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윙 아이언레인저

by 낙낙

으레 아메카지쪽 패션을 즐기다 보면 통과 의례처럼 지나치는 브랜드들이 있다. 청바지는 이것저것 종류가 많아 딱 하나를 꼽기는 좀 어려울 것 같고, 바지의 디키즈, 겉옷의 칼하트, 물 건너온 단톤이라든지.


요즘은 좀 거리감이 생겼다고 해도 니들스나 남2서8 같은 브랜드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당연히 레드윙도 지나치게 된다.


1.


살을 빼고 고가의 청바지를 구매하며, 어느 정도는 워크웨어나 아메카지에 관심을 가지던 시기에 레드윙은, 나에게 일종의 기원 같은 느낌이 서려있는 아이템이다.


저것만 신으면 나도 아메카지를 잘 입게 될 거야.


와 진짜 오어슬로우 퍼티그팬츠에다가 아이언레인저만 신으면 웃옷은 벗어도 아메카지다.


뭐 이런 식의 기원이다. 기원이라고 해야 하나 기약 없는 소망이라고 해야 하나. 베드포드 재킷처럼 레드윙의 부츠는 상상 속의 존재하는 아이템이 되어가고 있었다.


살면서 접해본 부츠라곤 투박한 아저씨들의 작업화나 등산용 부츠가 다였던 내게 광부들이 썼다는 옛날 부츠가 왜 이토록 아름답게 보였던 것인지.


첫 부츠를 구매하고 아이언레인저와 질감이 비슷한 닥터마틴 3홀 워커를 잘 신고 다녔다. 하지만 역시 지르지 못한 신발에 묻은 미련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아서, 가장 사고 싶었던 베드포드 재킷을 구매한 후 레드윙에 손을 대고야 말았다.


2.


일단 무거웠다. 도착한 택배 박스의 무게 그 자체가 무거웠다. 돌덩어리 같던 노트북도 경량화되는 시대에 이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무거운 느낌에 아 역시 별 수 없구나 싶었다.


결국 아이언 레인저 역시 스쳐가는 인연 같은 것. 기대가 과했다. 그렇게 별생각 없이 박스를 열자마자 바로 느껴진 건 가죽의 냄새였다.


음, 가죽 냄새나네. 이 정도가 아니라 마치 가죽 소파에 코를 박고 맡는 듯 생생한 가죽 냄새가 치고 올라왔다. 불호는 아니었다. 애초에 가죽도 좋아하고, 이미 가죽 신발은 충분히 가지고 있었으니.


후각적인 경험 탓인지 옆면으로 정리된 레드윙의 모양이 어쩐지 말과 닮았다고 생각하며 손에 집어봤다.


이야. 괜히 무거운 게 아니다. 일반 운동화가 5킬로짜리 아령이라면 레드윙은 자비가 없다. 바로 12킬로짜리 아령의 묵직함이다.


신발이 좀 큰 편이라 그렇겠지 감안해도 납득이 안 가는 무게감. 뒤꿈치의 덧댐 가죽과 밑창을 만져보면 그제야 이해가 간다.


무슨 가죽 보호대를 낀 것 같은 단단함에 망가진단 생각이 들지 않은 세줄 바느질. 이 신발을 밑창 날아가게 신으려면 대체 무슨 짓을 해야 할지 한참을 생각해 본다.


굿이어 웰트란 공법을 잘 알진 못하지만 일상화의 영역에선 필요한가 의문이 드는 레드윙의 단단함은 다시금 내게 현대 기술의 발전을 상기시켜 줬다.


감성 넘치는 코르크 인솔. 비브람창. 풀그레인 가죽 등등 레드윙을 칭찬할 점은 차고 넘치고 그에 비례하게 무겁지만.


이 모든 점을 압도하고 단연코 레드윙 아이언레인저의 최대 장점이라고 하면...


그냥 예쁨.


같다.


3.


보통 옷을 개봉하고 첫 순간. 흔히 옷에서 음이온이 뿜어져 나온다고 하는 순간이 온다. 이때는 옷을 옷이라기 보다도 일종의 오브제로 소비를 하는 시기인데, 물론 파워 실작러들은 배송받자마자 바로 실착을 할 수도 있지만.


나는 옷을 우선 눈으로 즐기고, 장식물로 쓰는 시간을 갖는다. 옷이기 전에 잘 만든 작품으로 일단 바느질 살펴보고 가죽 상태나 주름진 정도를 쭉 살핀다.


물론 QA과정이 아니기 때문에 검사를 한다기보단 감상을 한다는 느낌이다. 끈을 묶기 전에 살피고 끼우기 전에도 살피고 안쪽은 어떻게 만들어져 있는 데를 살피다 보면..


이야 이거 레드윙. 진짜 엔가 급 마감이다.


뭐 안 좋다는 건 아닌데 깔끔하진 않다.


어쩌다 미국 맛이 이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미국 의류 특유의 거친 느낌이 물씬 풍겨오는 마감처리였다.


언젠가 빈티지 청바지를 장식해 둔 카페를 간 적이 있는데 그 청바지가 그윽한 커피의 향이라면. 레드윙은 바로 위스키 온 더락 같은...


수식어를 갖다붙이긴 했지만 아무튼 좀 지저분했단 말이다.


다만. 이 지저분한 마감처리도 레드윙쯤 되면 감성의 영역이다. 피카소가 큐비즘 작품을 만든다고 해서 원래 그림을 못 그리는 게 아니듯이.


이 값에 훌륭한 마감처리를 할 수 없어서 안 한 게 아닌. 약간 뭐... 그런 감성.


일부러 마감을 좀 지저분하게 했다...이런 말은 아니고.


광부들이 신는 신발이니까.


거칠고 튼튼한 신발이니까 납득이 가능한 감성.


그리고 그런 마감 덕에 장식적인 요소는 더욱 높아진다. 뭔가 바느질도 삐뚤한 것 같고 코르크 부분이 튀어나오면 어떤가. 이런 불완전함이 가지는 온전한 완전함은 불량률이 소수점으로 가는 공장제 제품에서는 찾기 힘든 완벽함이다.


4.


레드윙은 잠시 장식이 되었다가 이내 날씨 좋은 어느 날 처음으로 바깥바람을 쐬었다. 미리 맞춰둔 끈을 꺼내고 스피드 훅에 끈을 꽉 걸고 묶어내면, 처음으로 가죽에 주름이 지는 순간이다.


혹여 이상하게 질까 조심스레 발을 딛고 걸어본다. 양쪽이 비슷하게 사뿐사뿐. 그러다 접힘이 생기면 바로 편히 뒤꿈치를 내려놓는다.


그러다 아차.


아직 익숙하지 않은 키높이에 발이 살짝 걸리고.


처음으로 바람을 쐰 아이언레인저는 신고 나간 지 20초 만에 첫 상처가 생겼다.


하지만. 모든 가죽 옷이 그렇듯. 등의 상처는 검사의 수치 같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가늘게 입혀지는 멋이라고 해야 옳다.


약간 그 캐릭터 커스터마이징 할 때처럼. 밋밋한 프리셋 캐릭터의 얼굴에 상처도 넣고, 점도 넣고, 수염도 넣는 그런 과정.


유명한 캐릭터의 시그니쳐 디자인은 뭔가 빠지면 허전한데 레드윙은 그 시그니쳐 디자인을 상처로 대신했다.


아 뭔가 어쩐지 내 레드윙이 장식처럼 보였던 건 상처 때문이었나. 마감이 거친데도 새것처럼 보인 것이.


5.


이야 그런데 이거 상처가 생겨도 너무 잘생긴다. 돌이 깔린 주차장을 걷기만 해도 튀는 돌에 상처가 생긴다. 겉면이 튀어나온 스웨이드도 아니고.


하다 하다 집에 들어가는 길에 문에 스친 자국이 남는 것을 보고 허허 웃고 나니, 상처가 묻은 아이언레인저의 가죽이 제법 멋있어졌다.


도대체 저지경이 되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 신어야 할까 생각했던 착샷들이 떠오르고, 어쩌면 그 사람들도 1년 조금 더 신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6.


아메카지 패션을 처음 보고 느꼈던 인상은 제법 거칠고 딱딱한 옷이라는 점. 깔끔함보단 남자다운 인상을 주고 분명 아이템들은 포멀 하지만 어째선지 캐주얼한 느낌을 뿜어내는 스타일이라는 점.


조금 대충 입어도 나름의 감성이 느껴지는 편하면서도 자유로운 옷들.


그런데도 가죽 신발을 주력으로 신는 묘한 패션.


공부라고 하긴 뭐 하고 아메카지는 참 알면 알수록 모르겠는 스타일이다. 뭐 하나 딱 정의하기 힘들고 누군가가 제시한 스타일들이 모여 만들어진 어떤 집합 같은 느낌.


생각하는 것도 다르고, 느끼는 것도 다른 사람들이 결과적으로 비슷한 결의 패션을 이룬다는 점에서 문화의 강력함을 새삼 생각해 본다.


다른 사람들은 아메카지를 뭐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커다란 바다를 보고 감히 하나로 정의할 수는 없겠지만.


하나 그래도 확신할만한 건 레드윙은. 아이언레인저는. 그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정답처럼 인정받는다는 점에서, 앞으로 내가 신고 느낄 아메카지스러움이 나를 정답의 갈래로 이끌어 주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의문의 대답이 되어줄 수 있다는 점이겠지.


그래도 이 비싼 신발을 흠집 난 채로 다닐 순 없으니 다가오는 신년에는 슈케어라도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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