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오랜만에 읽었다. 톨스토이가 쓴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라는 책이다. 처음 알게 된 것은 올해 참가하고 있는 독서 모임의 이번 달 선정도서였기 때문이었다. 본래 나는 서점에도 잘 안 가고 책을 찾아서 읽지는 않는 성격인데, 반대로 이렇게 누군가가 추천해주면 읽고 난 뒤 제일 신나서 열변을 토하는 성격이기도 해서 금방 책을 사서 설렁설렁 읽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부터 페이지가 홀랑홀랑 넘어갔던 것은 아니다. 처음 몇 페이지를 넘겼을 때 ㅡ으레 고전 소설 앞부분이 그렇듯 고리타분한ㅡ작가의 초상화와 함께 일대기가 써져 있었다. 곧바로 ‘너무 어려워서 재미없으면 어떡하나’ 란 생각이 들었는데 그 이유는 최근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을 읽으면서 머릿속으로 정리가 안 되는 답답함에 고생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 문장을 읽으면서부터는, 물론 러시아식 이름이 연달아 서너 명이 나올 때는 진절머리가 났지만,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서 읽기 시작했다. 대화는 거의 없고 이건 이랬다 저건 저랬다 하는 문장만 끝없이 나와도, 엄친아 이반 일리치의 일대기가 몇 페이지에 걸쳐 나오고 하다못해 카드 놀이조차 잘한다는 이야기가 나와도 마치 소꿉친구의 옛날 이야기를 듣는 양 킥킥거리면서 읽었다.
중반부를 넘어가면 이야기는 이반 일리치가 서서히 죽어가면서 하는 생각들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부정과 분노, ‘혹시 기적처럼 낫지 않을까?’ 처럼 아편 같은 잠깐의 환희, 그리고 그 뒤에 속절없이 찾아오는 절망, 그리고 죽음의 문턱에 섰을 때서야 드는 깨달음과 후회, 마침내 수용하는 모습이 겪어보지 않은 것임에도 세밀하게 피부로 와닿았다. 이반 일리치는 죽기 직전에 삶에서 중요한 것들은 진실됨과 사랑, 우애, 그리고 자유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보면 부끄러워진다. 언젠가 어디선가 남들에게 못되게 굴고 미운 말을 했던 것들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만약 그때 내가 먼 미래에 죽을 거라는 사실을 생각하고 있었더라도 그렇게 했을까? 여전히 화를 내고, 겁주고 욕했을까? 아니, 우린 모두 우연히 신비한 이곳 지구에 태어나 잠시 다녀가는 여행자들이다. 바라보는 것들을 사랑만 하기에도 짧은 인생인데 실수하면 좀 어떤가. 미숙하면 좀 어떤가.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차분히 들여다보려고 하면 보이는 마음 속의 것들에 더 관심을 가져보고 싶다.
나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여행을 시작한 지 30년 조금 넘은 초보다. 최근 부쩍 드는 생각이 나는 참 잘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글을 쓰고 있으면 참 못 쓰는 것 같아 섧고, 책을 읽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싶어 서평을 찾아보고 비교하면 나는 글을 반쪽밖에 못 읽는 것 같고, 슬픔에 빠진 사람을 위로하고 있으면 그깟 위로도 제대로 못한다 싶다. 가장 마음이 아픈 것은 말을 잘 못할 때다. 나는 말이 느린데다 문장이 중간중간 끊기기도 하고, 하던 말을 중간에 아예 멈추기도 한다. 심할 때는 0개 국어가 될 정도다. 그 이유는 말하고 싶은 문장을 생각한 뒤에 말하려는 순간에 갑자기 단어가 덜컥 걸려서다. 속으로 이 단어는 별론데. 혹은 이것보다 더 좋은/돌려 말할 수 있는 단어가 없을까 고민하다 말이 갈피를 잃어버리고 만다.
세심한 습관이라고 포장할 수도 있지만 막상 그렇게 고민하고 나온 것들이 항상 정답만은 아니었다. 나는 그런 생각이 아닌데, 내 생각과 다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면, 그리고 그걸 들은 상대가 깜빡 오해하면 그때부터는 내 손을 영영 떠나가버리고 말아 괴롭다. 이따금 다행히 재미있는 해프닝으로 끝날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조막만 한 단어 하나가, 문장 때문에 영영 돌이킬 수 없어 추억으로 남기도 한다.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조금 더 생각하고 말했더라면 하는 일들, 이제는 주워담을 수 없는 것들. 내 존재의 미숙함이 자신이 아닌 다른 이에게 상처로 남을 수 있다는 사실은 굉장히 무섭고 두려운 일이다.
다행인 것은 아직 바로잡을 기회가 있다는 것. 이반 일리치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야 깨달은 것을 나는 삶의 반을 넘기기도 전에 알았다. 그가 이제껏 주어진 모든 것을 망쳤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을 때 나는 오늘부터 죽음을 가까이 두고 살아보려 한다. 중요한 것은 마음, 글을 잘 못 쓰더라도 진실된 마음을, 말을 잘 못하더라도 사랑하는 마음을,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담아 살아보려 한다. 아침에 세운 계획조차 밤까지 지키지 못하는 날이 많지만 그럼에도 삶의 단추는 하나씩 채워져 간다.
그것이 유년 혹은 청년 시절 이반 일리치가 가지고 싶었던 ‘품위’ 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