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만금신공항 기본계획 취소소송 7차 재판 공청을 다녀와서
글을 쓰기 위해 다시 다큐멘터리 영화 <수라>(황윤, 2023)를 본다. 여전히 어떤 장면에 다다르면 재생을 멈추게 된다. 대법원까지 가게 된 새만금 사업계획 취소 청구 소송 상고심의 최종 선고 공판이 있었던 2006년 3월, 살 곳을 잃은 조개들이 법원 복도까지 와 있다. “죽음의 방조제를 새만금의 갯벌로”, “다 함께 살자”는 현수막과 “생명과 조화했던 새만금 갯벌을 살려내라”는 구호. 어떤 어민은 어구를 바리케이드처럼 딛고 수많은 카메라 앞에 서 있다. 잠시 뒤, 새만금 사업의 문제를 공개적으로 논할 수 있는 법정에 감사를 표하며 법치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사법부에 정의로운 판단을 부탁하는 최후 변론에, 냉담히 내려지는 선고. “이상과 같은 이유로 이 사건 상고를 기각하고 상고 비용은 원고의 부담으로 판결합니다.”
그렇게 원고는 패소한다. “역사가 분명히 심판할 겁니다. 양심 있는 사람은 그럴 수 없습니다.”, “말이 안 돼! 말이 안 돼!”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너머로 들려오는 “새만금 만세!”, 이윽고 막혀가는 바다.
수라를 말하며 내내 담담히 웃음 짓던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의 오동필 공동 단장도 처음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울었어요. (…) 그냥 눈물이 나더라고요, 집에만 있는데도. 많이 울었어요, 그때. 그 울었던 슬픔이 한 몇 년 지나니까, 또 잊어버리더라고요. 잊어버리고, 그 모습도 아름답더라고요. (…) 몇 년이 지나서 갯벌이 염습지화되고 (…) 매립하지 않고 준설하지 않은 상태도 굉장히 아름답더라고요. 그러니, 물을 기다리는 거예요. 물이 들어오면 갯벌로 되었다가 물이 나가면 염습지로 되었다가 (…) 근데 그 모습도 (…)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이 모습도 아름답다. 제발 매립만 하지 않으면.”
그리고 약 스무 해가 지난 2025년 2월, 다가오는 5월에 또 한 번의 최종 선고를 앞둔 새만금신공항 기본계획 취소소송 7차 재판의 구두 변론이 시작되었다. <수라>에서 보았던 어떤 얼굴들이 시간을 건너뛴 것처럼 여기에도 있다. 그 얼굴들을 보면 시간의 변화가 느껴지는데, 법정 분위기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방조제에 막혀 흐르지 못하는 바다처럼, 나는 지금 흐르지 않는 시간에 들어선 것 같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판사의 얼굴. 어떤 말을 듣고도 반응하지 않고 시종일관 마르게 굳어 있는 그 표정을 보고 있으면, 감정 따위 전혀 중요치 않다고 학습한 법의 죽은 심장을 보는 것 같다. 재판 방청을 다닐수록 법이 자신하는 중립을 믿기가 어려워진다. 믿기 두려워진다. 더군다나 행정 처분에 의해 권리를 빼앗긴 이들이 그 처분을 달리 요구하기 위해 모이는 이곳 행정 법원에서, 결국 그들을 여기까지 오게 만든 것이 바로 그 법이니까. 기울어진 땅을 붙들어 간신히 미끄러지지만 않고 살아가도록 두는 법이 뒤늦게 그 땅을 바로잡아주리라는 기대가, 이제는 너무나도 순진한 바람에 불과하다는 걸 안다.
다만, 그럼에도 법 앞에 삶이 있다고 믿는 이들이 아직 있기에. 저들도 그 삶에 연결된 동료라는 걸 어떻게든 잊지 않으려 하는 이들이 있기에. 법 뒤로 삶이 아주 밀려나지 않도록 애쓰는 이들이 있기에. 원고 편의 법무법인 자연 변호사는 수십 분 발표 분량의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해 왔다. 가덕도신공항을 반대하는 자리에서도 그를 보았다. 또 다른 신공항의 안전성을 토론하던 자리에서도 그를 보았다. 법령을 오남용하여 신공항을 강행하려는 자리마다 그가 공부한 법이, 그가 삶을 구하고자 배웠을 법이 같이 버텨주고 있었다. 국가와 정부를 상대로 가장 승소하기 어려운 원고들을 기꺼이 돕고자 하는 그의 분명한 목소리를 들으면, 법에 다시 티끌 같은 희망을 걸게 되었다. 삶의 곁에 서려는 법을 상상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저 순진한 믿음이 아니라 내가 직접 목격하고 느낀 누군가의 삶이다. 그 삶에 묻은 땀이고 눈물이다.
원고 측의 변론이 끝나고 피고 국토부 측의 변론이 이어졌다. 어쩐지 간결하고 무성의한 그 변론을 들을수록, 이 소송이 7차까지 오게 된 흐름을 이해할 수가 없다. 소송이 길어질수록 더 설득력 있는 내용으로 수정하고 보강하는 원고와 달리 국토부의 변론은 매번 비슷하다. 이날도 갑자기 사업 기본계획 개요를 되짚었다. 7차라는 차수가 무색해질 만큼. 이제 와서. 애초에 그렇게 계획된 사업이므로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러니까 그 계획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방금도 지적했던 원고의 변론이 공허해지도록, 시간을 원점으로 돌려버렸다. 어쩌면 그것이 그들이 휘두를 수 있는 유일한 무기 같기도 하다. 듣고도 듣지 않은 척하기. 들을 의지가 없음을 무례하게 드러내어 상대가 말하려는 의지를 빼앗기. 그러나, 그보다도 그들이 할―수 있는―말이 그뿐이기 때문일 거다. 법정 밖에서 습관처럼 지어내는 거짓말이 여기서는 통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거기서 일어나는 간극이 얼마나 모순적이고 우스운 것인지, 스스로 모르지 않을 거다.
한 마디라도 더 설명하고 덧붙이기 위해 간절해지는 원고. 프레젠테이션이 비교적 짧다는 점을 일부러 부각할 만큼 여유 부리는 피고. 변론의 양과 내용만으로도 어느 쪽에 더 권력이 있는지를 느낄 수 있고. 양측의 변론이 다 끝나고 최종 선고 기일을 조정하려는데, 원고 측에서 마지막 추가 발언 기회를 구한다. 곧이어 원고를 대표해 새만금신공항백지화공동행동의 김지은 공동위원장이 4천 자가 넘는 변론문을 읽기 시작한다. 초반부터, 그는 울먹인다. 최대한 객관적이고 논리적으로 들릴 수 있는 어조로 무장했던 앞선 변론들과 정반대로 그는 가장 여린 감정을 내보인다. 진심이라는 마음을 꺼내기를 전혀 주저하지 않는다, 냉혹한 법정의 세계를 너무나도 잘 아는 그가, 이 안에서 가장 소외되고 배제되기 쉬운 목소리로 묻는다.
“생명이 살아가는 곳이 갯벌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흰발농게가 춤추고 도요새가 날아다니는 그곳이 갯벌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수라갯벌에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생명이 이 소송의 증인입니다. 법적으로 규정된 갯벌이냐 아니냐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곳에 실제로 살아가는 생명들 그 자체입니다. (…) 저어새, 황새, 검은머리갈매기, 도요, 흰발농게, 퉁퉁마디, 이 수많은 이름 하나하나가 바로 새만금신공항 계획 부지의 이름입니다. 그러니 부디 증인들이 있는 수라갯벌로 와주십시오. 오셔서 국토부가 육화되어 아무도 없는 것처럼 주장하는 드론 영상과 사진이 아니라 증인들이 살아있는 현장으로 오셔서 직접 보아주십시오.”
누군가는 그 존재조차 모를 수 있을 어떤 작은 삶의 이야기들. 사실은 전혀 작지 않은데도 인간이 주인처럼 행세하는 세계에서 더욱 가려지고 지워지기 쉬운 이야기들. 지극히 인간적인 법정에 설 수도 없는 삶들이 증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무렵에는, 곳곳에서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따라 울다가 앞에 앉은 두 남자가 대놓고 고개를 젓거나 산만하게 낙서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고 순식간에 눈물이 식었다. 내내 뒤에서 그들을 지켜보며 그들이 피고의 편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옷차림에서도 이미 드러났다. 정장을 입은 경우는 대체로 국토부다. 변론에는 최선을 다하지도 않으면서, 갖춰 입고 나올 여유는 있는 거다. 차려입을 시간이 있는 거다. 반면에 우는 이들의 옷에는 각이라는 게 없었다. 현장에서, 농성장에서, 기자회견장에서 늘 곧은 각을 바로 세우며 신공항을 철회하라고, 수라갯벌을 보존하라고 강경하고도 단호하게 외치던 이들이 그 순간에는 어떤 각도 지키지 못한 채 투명하게 무너져 내렸다. 감정이라는 공기가 통하지 않아 꽉 막혀 있던 법정에 별안간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법정에 숨구멍이 생긴 거 같았다.
그리고 그건 내가 아는 그들의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기자회견에 앞서 서로 안부 물으며 반갑게 인사 나눌 때, 혹은 일정을 마치고 식사할 때 마주하게 되는 다정하고 유쾌한 눈빛들. 우스갯소리 같은 일상이 오가는 대화들. 현장의 동지이기 전에 함께 살아가는 동료인 이들과 있으면 때때로 현장이 몹시 안전하다는 착각이 일어나기도 했다. 같이 있는 동안에는 신기할 정도로 어떤 불안이 흐려지고 흩어졌다.
최근 농성장에 다녀온 날도 그랬다. 이제는 전북환경청 앞에 있는 새만금신공항 부동의 및 철회 촉구 천막농성장은 오랜 시간 세종청사 국토부와 환경부 앞에 있었다. 우리는 점심시간에 맞춰 나오는 관계자들을 향해 피켓을 든다. 신호등이 켜지면 횡단보도를 건너 식당으로 가는 이들의 뒷모습을 지켜본다. 그렇게 무리가 다 지나가고 나면, 선생님과 짧은 수다를 떨었다. 농성장 앞에서 이렇게 웃어도 되는지가 걱정될 만큼 즐거웠다. 서로 좋아하는 음악을 얘기하다가 송소희의 자작곡을 틀어두고 리듬을 타기도 했다.
그러게. 그렇게 노래 하나에 맘껏 기뻐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은데. 아끼는 노래에 마냥 행복한 시간만으로도 충분히 흘러갈 수 있는 삶이라면 좋을 텐데. <수라>에서 최종 선고 공판 장면을 돌려볼 때마다 그때 그곳을 잠식했던 거대한 슬픔이 아주 어렴풋하게만 느껴졌는데, 이날 가장 차갑게 방어적인 법정에서 아무것도 감추지 않으려는 울음소리들이 다 그치도록 머무르며, 비로소 조금 더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최종 선고 결과와 관계없이, 지난 이 년간의 소송과 지난 이십 년간 싸워온 시간의 결과와 관계없이, 이렇게 하나의 목소리를 듣고 하나의 얼굴과 하나의 울음으로 만나기 위해 오늘을 살아왔을 거라는 걸.
<수라>에서 널리 알려진 오동필 단장의 ‘아름다움을 본 죄’라는 말은 내 삶을 크게 뒤흔들었다. 아름다움과, 본다는 것과, 죄라는 세계를 둘러싼 모든 생각이 다시는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날의 취소소송 재판에서 나는 또 하나의 아름다움을 목격해 버린 거 같았다. 가장 고되고 아프고 두려운 마음들이 모인 순간, 말로는 다 설명이 되지 않는 아름다움을 감히 느껴버렸다는 죄를 저지른 것이다.
어쩌면 내가 섣불리 단정하고 판단했을 수 있다. 나는 아직도 여전히 이곳에 대해 모르는 게 많으니까.
그렇지만. 행여나 내가 아주 완벽히 틀려버렸다고 하더라도.
아름답다는 거. 삶이 아름답다는 거. 아니, 설령 삶이 아름답지 못해도 아름다운 마음을 살아내려는 거.
그 깊은 다짐을 훔쳐본 죄를 치르려면, 나도 어떻게든 살아 있어야만 용서를 구할 수가 있을 거 같다.
그래서 죽지 않으려고 더 애쓰고 있는 것도 같고. 마찬가지로 누군가 혼자 견디다 사라지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문밖을 나서게 된다. 어떤 삶을 또 잃어버리면, 이 어딘가의 삶도 같이 부서져 버릴 거 같아서.
덕분에 나도 지금 여기 살아 있으니까. 거기서 소리내 울고 숨죽여 눈물 삼키던 모두의 삶을 기도한다.
당신과 우리의 영원한 동지이고 동료인 수라갯벌의 모든 삶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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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여성 작업실' 의 <소리내어 글쓰기 : 가장 작은 이야기> 워크숍에서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