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뮤지션 서울진출 후기
부산 사람들은 서울과 비교하는 말을 들으면 입을 삐죽삐죽한다. 나도 서울에서 공연을 하는 게 그렇게 중요할까 겉으론 말했지만 한번씩 서울 팀을 만나거나 아는 뮤지션이 서울서 공연하는 걸 보면 내심 궁금한 마음이 있었다.
부산에 낯익은 뮤지션들이 많아지고, 음악 애호가들도 알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매번 같은 공연장,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게 반가운 한편 갑갑하기도 했다. 활동영역을 넓히고 싶다는 생각이 차츰 들었다. 새로운 사람들이 내 음악을 어떻게 들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8월 부터 서울 공연장을 몇 군데 알아봤다. 대부분 영상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했는데, 30여년의 역사를 가진 라이브 클럽 빵은 직접 오디션을 보러 오라고 했다. 수요일 공연 마치고 오디션이 있다해서, 공연 마치기 30분 정도 전에 도착했다. 객석에는 대여섯 명 정도가 있었다. 서울이나 부산이나 관객 없는건 매한가지구나 싶어 기대했던 마음이 미지근해졌다. 오디션은 오픈 마이크와 비슷하게 진행되었다. 오디션 보는 뮤지션들이 서로 응원하고, 클럽 직원들도 즐겁게 감상했다. 며칠 뒤 대표님 통해서 자세한 설명없이 바로 공연 날짜를 보내주셨다. 미리 잡힌 일정 때문에 먼저 제안하신 날에는 못하고 9월에 하기로 약속했다.
이어 빵 옆에 있는 홍대우주정거장에도 공연이 잡혀서 몇 일간 서울에 다녀오기로 했다. 오가는 시간, 교통비 생각해 간 김에 공연 몇 개 더 하고 와야지 싶어 권눈썹 빌려드리는 이벤트를 열었다. '안동권씨 귀한집 딸내미'라는 별칭은 스형과 나눴던 대화에서 따왔다. 첫인상이 도도해보인다는 말을 종종 듣고, 마음에 안드는 게 있으면 짚고 넘어가고 싶어하는 셩격이라 사람들이 불편해 하는것 같다고 하소연했는데, 스형은 '안동권씨 양반집에서는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 있으면 그럴 수 있다.'고 위트있게 받아주었다. 그 말이 재미있어서 기억하고 있었다. 미스터선샤인에 애기씨가 혼자 다니면 주변 사람들이 다 도와주듯이, 귀한집 딸내미로 소개한 권눈썹이도 서울에서 많은 분들의 은혜를 입었다.
이벤트는 성황리에 이루어져 사흘 간 네 군데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다. 이쯤되니 진짜 서울진출 느낌이 났다. 공연 몇 번 하는건데 뭐가 이렇게 벅적지근한가 궁금했는지 서울친구들도 여러명 연락와 공연에 오기로 했다.
공연 전 날, 내꿈씨가 필요한 게 있으면 사준다고 해서 가벼워 이동할때 좋은 통기타 케이스를 얻었다. 하드케이스에 넣고 갔으면 공연장 도착하기도 전에 팔이 나갔을 것이다 ㅠ_ㅠ 첫번째 공연은 영도에서 가영님이 연결해주신 카페이응에서였다. 기차 내리니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등에는 기타를 메고 왼손엔 캐리어, 오른손엔 우산을 받치고 버스를 탔다.
즐거운 기분만 가득해 관객이 몇 명일지, 분위기는 어떨지 등 깊이 생각하지 않았는데 카페에 도착하니 평일 오후 1시반에 비를 뚫고 오실 분이 많진 않겠다 싶었다. 사장님이랑 가영 둘 앞에서라도 재밌게 하려고 맘 먹었는데 조금 있으니 몇 분이 카페에 들어오셨다. 기운내서 몇 곡을 부르고 초대해주어 감사하다고 인사도 나누었다. 한 관객분은 공연이 끝난 후 밖에 나가셨다가 다시 돌아와 꽃다발을 선물해주시기도 했다. 영도 선플라워 경숙언니가 이후에 합류해 수다떨다가 1인 매니저가 되겠다며 향통네 집까지 차로 태워주셨다.
두번째 공연장소는 라이브 클럽 빵이었다. 오랜 세월 쌓아온 바이브 덕분인지 친구네 시골 할머니 집처럼 아늑했다. 그날은 마침 광주 아시아 마켓에 참여하러 온 태국 치앙마이 아티스트의 공예품을 판매하는 번개장터도 함께 열렸다. 함께 공연하는 '선과 영' 팀과 치앙마이 분들이 인연이 있어 초대하게 되었다고. 치앙마이에서 활동하는 뮤지션 chahamo가 그날 헤드라이너를 장식했다.
내가 첫번째로 노래하고 이어 모스크바 서핑클럽에서 피아노 멤버로 활동하는 규리님이 다음 순서로 나왔다. 곡도 좋고, 연주도 좋고, 이미지도 귀여우셔서 부산에서 활동해도 인기가 많으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과영은 지난해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수상한 실력파 뮤지션 커플인데 딱 네 곡만 부르는데도 포스가 장난 아니었다. 여유에서 나오는 감동이 있었다. 나는 언제 저렇게 되나 부럽게 봤다. 이 날 고주망태를 댄스버전으로 처음 선보였는데 친구 말로는 춤은 괜찮았는데 너무 쑥스러워해서 아쉬웠다고. 그래서 다음날은 좀 더 내려놓고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세번째 공연은 홍대우주정거장에서 진행하는 '로켓 라이브'였다. 이 날은 전 직장 동료들과 대학시절 밴드 선배들, 아프리카 댄스 선생님 시비리, 영도 룸메 나현이도 왔다. 매드 피아니스트 옥진주 선생님과 함께 무대에 오르니 더 힘이 났다. 첫곡부터 당당하게 춤추고 사람들이 박장대소 하는 걸 보고 안심했다. (웃기는 걸 좋아해서... 가수말고 역시 개그로 가야할까?) 진주 선생님의 피아노연주에도 큰 박수가 나왔고, 둘이서 호흡맞춰 매력을 많이 보여주고 왔다.
마지막 날은 전 직장 동료 솜팀장님이 추천하고 꼬막이 연결해준 비건식당 베지스에서 있었다. 마침 시비리 선생님이 베지스 사장님인 보혜, 나영과 친해서 그곳에서 점심을 먹으며 미리 분위기를 살펴봤다. 친구의 친구네 공간이라 생각하니 좀 더 편했고, 근처사는 친구들이 모여서 같이 저녁먹고 노는 느낌으로 가볍게 놀다가 헤어졌다.
부산은 밴드 음악이 강세라 클럽은 대부분 밴드가 공연하기 좋게 세팅되어 있다. 그래서 클럽=밴드공연 으로 머리에 박혀있었고. 나는 솔로인 대신 퍼포먼스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을 많이 만들어야한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 그런데 서울 클럽은 삼삼한(?)음악이라도 공연할만한 곳이 꽤 있었다.
우주정거장에는 힙합, R&B 스타일 뮤지션도 있었다. 클럽 빵도 내가 갔던 날에는 모두 어쿠스틱 음악을 하는 분들이었다. 부산 클럽에서는 밴드 사이에 어쿠스틱 한 팀 정도 끼어서 공연하는 경우가 많은데, 참 보기드문 광경이었다. 그만큼 서울은 소프트한 음악을 하는 사람, 혹은 솔로 뮤지션이 많고, 수요가 좀 있겠다는 근거있는 추론으로 이어졌다. 그러고보면 부산에서 오래활동한 뮤지션들은 포크나 발라드처럼 소프트한 음악을 하는 분들이 드물다. 대부분 메탈이나 록음악하는 분들이다.
서울에는 초심자가 설 수 있는 자리가 많았다. 클럽마다 오픈 마이크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15-40분까지 러닝타임도 다양해 자기에게 맞는 공연을 찾기 쉬웠다. 공연에 참여하려면 관객을 최소 몇 명을 데려와야한다는 규정이 있는 곳도 있었고(정한 인원을 넘지 못하면 아티스트가 그 만큼 입장료를 내야한다). 소정의 참가비를 받는 곳도 있었다. 인디 공연장에서 관객을 모으는 일이 쉽지 않으니 아티스트들에게도 어느정도 책임을 지우는 것이다. 부산에서는 아티스트가 돈을 지불하고 공연하는 경우는 본 적이 없어서 처음에는 야박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공연장에 실제로 가보니 조금 이해가 되었다. 장비관리가 잘 되어있고 음향도 깔끔했다. 사운드 잡는 감독님 따로, 관객을 맞이하는 사장님이 따로 계신 점도 좋았다. 공연의 퀄리티를 유지하고, 관객을 확보하기 위한 방법을 각 클럽마다 사정에 맞게 구하는 것 같다.
재미난 사람이 많이 오가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이벤트, 연결도 많이 생긴다는 것도 느꼈다. 클럽 빵에서 열린 '치앙마이 번개마켓'이 원래는 예정에 없었는데 이후에 치앙마이 아티스트들이 뭉치면서 만들어졌다. 치앙마이 뮤지션 chahamo는 명함을 건네며 치앙마이에 오면 자기 공간에서 공연해도 된다고 하셨다. 생각지도 않게 치앙마이에도 연결이 되었다!
클럽마다 실력있고 클럽의 색깔과 잘 맞는 뮤지션에게 지속적으로 공연기회를 마련해준다는 점도 발견했다. 우주정거장에서는 오프닝게스트가 있었는데 아마 여러번 공연해서 사장님과 꽤 잘 아는 분인 것 같았다. 빵에서도 정기적으로 공연하는 분들이 많았다. 나도 집에 내려오는 길에 10월 공연 일정을 잡아도 되는지 대표님에게 연락이 왔다. 부산에서 이런 경험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아쉬운 점도 있었다. 먼저 공연한 뮤지션들이 자기 공연이 끝나자 다음사람 공연은 보지않고 공연장을 빠져나갔다. 아마 일행을 챙기느라 그랬던 것 같은데, 한 팀 공연 끝날때마다 우르르 빠져나가니 결국엔 마지막 뮤지션을 보러 온 사람들만 남았다. 공연 끝날때까지 나가지 말아달라고 강제할 순 없겠지만 좀 정없게 느꼈다. 이제까지 부산에서 경험한 공연에서는 대부분 한 공연에 오르는 뮤지션들은 끝까지 다 보고 자리를 떴다. 회식을 같이하는 경우도 자주 있다. 뮤지션들과 공연에서 만나 교류하고 정보도 얻을 수 있는데, 이런 분위기라면 고립되는 느낌이 들 것 같다.
한 번 경험한 것으로 서울씬의 장단점을 다 알았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내가 느낀 바로는 뮤지션으로서 활동하기에 부산과 서울, 두 지역의 장점은 확실히 나눠진다. 부산에 살며 여백과 바다를 즐길 수 있는 덕에 창작할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기는 것 같다. 그리고 공연기회가 비교적 적어, 아티스트들 끼리 서로 커뮤니티를 이루는 분위기가 잘 형성되어 있는 것 같다. 서울에 산다면 솔로 뮤지션으로서 설 수 있는 무대를 많이 활용할 수 있을 것이고, 비슷한 장르의 음악을 하는 분들과 교류할 기회가 더 생길 것 같다. 앞으로 서울에서도 종종 공연하면서 아티스트로서 내가 갈 수 있는 또 다른 길이 있는지 살펴보려한다.
이번에 서울에서 얻은 가장 큰 성과는 아무래도 다양한 사람들과 연결인 것 같다. 공간 사장님들, 멋있는 아티스트들과 인연이 생겼고. 영도 항해자에서 만난 친구들, 공연 덕에 몇 년 만에 만나게 된 선배들, 옛 동료들과 다시 연락하게 된 것도 큰 선물이다. 친구들에게 응원을 많이 받아서 음반작업에 대한 욕심이 더 생겼다. 다음엔 공연 외에도 교육이나 기획으로 서울에 방문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공연장에서 만난 관객들 반응을 보니 어떤 지역이든 관객들은 다 똑같이 느낀다는 걸 알았다. 좋은 음악에는 고개를 끄덕이고, 지루할땐 딴청피우고. 그래서 미지의 장소에서 공연하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줄었다. 다음엔 어디로 가볼까? 대구? 아니면 제주? 아니면 치앙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