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니스의 구시가지와 라스카리궁

by knok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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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너머로 지중해의 햇볕을 받으며 눈을 뜨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축복 중 하나이다. 커튼을 끝까지 제치고 창문을 열면 상쾌한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들어와 방안을 휘저으며 졸음과 몽롱함을 쫓아버린다. 나는 짐을 챙기고 아래로 내려가 간단하게 차려진 빵과 커피를 마셨다.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백인이거나 흑인이었다. 그들은 각자 삼삼오오 테이블이나 소파에 앉아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다시 느꼈고, 완벽한 이방인, 완벽한 고독에 빠진 상태에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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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에 발견한 아름다운 거리들

짐을 챙긴 뒤에 나는 한국어로 ‘성의 언덕’이라는 뜻인 Colline du Château로 향했다. 그곳은 니스의 광활한 해변과 햇볕이 내리쬐는 도시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마세나 광장에서 걸어가면 20분 정도밖에 안 걸리지만, 무시무시한 높이의 계단과 언덕을 지나야 하므로 혹시 짐이 있다면 근처 수하물 보관소에 맡기고 가는 것이 좋다. 활기찬 분위기의 기차역과 광장에 비해 길은 한적하고 조용했다. 인도에 늘어선 건물들도 햇볕 아래서 졸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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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세나 고등학교의 풍경. 구글 맵에도 아름다운 외관으로 좋은 리뷰가 많다.

가는 길에 ‘Lycée’ 라고 음각된 커다란 석조 기둥이 보였다. 그 주위로 비슷한 양식의 건물들이 하나의 공간을 이루고 있었다. 찾아보니 그 건물은 고등학교였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고등학교가 있을까? 현관에 세워진 상아색의 석조 아치는 본관까지 이어져 작은 회랑을 이루고 있었다. 회랑의 지붕 모서리는 마치 파도가 치는 것처럼 유려한 곡선으로 이루어져 기품이 있었다. 양쪽 기둥의 여백에는 월계관 같은 느낌의 나뭇가지가 그려져 있는 것이 인상 깊었다. 내가 동서양과 고금을 통틀어 과거의 건축물들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다. 기술적으로는 당연히 현대의 건물들이 더 뛰어날지 모르나, 정성적으로는 과거의 건물들이 가진 섬세함이나 정교함을 따라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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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건널목을 건너면 직사각형의 넓은 공원이 나온다. 공원 안에는 잔디가 깔려 있고 나무들이 가지 끝에 싱싱한 잎을 뻗고 있다. 사람들은 공원 안에서 산책하고, 햇볕을 쬐고, 놀이를 하기도 한다. 한쪽에는 해양도시답게 돌고래 모양을 한 나무 미끄럼틀이 있다. 평지에는 10대 무리가 이인삼각 비슷한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아이들은 웃으면서 서로의 손을 붙잡고 합심해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벤치에 앉아서 그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어린 아이들이 아닌, 중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공원에서 뛰노는 것을 언제 본 적이 있는가 싶었다. 나조차도 그러기는커녕 20대 초반까지 게임에 빠져 피시방에서 살다시피 했으니. 그래서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이고 다른 사람의 살에 부딪는 일들이 어릴수록 더욱 소중하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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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스의 구시가지로 들어가는 입구와 골목 풍경

공원을 지나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니스의 구시가지가 나온다. 척 봐도 아주 오래된 아치문과 계단에 앉아 쉬고 있는 노인이 나를 반겨준다. 조금 지저분한 바닥과 좁은 골목, 들여다보면 칠이 벗겨지고 금이 가 있는 색색깔의 건물들, 창문과 함께 활짝 열려 있는 나무 덮개, 발코니 난간에 걸린 여러 가지 모양의 풍경들, 건물 사이로 나부끼는 번팅 플래그, 길가에 서서 수다를 떠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보인다. 비좁은 골목에서 두어 사람 지나갈 공간만 남겨 놓고 테이블을 늘어놓고, 그곳에 마주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면 반드시 야외에서 식사하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느껴질 정도다. 그 밖에도 조그만 액세서리가 올려져 있는 테이블이며 온갖 화려한 색깔이 가득한 옷이 걸린 행거가 이곳저곳에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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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을 나오면 작은 광장이 반겨준다. 다른 골목들하고도 속속 연결된 광장은 마치 해가 뜨면 동네 사람들이 모이는 사랑방 같다. 해가 강해지는 정오에 맞추어 일찌감치 파라솔이 펴져 있었고, 사람들은 그 아래서 먹고 마시고 있었다. 광장 한쪽에는 생트레파라트 대성당이 바로크의 위용을 자랑하며 우뚝 서 있다. 내부도 외면만큼이나 웅장하고 화려함을 자랑하지만, 나는 안에 들어가 볼 생각은 하지 못하고 지나갔다. 다만 인상 깊었던 것은 성당의 벽에 1차 세계대전에서 죽은 전사자의 이름이 적힌 명단이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그동안 내 안에 들어있던 종교에 관한 편견들이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대신 그들이 본래 추구하려고 했던 바를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절대적인 것 앞에서의 겸허, 사람에 대한 사랑과 베풂, 신념을 가지고 저항하고 맞설 용기... 나는 이 뒤로도 프랑스 곳곳의 성당을 방문하고 비슷한 기분을 느꼈고, 성당에 대해 일종의 경의를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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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카리궁 정문으로 들어가면 보이는 광경

이곳 광장으로 연결된 골목으로 들어가 보면 흥미진진한 것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액세서리나 도자기 등을 파는 가게부터 니스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의 아틀리에가 줄지어 서 있기도 하고, 옛날 귀족들이 살던 궁을 박물관으로 개조해 전시하는 곳도 있다. 내가 발견한 곳은 그런 박물관 중 하나인 라스카리궁이었다. 이곳은 17세기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궁으로 침실이나 응접실 등 실제로 귀족들이 생활했던 흔적들이 남아 있고, 태피스트리와 오래된 악기가 전시되고 있는 곳이다. 직원에게 표를 건네고 들어가자, 곧바로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한 게임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천장에는 붉은색으로 천사와 그리스식 기둥 무늬가 그려져 있었고, 계단 곳곳에 엄숙한 얼굴의 흉상들이며 천사 조각상들이 놓여 있었다. 햇빛이 건물 내부로 구석구석 들어오지 않는 탓에 누군가 계단을 오르내리면 그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고 일렁였다. 해가 떠 있는 오후에도 이럴진대 밤에는, 그것도 일직선으로 비추는 조명 기구가 아니라 횃불로 밝혀놓았을 옛날에는 얼마나 괴상한 형체들이 사람들을 겁먹게 했을지 절로 상상이 되었다. 아마 유럽의 전래동화나 소설 속에 나오는 괴물이나 유령들은 대부분 이런 곳에서 탄생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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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되어 있는 다양한 악기들
C72482DE-4ACF-455D-9485-D503D547DEB2_1_105_c.jpeg 궁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도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계단을 걸어 올라 안으로 들어가면 궁전과 함께 억겁의 시간을 품고 있는 유물들을 볼 수 있다. 다양한 형태의 류트와 바이올린, 거대한 트럼펫, 외관이 나무로 제작된 피아노와 하프 같은 고악기부터 철제 갑옷과 장갑도 보였다. 한편, 평범한 생활의 흔적이 남아 있는 방도 있었다. 벽에는 접시 모양의 액자가 걸려 있었고 그 안에는 귀족들의 초상이 그려져 있었다. 그들은 각자 비싼 드레스와 털 망토가 달린 갑옷을 입고 근엄한 자세로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 모습이 현대의 셀피와 다름이 없어 보여 우스꽝스러웠다. 저 시절에는 남자가 파마 가발을 쓰고 여자가 올백으로 깔끔하게 묶어 올린 것이 유행이고 멋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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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은 17세기 풍으로 지어졌고 맞은편에 있는 건물은 18세기 풍으로 지어져서 비교해볼 수 있다는 점이 재미있다.
02C247A5-0A5E-4BC0-B7C9-ECE4E81C9C51_1_105_c.jpeg 당시 남녀 귀족들이 입은 듯한 옷과 침실

의전용 침실이라는 이름을 가진 방은 안쪽에 화려한 붉은 꽃무늬로 가득한 침실이 있었다. 천장에는 머큐리가 프시케를 올림포스로 데려가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직원의 말에 의하면 이 시절의 사람들은 신화와 밀접하게 연결된 삶을 살았고, 신들이 천장 너머 하늘에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기 위해 그렸다고 한다. 들으면서 마치 종교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가톨릭이나 이슬람 종교인들에게 항상 하느님이 함께하듯이, 17세기의 귀족들은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이 자신들과 함께하고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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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을 나오면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도 과거의 유물, 건축물들과 공존하며 살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 니스에는 현대에 지어진 건물이 거의 없어 보인다. 몇십 년 혹은 몇백 년이 지난 건물들이 계속해서 보수를 거치며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관광객들은 늘 새로운 스마트폰과 노트북을 가져와 사진과 영상을 찍고 넷플릭스를 보겠지만, 사실 도시는 어느 순간 시간이 멈춘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사람들도 더 이상의 문명을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필요한 것은 무한한 태양 빛과 지중해의 파도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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