸지니 소비가 더욱 경직되고 있다. 옛날엔 여러 사이트들을 돌아다니며 옷 정보를 얻는 일도 있었고 실제로 흔히 말하는 황금 보세옷을 사기 위해 제법 많은 시간을 투자하기도 했었는데...


요즘 그런 황금 도메스틱들은 하나같이 가격이 미쳐 날뛰어서 내겐 매스티지 브랜드만큼의 효용성이 보이지 않는다.


매스티지와 도메스틱의 가격 차이가 거의 안 나게 된 시점부터는 옷을 찾으려는 열정보다도, 브랜드를 한 두 가지 정해주고 그 브랜드에서 옷을 사는 목표형 소비가 되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이 소비도 몇 년 하니 재미가 없다. 하 슬슬 도전적인 옷들도 사보고 싶은데.


그런데 도전 좀 하려고 옷에 40만을 태워? 정신 차려라... 40만 원이면 한 달 치 연습실을 빌릴 수도 있고, 헬스장을 몇 개월씩 끊을 수 있고, 병원에 가선 수액도 맞을 수 있는 돈이다.


도전하기엔... 옷 값이 참 비싸다.


9.


사실 찾아보면 더 싼 값에 도전적인 옷들은 많을 텐데.


어쩌면 부족 해진 건 나의 열정이려나.


아니, 몇 번 생각해 봐도,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옷 값이다. 물론 가격이 올라간 이유도 이해가 간다. 스파 브랜드들은 품질이 좋아지고, 디자인도 훌륭해지는데 대량 생산으로 가격까지 낮아지니, 상대적으로 작은 브랜드들이 스파 브랜드보다 더 좋고 멋진 옷을 내게 위해선 이 올라간 물가에서 이윤을 낼만큼 비싸게 팔아야겠지.


아마 도전 정신이 끊어지는 건 나뿐만이 아니라 생산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상황은 소비자와 생산자 모두 열을 내서 패션에 집중하는 것이겠지만.


언제 또 그런 날이 돌아오려나.


내려오지 않는 기름값과 라면 값처럼 옷 값도 위에서 내려오지 않을 것만 같다.


지금이 남은 인생에서 옷이 제일 싼 시점이 될 것 같은 게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겠지.


어렵다.


이런 고민을 늘어놓으면서도 다음 쇼핑 때도 다시 목표형 소비가 될 것 같은 이 느낌.


빨리 다시 모두가 열정을 찾는 때가 찾아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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