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거기의 희망

2025. 3. 19.

by 김누리누리



나는 나를 갖가지 이유로 싫어한다. 예컨대, 내가 이르게 우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르게 울고 이르게 그치는 인간. 아니, 이르게 그쳐야만 한다고 느끼는 인간. 그래서 오래 우는 것을, 오래 우는 나를 싫어하는 인간. 우는 나를 수치스러워하는, 수치스럽게 우는 인간. 나의 눈물에 끝없이 수치심을 느끼는 인간.


작년부터는 좀 못 울게 되었다고 자주 생각했다. 전보다는 덜 울게 되었다고. 오랫동안 바랐던 일인데도, 막상 그렇게 되니까 그것대로 겁이 났다. 어딘가 고장났거나 크게 망가진 거 같은데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최근 들어서야 서서히 알아가고 있다. 못 울었던 게 아니라, 안 울어야 할 이유가 더 크고 많다.


적어도 아직은 울지 말아야 할 이유가. 오래전 창작 수업에서 들었던 얘기 중에 정언명령처럼 내 몸이 되어버린 말과 닿아 있기도 하다. 작가가, 독자보다 빨리 울면 안 된다는 거. 작가의 글이 독자의 감정보다 먼저 울어버리면 안 된다는 거. 작가 혼자 울어버리지 말고 독자가 울 시간을 기다려줘야 한다는 거.


전에는 그것이 읽는 이에게 울음을, 눈물을 강요하지 말라는 말로만 들렸다. 지금도 물론 그렇지만, 요즘에는 다른 말로도 같이 들린다. 이를테면 내 글을 읽어주는 이들을 취약한 독자로만 여기지 말라고. 이 말을 들어주고 이 얘기를 궁금해하고 이 삶에 연결되려는 관계들을 취약하게만 오해하고 짐작하지 말라고. 취약한 삶들을 써내야 한다는 마음에 급급한 나머지 어떤 것이 그저 취약하다고만 단정짓지 말라고.


너르고 단단한 심장을 닮은,

어딘가에 먼저 있었던 얼굴들을 떠올리면 쉽게 울 수 없어졌다.

그 얼굴들이 견뎌온 과정과 시간을 헤아리면 아직은 성급하게 울 때가 아니라는 깨달음이 왔다.


최근 다녀온 인터뷰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인터뷰이가 답변하다가 눈물을 보였고 나도 엉겁결에 따라 눈시울을 붉히게 되었다. 서로 그대로 울어버리지 않고 잘 넘겼기에 아주 잠깐의 순간이었는데도, 그 기억이 오래 떠나지 않았다. 처음 인터뷰를 공부하던 무렵부터 언젠가는 일어날 수 있을 일이라 생각했다. 그게 그날일 줄은 몰랐지만. 그래서 그날이 오면 어떻게 대처하겠다는 계획이 없었다. 작은 결심만 있었다. 인터뷰이의 말 앞에서 먼저 울지 말기. 혼자 막 울어버리지 말기. 내 감정에 치우쳐 인터뷰이의 마음을 방해하지 말기…… 쓰고 보니, 꼭 필요한 눈물조차도 틀어막겠다는 발악 같다.


결정적으로 우리를 울렸던 건 2021년도에 개봉했던 영화 <돈 룩 업>의 마지막 장면이다. 그 영화처럼 지구 종말이라는 깊은 절망 속에 있더라도, 마지막을 앞두고 사랑하는 이들과 손잡고 희망을 말할 수 있다면 충분하리라는 조심스러운 고백과, 그 희망을 믿고자 하는 말들이 이어졌다. 그 인터뷰는, 인간이 파괴한 곳에서 인공습지가 되어 스스로 되살아난 어떤 습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한 자리였다. 그렇게 살아난 습지가 또다시 사라질 위험에 처했기 때문이다. 훨씬 더 교묘해진 파괴를 익혀버린 세상 끝에서.


인터뷰의 녹취록을 정리하다 보면 글로 옮겨 기록하기 위해 골라낸 말들만큼 좋지만, 공개적으로 싣기는 어려운 말들이 있다. 그날은 그 순간들이 다 그랬다. 오늘은 글을 완성하기 위해 추가 취재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 서서 그 습지에 한 번 더 다녀왔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돈 룩 업>을 봤다. 개봉 당시에 봤을 때는 영화 초반의 “내 할아버지처럼 자다가 평온하게 죽고 싶다”는 두려운 소망에 가장 압도되었던 거 같은데. 오늘은 인터뷰의 여파 때문일까. 희망을 다짐하는 모든 장면이 마음을 크게 울렸다.


“선택권은 언제나 있어요. 그중에 좋은 선택을 하면 되는 거예요.”

“잃는 것도 있어야 얻는 것도 있다지만 우리가 잃는 것은 시간 뿐이기를.”

“이 어두운 시기를 사랑으로 위로하시고, 무엇이 닥쳐오든 당신의 담대함으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가장 인상깊게 다가온 장면도 달라졌다. 곧 죽을 걸 알면서도, 나와 조금 더 함께 할 생각이 있냐고 먼 미래를 기약하려는 마음들. 더 오랜 사랑을 약속하는 마음들. 당신이 좋다는 마음을 숨기지 않는 마음들.

이번 인터뷰에 대한 기록을 정리하는 내내 희망이라는 게 대체 무엇일지를 계속 생각하고 있다. ‘희망’, “어떤 일을 이루거나 하기를 바람.” “앞으로 잘될 수 있는 가능성.” 반면에 욕망도 다 바닥났고, 자꾸만 어딘가로 꺼져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나 하면서 지내(는 것도 아니고 거의 꾸역꾸역 버티)는 요즘…… 어쩌면 그 답을 찾지 못해서, 인터뷰이의 눈물에 눈물로 반응했으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가 바라보는 희망에 나란히 응답할 말이 지금의 내 안에 없어서 글을 개운하게 끝내지 못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인터뷰를 다녀오고 나면, 그 기록까지 끝내기 전에는 꺼져버릴 수 없으니 어떻게든 더 살아 있자는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나는데…… 그조차도 희망은 아니라서. 억지로 찾을 수도 없고, 어딨는지도 알 수 없다. 미래가 너무 깜깜하고 막막해서 거기 있고 싶은지도 자주 모르겠고. 실은 그전에 확 사라지고만 싶은데.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솔직하겠어요?

생각해 보면 우린 정말 부족한 게 없었어,

그렇지?

생각해 보면 그래.”


완벽하게 사라진 미래를 향해 가장 투명하게 고백하던 목소리들을 듣고, 다만 가만히 돌아보게 되었다. 2021년의 나는 오늘 같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었을까. 이러한 미래도 있으리라는 가능성에 희망을 걸 수 있었을까. 그 무렵의 내가 바랄 수 있었던 가장 나은 미래라고는 정말로 평온한 잠 같은 죽음뿐이었는데. 이제는 비슷한 듯 다른 미래도 희미하게 그려진다. 함께 평온히 잠들고 싶은 얼굴들이 있다. 어차피 영원히 잠들게 될 거라면, 마지막으로 어떤 꿈을 꾸고 싶냐고 최후의 안부를 나누다 가고 싶은 얼굴들. 이미 매일의 안부가 되어주는, 그래서 죽고 싶다고 징징대다가도 진짜로 죽지는 않을 거라고 눈물 닦게 만드는 얼굴들, 을 되짚다 보면, 모든 게 다 끝나버린 곳에서 어쩐지 허전하지만은 않을 듯한 미래가 그려진다.


그날 내게 희망의 한 조각을 나눠준 인터뷰이에게, 나도 그나마 최근에 가장 의지할 수 있었던 얘기를 건넸다. 제 친구에게서 들었는데요. 아는 활동가 선생님이 계시는 집의 베란다 너머로 큰 산이 보인대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그분의 선배가 더 오래 전의 투쟁 끝에 지켜낸 산이었대요. 하지만, 아마 대부분이 모르겠죠. 그냥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저 산은 원래 저기 있었다고만 생각할 거예요. 어떤 시간을 모르는 이들에게 어떤 과정은 영원히 지워질 거예요. 아무리 애써봤자 남는 게 없다고 보일지도 모르고요.


그렇지만, 그래서 제가 더 하고 싶은 말은요.


지키고 보니 고작 제자리일지라도, 그마저도 잃고 나면 무섭고 아프게 조용해질 테니까요.

어떤 시간을 알고, 기억하려는 이들에게는 그 영원한 적막만큼 캄캄하고 쓸쓸한 게 없을 테니까요.


굳이 더 얻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잃지 않기 위한 싸움들 속에서,

더 많이 가지려는 싸움이 아니라, 더는 가질 게 없다는 싸움들 곁에서,

이길 목적의 싸움이 아니라, 이기고 질 필요를 무너뜨리려는 싸움들 앞에서,

지금 가장 현실적으로 꿈꾸고 싶은 희망이 있다면, 이보다 더 나아지길 바라는 미래일 수도 있겠지만 그냥…… 어떤 것들은 지금 이대로일 수 있으면 좋겠다. 당장 그간의 노력이 전부 지워지더라도. 덕분에 먼 훗날 그 습지가, 그 갯벌이, 그 바다가, 그 섬이, 그 삶이 아름답다고 여전히 말할 수 있다면. 대단히 더 좋아지지 않아도 좋으니 지금 거기 있는 삶들이 그때도 거기 있으면 좋겠다. 지금 거기 있는 삶이 나중에도 거기 있는 미래가 전혀 고되지 않을 수 있도록, 오늘이 몹시 평온한 꿈 같은 날들이었으면 좋겠다.


어떤 미래는

영원한 지금이고 과거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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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여성 작업실'의 <소리내어 글쓰기 : 가장 작은 이야기> 워크숍에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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