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를 읽으면.

by 낙낙

직업상 교과서를 읽을 일이 많다. 나름의 연구라고도 볼 수 있고 새로이 바뀐 교육과정이란 것이 어떻게 녹아들었나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물론. 약간의 취미라고 해도 크게 틀리진 않은 것 같다.


1.


교과서. 재미없는 글을 재미없게 묶어 재미없게 제시한 쓸데없는 서술의 책.


학습지. 필요한 내용만 담아 집약적으로 묶어 재미없게 제시한 어쩔 수 없이 봐야 하는 책.


내가 예전부터 생각하던 두 서적의 차이는 이렇다. 물론 지금의 난 교과서를 아주 사랑하기 때문에 저 쓸데없다는 말은 전적으로 거짓말이다.


2.


교과서는 이를테면, 교육과정의 구체화다. 구체적으로 가면 성취기준의 구체화다. 학년군마다 넘버링에 영역별로, 제법 체계적인 형태를 가진 성취기준은 그냥 읽을 땐 대체 뭘 하란 건지 알 수가 없다.


제법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기는 한데... 여기 나온 원리나 학년 수준이라고 하는 것들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교육과정 뒤편에 친절히 나와있긴 하지만 이를 한 번에 구체화한 것이 교과서다.


심지어 성취기준을 어떻게 성취할 지에 대한 방법론까지 제시되어 있다. 성취기준을 수업 모형에 따라 일종의 틀을 만들어 둔 것인데. 그 덕에 교과서만 쭈욱 따라가도 여러 기본적인 성취를 이룩할 수 있도록 만든 도구다.


교과서는 성취기준을 달성한다는 점에선 더없이 훌륭하다. 다만, 교사가 자율성을 가지는 한, 교사 교육과정이나 학교자율 특색 과정이 있는 한.


완벽하다고 하긴 어렵다.


3.


나는 교과서 신봉자로서, 어지간하면 교과서에 제시된 활동을 따라가는 편이다. 하지만 그게 잘 안 되는 해가 있다.


가령 교과서에 제시된 내용들이 학습자의 특성과 맞지 않거나, 교사인 나와 맞지 않을 때, 학습을 구현할 환경과 맞지 않을 때 그렇다.


시골의 학교는 도시의 내용을 학습하기가 쉽지 않고, 세상이 좋아졌다지만 개인의 경험이 너무나 다채로워진 덕에, 충분히 일반적이었을 교과서는 제법 많은 예외 사례를 보여준다.


또한 외적인 문제도 많이 있다.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오라는데, 학교 근처가 허허벌판인 경우도 있고...


이렇게 난감한 상황을 위해 최대한 많은 에듀테크를 활용해 가능한 생생한 체험을 계획은 하고 있다만. 여전히 아쉽긴 하다...


좀 더 와닿는 내용. 재구성이 필요한 순간이다.


4.


재구성은 절대 교사의 마음대로 이뤄지진 않는다. 명확한 목표가 있고, 이룰 방법이 있기 때문에 그에 맞는 활동을 변경하는 느낌으로 재구성을 진행하는 편이다.


가령, 내가 토론을 가르친다면. 교과서는 토론의 개념과 해야 하는 이유, 규칙, 방법 등을 쭈욱 살펴보고 토론을 진행할 것이다.


아주 훌륭하고 정석적인 방법이지만 이런 개념과 실제로 사용하는 것을 배우는 경우엔 아예 처음부터 토론을 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대게 토론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 잡혀있는 틀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굴러가긴 하지만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진 않는다.


그리고 이 첫 토론을 바탕으로 문제점을 찾아본다. 많은 얘기가 나온다. 근거의 부적절함은 잠시 미뤄두고, 사회자가 필요한 이유, 순서를 따라야 하는 이유, 토론의 결과를 구태여 투표로 정하는 이유 등을 학생들 스스로 납득하고 익힌다.


알아야 잘하는 학생이 있고, 직접 경험해야 잘하는 학생이 있는데 이런 방법을 쓰니 대체로 토론의 규칙에 대해선 납득을 하고 넘어갔다.


물론. 아예 처음 배우는 토론이라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5.


재구성은 과목을 가리지 않는다. 체육이라면 기본적인 움직임을 두고 여러 종목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고, 미술의 경우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를 두고 다양한 표현 방법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뭐든. 결국 학생들이 좋아하는 쪽으로 바뀌게 되는 것 같다.


생각 외로 골치 아픈 건 수학이다.


수학 교과의 경우, 생각보다 개념이 아주 촘촘하게 제시되어 있다. 수를 익히고, 연산하고, 도형을 배우고, 수학적 개념을 이해하고, 이런 과정이 학년을 거듭할수록 커진다.


같은 내용을 연달아 배우기에, 수학의 경우는 오히려 복습에 힘을 쏟는다. 아예 근원부터 들어가 자릿값을 가르치고 있노라면, 새삼 수포자가 얼마나 많은지 체감을 하게 된다. 하긴 나조차도 수학을 거의 던지다시피 했었지....


6.


재구성은 참 묘하다. 고생하고 공을 들인 만큼 결과는 만족스럽지만, 모든 부분을 재구성하기엔 시간이 부족하고, 구태여 바꿀 만큼 교과서의 내용이 나쁘지도 않고.


수업 시간을 조정하는 간단한 재구성부터, 아예 교과서를 새로 만들 정도로 화끈한 재구성까지.


그 종류도 정도도 다양해서 그냥 재구성이라고 퉁치기도 어려운 영역.


곱셈 하나를 가르쳐 보려고 필요한 개념들을 생각하자면 머리가 아프다. 단순히 구구단을 외워버릴 수도 있고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지만...


7.


곱셈은 이를테면 덧셈이다. 덧셈을 여러 번 해야 한다. 7단이라면 7을 거듭 더해주는 과정이다.


7+7까지는 간단하다. 기껏해야 자릿값 개념과 받아 올림, 할 수 있다면 암산까지 할 수 있으면 된다.


7+7+7이 되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연산자가 2개인 연산이 익숙지 않을 수도 있다. 응용력이 좋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1을 투입해 1만큼 산출하는 게 기본이니까.


더디거나 느리다면 하나하나 잡아줘야 할 것들이 많다.


8.


결국 이 모든 개념을 알아야 곱셈이라는 것에 통달하고 나아가 수행평가에 성취했다고 평가를 받는다. 물론 이 과정에서 진짜로 이해를 했는지, 문제를 푸는 기술이 는 것인지는 판단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결국 재구성은 필요하고, 이때 교과서는 하나의 기준 같은 역할을 해준다.


터무니없이 이상한 내용은 안되고 담아야 될 것만. 그런데 참 묘하게도 재구성을 반복하다 보면 결국 교과서로 돌아가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나선형인 교육과정처럼, 교과서를 기준으로 빙글 돌다 보니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는 건가 싶기도 하고...


못질한 나사에 연결한 실처럼 묶다보면 결국 못에 감겨 같아지는 것일까.


9.


가르치다 보면 대학에서 배운 것들이 생각보다 터무니없진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학생들은 생각보다도 많이 알고 있지만, 많이 모르기도 하고.


객관적으로 배우다가 구성적으로 배우며, 스스로 생각하다가도 친구에게 배우기도 한다.


오개념도 다양하고 같은 오개념이 퍼져 있기도 하다.


학습지에 막혀있던 배움이라는 틀이 직업 덕분에 많이 넓어져 나도 배우게 됐다.


그런 의미에서 학생들은 게임처럼 강해지고 있구나 싶다. 온갖 강화와 업그레이드를 해야 하는 게임처럼, 성장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있는 거겠지.


어쩌면 미래에는 교과서란 개념이 희미해질지도 모를 일이다. 점점 더 개인화되고 전문화가 이뤄지면 A가 보는 교과서가 B가 보는 교과서와 달라질지도 모를 노릇이지.


하지만 그럼에도 교과서는 필요하다. 학생들의 배움이 헛걸음이 되지 않도록, 일종의 지도처럼. 나에게도 학생에게도 앞서 가본 사람들의 지식은 중요할 테니.


교사라는 말도 있지만. 선생(先生)이란 말도 있으니까.


또 바뀐다는 교과서를 봐야 할 텐데. 읽을 책이 10권쯤 늘었구나. 독서기록장에 교과서은 포함해주지 않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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