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옷이 없구나

by 낙낙

쇼핑 중독으로 한 5년 정도 살다보면 애석하게도 쇼핑의 종말이 찾아온다. 과소비로 은근히 스트레스를 해소하던 내겐 참으로 청천벽력 같은 말이다.


1.


튼튼한 옷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1년 입고 버릴 옷른 쳐다도 보지 않는다. 그 왜, 1달 갖고 있다 팔거면 그 주식은 사면 안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난 길게 보고 옷을 산다.


튼튼한 박음질. 망가지지 않는 원단. 쉬운 세탁 등. 내 기준의 착용가능함이 상대적으로 널널한 옷들을 많이 산다.


그러다보니 최애는 데님이고, 손이 안 가는 것은 린넨이나 울이다. 덤으로 한 4달 입고 버려야할 것 같은 지나친 디자인도 나와는 맞지 않는 옷이다.


2.


흔히 말하는 기본템에 열광하는 사람으로서 튼튼한 기본템이 가지는 역설을 말해보고 싶다. 3년도 입는다는 유핑 같은 브랜드의 반팔티나. 튼튼하기론 둘째라가라면 서러운 유니클로 u의 코튼 반팔티나. 해져도 멋있다는 복각 브랜드의 반팔티나.


모두 일단 사면 적어도 1년 동안 내 옷장에 티셔츠가 하나 생기는 셈이다. 그렇게 산 티셔츠가 20벌이 될 때쯤에 뭔가 잘못 되어 감을 깨달았다.


사실 이것도 좀 늦다. 매년 여름마다 반팔티를 그렇게 시놓고는 이제 와서 많다고 하다니.


사실 뭐... 내 라이프 스타일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면 그런 튼튼한 티셔츠가 많은 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3.


진짜 문제는 내 라이프 스타일이 옷을 살 때와 달라졌을 때 생기지.


한창 출근룩을 사모을 땐 니트가 그렇게 좋았는데, 니트에 청바지 이 위에 입는 피쉬테일만 있으면 사실 봄 가을은 충분히 커버가 됐다.


다만 그러다 자켓에 눈이 돌아가고, 자켓을 사다보니 이너로 입을 니트를 따로 사고, 그러다 보니 뭔가 좀 더워서 셔츠를 사게 되고....


그러다 보니 라이프 스타일이 바뀌었다.


원래 난 철저히 집에서 지내는 수준의 집돌이다. 어느 정도냐면 생활권 내를 1달 동안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잠깐의 산책도 근처 공원에 달에 두번 정도 갈까말까할 수준.


그런데 그런 내가 빠져도 하필 운동에 빠져 버렸다. 무거운 것을 들고, 또 헬스장 까지 가서 옷을 갈아 입기도 귀찮으니 그냥 운동복을 입은채 나가는 날이 많아졌다.


청바지가 쭉쭉 늘어나는 스판 체육복이 되고, 상의는 어째 점점 언더아머가 증식했다.


일주일에 4번 정도 운동을 가니, 그 전엔 매일같이 입었던 니트나 자켓들도... 이젠 사실 필요가 없어졌다. 매일 입지 않으니 그냥 여름용 자켓 하나와 다른 계절에 입을 자켓만 있으면 되고...


오히려 그러다 보니 바람막이를 무진장 사모으게 됐다. CP컴퍼니도 이쯤 처음으로 구매하게 됐다.


라이프 스타일이 직장인에서 생활체육인으로 변화하니... 아 예전같은 탄탄한 티셔츠를 입기가 싫어졌다.


덩치가 커지니 어깨나 등이 끼고, 크게 입으면 부해보이고...퍼포먼스 웨어들은 하나같이 꽉 끼는 옷들이라 아예 오버핏 티셔츠던가, 딱 맞는 핏의 티셔츠가 필요해졌다.


4.


그렇게 내 옷장의 티셔츠가 물갈이가 됐다. 물론 자주 입는 흰티는 냅두고, 프린트 로고티, 빈티지 워싱티 같은 옷들이 사라졌다. 그 자리는 머슬핏이나 기능성 티셔츠들이 채웠다.


옷이 줄어들었는데 불편함은 없다. 어차피 운동복만 입을텐데 뭐....


덤으로 자켓들도 싹 갖다 버리고 정말 필요한 것만 남겼다. 베드포드 자켓, 비오는 여름에 입을 나일론 블레이져 하나. 딱히 불편함은 없다.


어차피 운동복만 입을텐데 뭐...


5.


예전엔 그래도 옷이 순환을 하는 편이었다. 니트에 청바지를 입다보니 아무래도 니트 세탁을 세탁소에 맡기긴 애매해 섬세 코스로 돌리다가 보풀이 많이 올라오기도 했고...


안에 입던 티 색이 변한다던가 해서... 종종 버렸다.


문제는 청바지와 운동복들이다. 안망가진다.


우와 진짜 세탁기에 이틀에 한번씩 빨아도 안망가진다.


운동복이라 대충 빠는데도 안망가진다.


진짜 안망가진다. 요즘 옷 만드는 기술을 이렇게 체감한다.


처음 채워갈 땐 좋았지. 히팅기어. 쿨링기어. 후드집업. 카고팬츠.


새로운 의류를 사니 도파민이 빵빵터지고. 약간의 스타일을 더해줄 바람막이는 든든하기 그지 없었다.


6.


그리고 지금. 옷이 망가지지 않아 버리지 않고 그덕에 옷을 더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차라리 확 늘어나기라도 하면 버리기라도 할텐데... 옷에 딱 맞게 사는 바람에 늘어나도 뭔가 늘어난 것 같지가 않아 곤란하다.


올 나가는건 둘째치고 기능성 의류들은 구멍도 안나고... 스포츠 양말은 왜이렇게 질긴지. 하다하다 이젠 양말도 못사고 있다.


그렇다고 옷을 더 사기엔 이미 생활에 필요한 옷들이 차고 넘쳐버렸다. 필요하지 않은 옷을 사는 것만큼 낭비가 또 있을까.


요즘 바지들은 스포츠웨어인데도 스타일리시해서 참... 곤란하다.


7.


이제 내가 살 수 있는 옷들은, 대체 이런건 누가 입고 다니냐 물어볼 것 같은 화려한 패턴이나 부담스러운 핏의 벌룬팬츠, 1년에 5번 정도 입을 슬랙스 같은 것들이다.


1년에 한 번 옷을 사러 간다는 사람 말을 믿지 못했는데.


아 이러면 진짜 옷을 1년에 한 번 살 수도 있겠다 싶다.


최근 감사제가 열린 유니클로에 들어가서도 마땅히 살 옷을 찾지 못해 패딩만 입었다 벗었다 하며, 고개를 갸웃하다 나온 사람으로서...


내 가장 큰 취미였던 옷 사기를 어떻게 지속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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