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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눈썹 Nov 22. 2022

인도 여행기_꿈으로 도망친 날

2019년 3월 22일 인도 7일째 물갈이하며 꿈속에서, Varanasi


발이 잘렸다. 잘린 발은 초콜릿 같았다. 왜인지 나는 괜찮았다. 다만 엄마가 알면 속상할 것 같아서 걱정이 되었다. 그와중 내 직업에 대해 고민했다. 원천기술을 갖지 못한 자. 기획한 프로그램을 선보였지만 참여한 사람들은 썰렁하다 생각했다. 나같은 일을 하는 게 과연 필요한지 생각했다. 절뚝이며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정장을 입고 어디로 들어갔다. 평소 좋아하던 일러스트 작가님이 종이로 가리고 있던 내 발 쪽을 가리켰다. 그냥 보여줬다.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다들 잘린 신체부위 하나쯤 갖고있지 않으시냐며.  꿈에서 깨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취한듯이 자지는 않는다. 그냥 피로해서 절로 잠이 들고 적당한 시간에 잠이 깬다. 외국인 여자라는 신분이 새삼스레 실감난다. 인도의 수많은 카스트들보다 훨씬 낮은 계급으로 느껴진다. 상점에선 마담마담 하지만 붐비는 길에서는 허리를 만지고는 미안한 표현도 없이 낄낄대며 지나간다. 화가나고 확 면박을 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고 공격해도 별로 상처입히지 못하는 사람이어서 좋다.




2019년 3월 23일 인도 8일째, Varanasi

콩순이가 바라나시는 오래 머무는 걸 추천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다른 지역으로 옮겨갈까 물었을때, 나는 솔직히 얼른 떠나고 싶은 마음이 80프로였다. 20프로의 생각은 바라나시를 제대로 보지 못했고, 나쁜 인상만 가지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바라나시 기차역에 도착하고 다음 여정의 기차표를 구한후 우리는 콩순이가 2년전에 묵었던 숙소로 이동했다. 오토바이를 개조한 툭툭을 타고 갔다. 툭툭은 정해진 기본요금이 없는 것 같다. 가이드북에 대략적인 금액이 나와있지만 그대로 준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적힌 금액보다 두배 정도는 부르셨다. (이제 조금 감이 왔는데 바라나시에서 툭툭으로 10분 거리는 약 90루피, 20분 거리는 약 200루피다.)


콩순이가 부탁한 거리에 툭툭이 우리를 내려줬다. 호객하는 툭툭아저씨들보다 더욱 정신 없는 대로변이었다. 또다시, 차와 소와 개를 헤치고 바닥의 쓰레기와 똥을 피하며 걸었다. 어께에는 10키로짜리 짐을 이고지고 골목을 몇번이나 헤맸다. 우리가 지나는 골목은 가로등이 따로 없었다. 너무 까맣고 어둡고 사람들도 계속 쳐다봐서 어쩐지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가, 금방 마음이 누그러질 것 같지 않아서 자포자기하게 되었다. 짐을 풀고 유명한 화장터를 갔다. 강에서 사람을 태우고, 릭샤꾼은 흥정하고, 방송국에서 나온 사람들은 아주 진지하게 촬영에 임했다. 뭐라고 하나로 설명할수가 없어서 자꾸 상황을 이야기하게 되는데, 난생처음 경험하는 충격이었던 것 같다. 불편해서 피하고 싶은 순간이 잦았다. 그렇지만 시간은 또 흘러 오늘은 어느덧 마음껏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마지막날이 되었다.


어제 꿈에서는 수학공부를 다시했다. 고등학교 졸업하며 깨끗이 접었던 분야의 공부다. 사실 수학 외에도 대부분의 공부를 깨끗이 포기했다.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공부하던 세월이 있었는데 그런 간절한 시간들이 어느덧 나에게는 엄청 낯선 것이 되어버렸다. 회사의 일은 열심히 했지만 간절했던 것은 아니었다. 회사에서 마지막의 나는 일을 잘 하는 방법을 고민하기 보다는 다치지 않는 방법만 생각했다. 약속한 일을 제대로 마무리하면서 스트레스를 덜 받는 방법을 생각했다.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에서 지겨워서 자포자기하는 내가 좀 더 기운이 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다.


어제 같은 꿈은 낯익지만 새로운 내용이었다. 수학문제를 풀었고, 대학을 가야되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다시 한번 최선의 노력을 해서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앞으로 내 삶에 변명을 하지 않게 배수진으로 나를 몰아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한 쪽에서 떠오른 걱정은 서울에서 생활해야한다는 것이지만 뭐 방학마다 내려오지 하는 생각을 했다. 내 지능의 한계를 시험하듯 머리속의 남은 에너지까지 끄집어 내던 시간이 있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살 수 있으니까 이젠 편하게 살아야지하며 생각않고 지냈다.


그렇지만 꿈을 깨자마자 생각이 났다. 나는 이미 대학까지 졸업했다는 것. 수학문제를 풀지 않아도 외롭고 마음이 가난한 20대를 보냈다는 것. 이제와서 대학에 가기에는 돈도 돈이고, 지금 내 상황에 맞지가 않다. 공부를 할거면 이제는 대학원에 가는 것이 맞는 수순이지. 어쨌든 나는 음악을 쭉 하지도 않고, 미술을 쭉하지도 않고, 수학을 더 파지 않고, 완전히 비영리나  상업으로 가지도 않고 여기에 왔다. 어떻게 보면 타협을 반복한 길. 다르게 보면 나에게 맞게 지혜로운 판단의 결과로 걷게된 길.


20대 중반에 남미를 여행할때만 해도 내가 다시 장기로 해외여행을 가게될 줄은 몰랐다. 가더라도 파트너와 갈 줄 알았지. 앞으로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결혼한 내 모습을 상상했던 20대였으니. 지금 생각은 언제라도 가고싶은만큼 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그렇지만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그렇게 자주 들 것 같지는 않다. 나는 돌아갈 곳이 있고, 그 곳에서 나의 방을 잘 가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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