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낙낙

뭘 한 것도 없는데 문득 사인한 적 없는 빚이 생긴 것 같은 때가 있다.


1.


인생이란 걸 많이 살아보진 않았지만 난 여전히 사람 만나는게 힘들다. 낯설음이 싫고, 모르는 미지의 세계는 내겐 불편함이다.


이를 모르고 사는 사람이 어딨냐고 하겠지만 때론 익숙함이 주는 안락함이 그리울 때가 있지 않은가.


난 익숙함에 있지 않으면 말라 죽는 연약한 식물이다.


그리고 문득 떠오르는 건 부모님의 얼굴이다.


2.


미생은 아주 오랜 드라마지만 기억 나는 장면이 하나 있다. 뭐더라. 나는 엄마의 자존심이다? 내 고난 길은 누군가에겐 자랑이 될 수도 있고, 내가 그런 사실을 통해 힘을 얻을 수도 있단 점 역시 깨달았다.


그 왜... 일이 힘들면 카드빚을 지면 된다고 하지 않는가.


내가 그토록 사무치던 부채는 한편으론 누군가의 삶이 될 수도 있단 걸 처음으로 느낀 순간이다.


3.


감히 먼저 살아본 것 만으로 누군가의 자랑 거리가 되라는 말은 할 수가 없다. 존재 자체가 빛날 귀한 자식인 모두에게 어떻게 그런 무책임한 말을 할 수가 있을까.


다만 그렇기에 스스로가 떳떳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늘 생각한다. 이 나이 먹고 나한테 해준게 뭐가 있냐는 말은 배부른 소리일테니.


그리고 내가 다른 이들의 가정을 속단할 수 없단 것도 감히 말하지 못하는 이유다. 내 고생길이 좀 높은 언덕이라면 누군가는 절벽을 오르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요즘은 힘들단 말도 가려서 하게된다.


그냥 할만하다. 살만하다. 괜찮다. 이만 하면 좋다고.


제법 진심으로 생각하곤 한다.


4.


물론 내가 가진 이 원죄와 같은 빚이 항상 힘이 되진 않는다. 남들 만큼 행복해져야겠단 생각이 들 때, 남들 만큼 해야겠단 생각이 들 때, 그런데 가끔 그게 너무 힘들 때.


내가 반드시 행복해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참. 인생이 쉽게 불행해지기도 어렵다.


이런 빚은 때론 최후의 보루가 되기도 한다. 아무리 잘못될 것 같아도 차마 넘보지 못하는 남자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고고한 자존심.


양심이라고도 하고, 정의라고도 하고, 가끔은 그냥 야마라고도 불리는 그것이 내가 물려 받은 가장 크고 값진 선물이 아닌가 싶다.


5.


스트레스가 아주 심해지면, 때로 나의 채권자가 생각난다.


아 지금 아빠는 어떻게 했지.


엄마는 어떻게 했지.


이런 걸 떠올리는게 아니라 아주 잠깐 내 몸에 너무나 익숙한 그들의 모습이 보일 때가 있다. 어디선가 나타나 일을 척척 해결하던 아빠도, 어디선가 나를 지켜주던 엄마도.


기끔 내가 된다.


물보다 진한 피란.


6.


문득 빚이란 게 떠오르면. 잠시 지금을 생각하다가 오늘은 상환이 좀 덜 된 것 같단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울며불며 사정하면 나의 너그러운 채권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해준다.


마음의 부채란.


힘들 때마다 별 수 없이 떠오르는 얼굴인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7.


한 해가 지나고 또 해가 갈수록. 마음이 촉박해지는 건 내 빚이 없어져서가 아니라 갚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일까.


시원한 해소일 수도 있지만, 가끔... 그것이 나의 파산이 될까봐 두렵다.


입으로 담고, 차마 말하기도 어려운 아주 긴 이별. 현실감이 없어 당장 슬픔보다도 눈물이 먼저 차오르는 말.


그냥 딱 지금처럼만 행복하면 좋겠는데.


8.


오늘 하루는 다행히 빚을 무리 없이 갚는 날이었다. 무난하고 무던하고 365일 중 300일 정도는 차지하는 그런 날.


무던한 오늘, 문득 전화를 걸면 반길까 아니면 걱정할까.


그냥 오늘치 보냈다고 보내는 일상적인 말이 행복이 될 수 있을까?


기어다니는 것 만으로 1년치를 먼저 갚아버린 기특한 내 조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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