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누리누리 Aug 08. 2024

완벽할 날들에게

영화 <퍼펙트 데이즈>(빔 벤더스, 2024)를 보고

        


‘완벽한 날들’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영화를 봤다.


그 주인공은 사회적으로 완벽하지 않다고 여겨지기 쉬운 노동으로 일상의 생계를 해결한다. 그 생활에서 마찬가지로 완벽하기만은 어려운 날들을 보낸다. 다만, 어떤 순간마다 필름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는다. 일렁이는 하늘과 흔들리는 나뭇잎 같은, 잔잔하고 무료하게 거듭되는 일상 속의 눈부신 순간들. 사진들은 머잖아 찢기거나 상자에 간직된다. 혹은 버려질지 말지 정해지지 않은 채 보류된다.


그의 마음에 특히 깊게 남은 빛과 그림자는 꿈으로 돌아온다. 버려져서든, 지켜져서든. 현실감이 지워진 이미지는 아름답다. 꿈에서 깨어난 그는 그토록 아름다운 꿈을 꾸며, 또 꿈에 젖은 하루를 산다.


그렇게 영화가 끝났을 때, 내 안에 남겨진 완벽함은 ‘아름다움’이라는 느낌에 더 가까이 번역될 수 있었다. 단지, 완벽하지는 않은 아름다움. 결코 완벽해질 수 없을 아름다움. 그런데도 필사적으로 아름다움을 취하려 하는 날들. 고르고 고른 아름다움에 취할 수 있는 날들. 둥실둥실 들뜬 기분의 날들.


완벽한 액자에 흠집을 낸 순간을 겪고 나면, 그는 그 자국을 봉합할 수 있는 다른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낸 뒤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전반적으로 마음에 안 드는 액자의 한구석만이라도 자기 색깔로 채워내려는 힘을 가진 그의 태도가 미더워 따라 웃었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지켜내는 미덕이라 생각했는데, 어쩐지 미소가 반복될수록 점점 웃으며 지켜보기 힘들어졌다. 어떤 장면에 다다라 그가 무언가 크게 견뎌내기 위해 웃고 있다고 느껴졌을 때는, 화면으로 걸어 들어가 가만히 말해주고 오고 싶었다.


웃지 않아도 괜찮다고.


정말 그래도 좋을 것 같은데, 네가 뭐라고 그의 감정에 간섭하려는 내가 불편했다. 내게 화가 났다.


한 주 전에 쓴 글에 나타난 친구와의 갈등 관계에서, 지금까지도 잘 정리되지 않고 있는 부정적 감정을 꽤 예쁘장하게 다듬어냈던 문장들이 다시금 떠올랐다. 나는 그 글이 부끄럽다. 그 글이 싫다.


마음은 영 어렵고 잘 모르겠는데, 쉽게 쓰인 문장들이 싫다.


내가 진심을 담았던 말들을 옮겼을 뿐인데도, 옮겨진 곳에서 너무도 그럴듯해진 말들이 부끄럽다.


그 진심에는 갈등을 쉽고 매끈하게 닫아버리고픈 마음도 있었으니까. 그 갈등이 마음에 더 깊이 들어오면 내가 너무 세게 넘어질 게 분명해서, 재빨리 뛰쳐나오려는 마음으로 화해의 말을 꺼내버렸다.


괜찮을 거야, 다.


다가올 나의 고통을 덜기 위해 걔가 당장 겪고 있는 고통 앞에서 일부러 멀어지고 싶은 마음으로. 


우리는 괜찮을 거야, 가 아니라 나는 괜찮을 거야.


그걸 어떻게 안다고. 한 치 앞도 모르면서. 결국 이 글까지 쓰게 될 만큼 벌써 보름째 괴로운데도,


전에 비하면 꽤 멀쩡하다고 웃어넘기는 내게도 말하고 싶었다. 차라리 울던가. 안 괜찮아도 괜찮아.


삶을 아름다운 사진첩처럼 편집하는 영화도, 아름다운 글로 편집한 나도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돼.


결국 영화가 불편했던 까닭은, 내가 나의 완벽한 (듯한) 날들 앞에서 끊임없이 작아지기 때문일까.


완벽함, 근데 그게 대체 뭔데? 중학생, 혹은 고등학생 때였나. 과목명도 기억나지 않는 어느 수업에서 한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예쁨과 아름다움을 칭찬하는 차이에 대해. 외면은 예쁘고 내면은 아름다운 거니까, 우리에게 더 아름다워져야 한다며. 이제는 얼마간 당연해져 좀 납작하게도 들리는 그 말이 내게는 이상할 정도로 크게 들렸다. 예쁜 것도 많은 세상이지만, 그날부터는 괜히 예쁘다고 말하면 안 될 거 같아 아름다운 걸 더 잘 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아름다움을 잘 느끼는 사람. 그 감각이 마치 일종의 재능이거나 노력해야 성취할 수 있는 이상향처럼 느껴졌다. 선생님 말씀처럼 아름다운 사람이 되려면, 내가 마주하는 세상을 먼저 아름답게 여길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 같았다.


십수 년이 더 지나고, 『좋은 감각은 필요합니다』라는 책을 읽었던 작년의 한 모임에서도 어떤 감각을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자동 응답기처럼 여전히 비슷하게 말하게 되었다.


아름다움을 찾을 줄 아는 사람.


아름다움이라면?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상황에서도 가까스로… 찾아지는……? 그걸 해낼 수 있는 마음을 가진……?


그리고 그 횡설수설에 꾸준히 발이 걸려 휘청이는 중이다. 저게 뭔 뜬구름 잡는 소리람? 그러니까 그 감각은 해석의 영역에 있으니 실체가 중요치 않다는 거였는데. 설령 아름답지 않아도 아름답다고 해석될 수 있는 것. 당신이 어떻든 내게는 아름답다고 읽히는 것. 내가 아름답다고 믿을 수 있는 것.


지난 일 년간 내게는 그 가능성이 정말로 훨씬 중요했다. 처음으로 살고 싶어진 삶이 소중해지자, 이미 곳곳이 아름답지 않은 삶을 아름답지 못한 상태로만 두기 싫었다. 계속 살아 있을 이유를 만나고 싶었다. 이왕이면 많이. 이유 하나가 망가진다고 삶도 바로 쉽게 부서지지 않도록, 헨젤과 그레텔이 뿌리고 간 빵 조각들처럼 사방에 두려 했다. 그렇다면 작년의 내게 아름답다는 말은 삶의 다른 말인지도 몰랐다. 살아도 된다, 살아도 좋다, 살 수 있다, 살고 싶다, 살 것이다, 살아야 한다…… 혹은 미래의 다른 말일 수도 있었다. 미래가 있다, 미래를 꿈꾸고 싶다, 미래에 있고 싶다, 미래에도 있을 거다…… 그러므로 그건 희망의 다른 말이었고. 희망이 필요하다, 희망을 그러모아야 한다, 희망의 부스러기를 밟고 가로채는 진창에서도 희망을 놔버리면 안 된다, 꼭 붙들어야 한다, 그런 희망이다, 그럼, 희망이라는 미래를 현재로 가져올 수도 있다, 그 현재에서 미래를 살 수 있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말들을 희망차게 떠들 때. 어떤 문제를 위해 싸우겠답시고 지나치게 안온한 온도의 노래만 지어 부를 때. 나로부터 아무것도 깨뜨리지 못하는 노래만 나올 때. 싸우는 사람들의 통증과 눈물 속에서 나야말로 자꾸 어떤 아름다운 틈을 찾아내려 할 때. 그 아름다움에 울게 되는 내가 역겨워질 때. 자꾸만 아름다움을 느끼는 나를 경계한다고, 아름답다는 말이 조심스럽다고 말하는 자리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어 혼란스럽다고 말해야 할 때. 내가 아름답다고 얘기해주는 이들의 생각과 달리 내 일상은 자주 지옥일 때. 천국은 없고 아름다운 지옥만 분분한 내 삶을 이해할 수 없을 때. 순식간에 낯설어지는 미래라는 감각 앞에서 번번이 뻗어버리고픈 때가 이어진다. 헨젤과 그레텔이 도착한 달콤한 과자집에서 그들을 잡아먹힐 위험이 기다리고 있었듯, 내가 찾아 나선 아름다운 미래의 문 앞에서도 현재의 내가 딱 버티고 서 있다. 미래를 보며 현재를 사는 내가 아니라, 여전히 하루하루 넘기기도 벅찬 현재를 사느라 미래까지 볼 여유가 없는 내가, 나를 집요하게 의심한다.


진짜로 확신할 수 있어?


이거저거 다 건너뛰고 앞서나가는 건 아니고? 무작정 멀리 보려는 건 아니고?


너의 미래에 현재가 있는 게 맞아? 현재를 사는 게 맞아? 현재부터 충분히 살고 있어?


그렇게 나와 내가 엎치락뒤치락 다툴 때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도 다르게 읽힌다. 오늘이 엉망임에도 불구하고 내일은 좀 더 나아지리라고 기대하며 낙관하거나, 내일이 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오늘과 다르지 않으리라고 비관하는 날들 가운데서, 어쨌든 현재에 그대로 머물지는 않으려는 불구함의 힘에 대해서는 의심하기 싫은데, 그 불구해지려는 가능성의 자유로움을 믿고 싶은데.


‘아름다움을 본 죄’(오동필)를 위해 싸우는 이들이 있고, 그건 아름다움의 죄와는 다르다. 아름다움엔 죄가 없으니까. 하지만 어떤 아름다움의 내용엔 죄가 있을 수 있다면? 나도 오랫동안 깜깜했던 세계를 비집고 들어온 아름다운 햇빛을 보게 되었고, 다시는 깜깜했던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돌아가기 무섭다. 예전보다는 환해진 내 세계가 다른 깜깜함도 비춰줄 수 있도록 좀 더 환해지면 좋겠다.


다만 나는 내게 줄곧 잘못을 묻게 되는, 물어야 할 까닭이라면, 해는 떠오르고 질 시간이 필요한데, 다시 떠오르기 위해 해가 지는 건 당연한데도, 내가 언제부턴가 지려는 해를 붙잡고 억지로 끌어올린 채 더 무리한 빛을 쥐어짜는 것 같기 때문일까? 그래서 내게서 나오는 빛을 받아들이기를 두려워하는 걸까? 내가 내는 빛을 싫어하는 걸까? 내가 내는 빛이 뜨겁지도 밝지도 않은 야광별 따위나 닮았다고 느끼는 걸까? 어둠을 위해 빛나는 게 아니라, 어둠을 저당 잡아 함부로 빛난다고 느끼는 걸까?


나는 왜 나를 사랑한다고 느끼지 못할까? 왜 이제야 겨우 살고 싶어진 나조차도 최선을 다해 공격하는 걸까? 


돌아가기 무섭다면서, 언젠가는 돌아가라는 듯 압박하는 걸까? 그 누구보다도 내가 내게?


내게는 영영 그 자리만을 허락하려는 것처럼? 네가 뭔데? 주어진 자리 따위가 다 뭔데?


빛나기 위해서는 그림자도 있을 수밖에 없잖아. 단지 그 그림자를 그림자로만 두지 않으면 되잖아.


빛과 그림자란 그럴듯하게 아름다운 말을, 진심으로 살면 되잖아. 치열해지면 덜 부끄러울 거잖아.


왜 네 그림자에는 이렇게 매정해지게 되었어.


왜 너만 그래. 왜 늘 너만 네게 그래.


이 영화를 언젠가 다시 보게 된다면, 내 엉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 영화 속 완벽한 날들이 지켜내려는 마음을 더 그대로 봐주고 싶다. 적어도 누군가의 완벽해지고 싶다는 꿈을 미워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살고 싶다고, 좀 살아보겠다는 빛을,


이렇게라도 좀 살아가면 안 되는 거냐고 울 수 있는 마음을 다 꺼뜨리고 싶지 않다.






.

.

.


#신여성 작업실 #소리내어글쓰기 워크숍에서 썼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