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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nokno Aug 27. 2023

첫 이사

 처음 그곳에 도착했을 때 어린 마음에 부끄럽고 창피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중학교를 가기 전까지 나는 부모님과 할머니와 같이 살았다. 부모님은 맞벌이셨고 나는 부모님보다 할머니와 지내는 시간이 더 길었다. 학원 강사인 아빠는 오후에 나가 자정이 가까울 즈음 돌아오셨다. 엄마는 아침에 등교하는 나와 함께 출근했다가 밤 7시에는 돌아왔지만 오자마자 할머니와 내가 먹을 밥상을 차리는 것이나 집안일에 시달리느라 쉬지 못했다. 그래서였을까? 우리 집안은 다툼이 잦았다. 할머니는 변덕이 잦았고 부리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뭔가 마음에 안 들면 끝날 때까지 소리를 질렀고 당신의 방에 들어가서도 짜증은 계속되었다. 아빠는 말싸움을 하고 나면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엄마는 참을 수 없으면 나를 차에 태우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아오거나 알아듣지 못하는 내게 중얼중얼 푸념을 했던 것 같다. 정말 심할 때는 다 벗어던지고 외가로 피난을 가기도 했다. 

초등학교 6학년,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때 엄마는 내게 다른 곳으로 가서 살 거라고 말해주었다. 아빠는 밖에서 파란색 플라스틱 박스를 가져왔고 집안의 물건들이 그 안에 차곡차곡 담겼다. 나도 박스 하나를 받아 살림살이를 담았다. 언제인가는 이삿짐을 챙기고 있는 부모님을 보면서 할머니가 남김없이 가져가라고 씩씩거리기도 했다. 

대부분의 박스는 이삿짐 회사에 맡기고 우리는 필요한 것들만 챙겨 새 집으로 먼저 향했다. 기억 속에서 차 안은 그렇게 분위기가 좋지는 않았지만 나는 속으로 기분이 굉장히 좋았다. 원래 살던 곳을 떠나 어디로 갈까? 나는 태어나고 자란 집이 굉장히 넓었고 좋은 집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다음에 살게 될 곳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비단 우리 집뿐만 아니라 동네 친구네 집이나 한 번쯤 가본 친척들의 집도 전부 넓고 깨끗했기 때문에 안 좋은 곳 또한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곧 주택가 골목에 차를 세우고 내렸고 엄마가 바로 옆에 있는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머리 너머로 2층짜리 다세대 주택이 보였다. 지금 살고 있는 집보다 더 운치도 있었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나는 열심히 눈동자를 굴리면서 1층과 2층 중 무엇이 더 좋을지 비교해 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2층이 난간 같은 여분의 공간도 있고 현관문에 고풍스러운 장식이 있어 마음에 들었다. 2층이면 좋겠다고 생각한 순간 오른쪽에서 엄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

우리가 살 집은 1층도 2층도 아닌 생각도 못한 곳에 있었다. 대문을 들어오자마자 건물 옆으로 조그만 길이 나있었는데, 콘크리트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그곳에도 집이 있었다. 엄마는 문 앞에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상상했던 것과는 멀어도 너무나 멀어서 나는 충격을 받았다. 물론 반지하와 지하층 집의 존재를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주택가 사이 길을 걷다 눈에 들어온 그곳은 항상 침침한 어둠 속에 싸여있었고 퀴퀴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여기까지 흘러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이따금 TV에서 묘사되는 지하층은 대부분 피곤에 절어 꾀죄죄한 고시생이나 방탕한 아저씨가 사는 곳이었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부정적인 인식도 생겼다. 그런 곳이 이제 우리가 살 집이 된 것이다. 

나는 망연자실했지만 절대 티를 내지 않고 동굴 같은 안으로 들어갔다. 살던 집의 1/3 크기만 한 공간, 바닥 이곳저곳에 죽어있는 바퀴벌레, 벽지를 뚫고 느껴지는 눅눅함.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이질감에 인생 동안 가장 큰 충격을 받은 날이었다. 잠시 후 이삿짐 회사 직원들이 나머지 짐을 옮기며 정리를 도와주었고, 부모님은 짜장면과 탕수육을 대접하며 우리도 같이 끼니를 때웠다. 내 방의 짐은 혼자서 맡았다. 집이 작아진 만큼 방도 작고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나만의 새로운 공간이 생겼다는 점과 그곳을 마음대로 꾸밀 수 있다는 게 좋아서 힘든 것도 모르고 열심히 정리했다. 

 나는 아직 학교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남은 학기 동안 지하철을 타고 다녔다. 겨울 방학까지 며칠 남았을 때 엄마는 친구들과 같은 학교에 가기는 어려우니 작별 인사를 하라고 말해주었다.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모두 이 근처 중학교로 갈 예정이라고 했다. 특히 학교 끝나고 자주 집으로 놀러 갔던 친구가 있었는데, 방학식 날 같이 놀던 다른 친구 한 명과 함께 셋이서 밤늦게까지 컴퓨터를 하면서 놀았다. 어느덧 헤어질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친구들은 종이를 찢어 집 연락처를 적어서 건넸다. 그리고 가방을 챙겨 집을 나가는 길에 잘 지내라고 인사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렇게 마침내 그곳과 완전히 결별하고 새로운 집과 가까운 중학교에 가게 되었다. 은행나무 등굣길이 아름다웠던 그 학교의 환경과 사람들은 전부 처음이었지만 새로운 담임 선생님과 친구들은 친절했고 나를 좋아해 주었다. 그래서 이때 기억은 학창 시절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남아있다.

 엄마는 네 칸짜리 계단 가장자리에 화분을 놓고 길렀다. 주말에 날씨가 좋으면 엄마는 문을 열어놓고 집안 대청소를 했는데, 그 뒤에 화분을 담 위에 올려놓고 물뿌리개로 물을 주곤 했다. 그러면 물이 뿌려지는 방향으로 무지개가 그려지고 물을 머금은 이파리는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한여름에는 옆집에서 자란 은행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우리 집 담을 넘어와 그늘을 지기도 했다. 처음에는 신기해서 사진을 찍었다가 가을이 되어 은행이 무수히 떨어지면 그걸 주워서 구워 먹기도 했다. 담을 타고 넘어온 나무 열매의 소유권도 옆집에 있지만, 열매가 떨어지면 먹어도 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수명산이라는 이름의 뒷산이 있었는데 학교가 그 산을 두른 곳에 있어 산길을 따라가면 교문이 나오는 방향도 있었다. 그러면 일반 도로로 가는 것보다 10분은 더 빨랐기 때문에 평일에는 매일 산을 올라 학교를 갔다. 산세가 험하지 않아서 주말에도 아침에 부모님과 산책을 하러 가기도 했다. 

 한 번은 수업이 끝난 뒤 반에 좋아하는 아이가 우리 집에 가보고 싶다며 따라온 적이 있었다. 창피한 마음이 들었지만 집은 꽤 멀었기 때문에 설마 거기까지 오겠어란 생각이 들기도 했고, 또 그동안 그 애와 둘이서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설레서 그러라고 했다. 그런데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하는 사이 집이 보이기 시작했고 속으로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모습만 보여주고 그 애에게 인사해서 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초록색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우리 집 문이 열리며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나는 눈앞이 깜깜해졌고 부끄러움과 창피함, 그리고 동시에 엄마에게 미안함과 죄책감이 밀려들어왔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엄마에게 인사를 하고 뒤를 돌아서는데 그 애는 이미 치마를 휘날리며 정신없이 도망가고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친구네 부모님과 마주치는 게 부담스러워서 그랬겠지만, 당시는 내 집을 들켰다는 사실에 꽂혀서 하루종일 우울해했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뒤 부모님께 그때 일에 대해서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 왜 그리로 갔느냐고. 이전에는 이사를 가면서 다녔던 중학교가 엄마의 모교이기도 하고 전통으로 유명하기도 해서 근처로 갔나 보다고 생각했고 엄청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엄마의 대답은 딴판이었다. 당시 급하게 집을 구해야 했는데 너 초등학교 졸업도 해야 하니까 통학할 수 있는 가까운 곳 중에 골라서 갔다고. 어린 시절 낭만은 깨졌지만, 그곳에서 산 몇 년은 인생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행복했던 시기였다. 그때 만났던 친구들과 사람들 그리고 평화로운 분위기는 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볕과 물을 충분히 주었고, 덕분에 나는 세상에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지금까지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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