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희는 언니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시시한 속 사정까지 나누는 그 친밀한 관계란 진희에겐 너무나 특별해 보였다. 진희는 자신의 시간 전부를 친구들에게 주어도 그녀들에게선 모든 시간을 돌려받기 어려웠다. 시간의 일부분 그중에서도 친구들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의 조각은 자매들이 차지했다. 아무리 상냥히 대해도 그 조각만은 얻을 수 없었다. 애초부터 약속된 그녀들의 공유 분은 진희의 것이 될 수 없었다.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각별한 사랑에 진희는 소외되곤 했다.
어느 대학에 지원할지 무슨 과를 전공할지 고민에 놓였을 때 친구들은 꽤 구체적으로 진로 방향을 설정해 갔다. 기꺼이 나침반이 되어준 언니들 덕분이었다.
진희는 성실했지만 꿈이 없었다. 몰려다닌 친구들이 가는 길 그대로 가면 될 줄 알았건만 대학 진학을 앞두고 무리는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진희가 처음으로 맞닥뜨린 당혹스러운 순간이었다. 선택을 해야 했다. 어느 한 명의 길을 따라갈지 누구와도 동행하지 않는 자신의 외길을 가야 할지 말이다.
열아홉 살, 고3 수험생의 타이틀을 던지던 때 외길을 택했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막상 다다른 그곳에 불안해했던 만큼의 불안이 있진 않았다. 그 경험이 진희를 조금 단단하게 해 주었고 혼자서 고민하고 결정하는 일들을 쌓아가던 날 중 그녀는 한 ‘시’와 만났다.
대학 3학년 때다. 전공필수였기에 어쩔 수없이 들어가 앉아 있던 강의실이었다. 심심한 외모의 교수님만큼이나 지루하기 짝이 없는 강의였다. 취업을 향한 대학 4학년의 모습은 분주해 보였고 실질적인 대학생활의 마지막인 3학년도 그리 여유롭진 않았다. 해야 할 게 많은데 한가하게 노닥이는 것 같은 영시를 세시간씩 듣고 있어야 하는 건 고역이었다. 그 소중한 3학점을 위해 참아내던 중 만난 ‘시’다.
선택의 기로에 서는 일은 잦은 경험치가 쌓인들 매번 어려웠다. 그 자리에 서고 싶지 않았다. 섬세한 산책로를 걸어가듯 곳곳에 놓인 친절한 표지판에 의지하고 싶은 순간들이 많았다. 차라리 정해진 시작과 끝이 있길 바라기도 했다. 선택 앞에 차려진 것이 썩어나는 미래라면 그러한들 되돌릴 수 없을테니 말이다.
그러나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이란 시를 읽고 진희는 친절한 표지판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있었다.
<가지 않은 길>
단풍 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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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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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이 지난 후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지으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
그때부터 진희의 머릿속에 이 시가 맥락 없이 떠오르곤 했다. 그리고 지금 우연인지 상황 때문인지 시가 입안에서 중얼거리며 따라다녔다.
‘나에겐 선택의 길이 있어. 많은 이들의 발길이 닿은 길이 꼭 내 길일 필요는 없어. 내가 선택하면 그것이 내 길이 되는 거야. 그 길 앞에 무엇이 있든 길 끝에 다다르고 나면 그저 한숨 한번 짓고 말면 되는 거야’
진희는 수술과 미혼모라는 두 길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했다.
진희는 고민과 동행하며 어느 때보다 업무에 집중했다. 혼자인 듯 보이나 혼자가 아닌 그녀는 전처럼 불평과 낙담으로 자신을 깎는 일은 그만두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태아는 그녀의 비워져 있던 공간을 찬찬히 채우고 있었다. 그녀만 아직 자각하지 못했을 뿐 쓸모없는 불안에서도 해방되고 있었다. 그녀 안의 생명은 그녀이기도 했기에 태아의 성장은 진희를 충만하게 했다.
진희는 출, 퇴근길마다 생각에 생각을 더하길 반복했다. 하지만 태아의 노력이 이미 판세를 기울이고 있었다. 더는 지하철 안에 풍기던 냄새도 역하지 않았다. 바라던 남편은 아직이나 외롭다 느껴지지 않았다.
퇴근길 5센티 굽의 구두를 신고 걷다 그녀는 플랫 슈즈 가게 앞에 멈춰 섰다. 쇼윈도 안으로 보이는 분홍색 얇은 끈 리본이 달린 앙증맞은 신발에 시선을 빼앗겼다.
“플랫 슈즈가 태아에겐 더 편안하겠지. 저 분홍색 신발이 잘 어울리는 딸이어도 좋겠는걸”
마음속 소리가 밖으로 나왔다. 생각의 생각은 이미 온통 아기와 함께 할 계획에 가 있음을 깨닫게 하는 순간이다. 이번에도 진희는 외길을 택한 것이다.
“진희야 불렀는데 못 들었어? 너 그리 먹어대다 이젠 귀도 먹은 거야?”
뒤따라 나온 선배는 자신의 농담이 마음에 드는지 혼자 깔깔거렸다. 진희는 그런 선배가 실없으면서도 정겨웠다.
“선배 시간 돼요?”
이제는 선배에게 말할 때가 된 거 같았다. 모범답안인지는 모르겠으나 마음이 어디로 기울었는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다만 그 길에 대한 결정도 몹시 두렵고 심란하다는 것이 또 다른 문제긴 했다. 웃음거리가 되는 건 예전에 뒷전으로 밀렸지만 잘할 수 있을지 막막하기는 했다. 마지막 열매일지 몰라 아기를 욕심내는 것은 아닌지 이 욕심의 뿌리에 아기의 고난이 달려 나오진 않을지 또 다른 지진이 그녀를 흔들 채비를 했다.
지하철역 부근 자주 가던 커피숍으로 갔다. 그녀들을 알아본 카페 주인이 인사하며 카운터에서 나와 반겨주었다. 금요일 저녁 커피보단 알코올을 찾는 이들이 많아 한주 중 가장 손님이 적은 날이다. 한산한 내부를 둘러보다 그녀와 선배는 구석진 창가 자리에 마주 앉았다.
카페 주인은 진희를 향해 ‘카페라테’ 선배를 보며 ‘카페모카 휘핑 가득 얹어서’라고 말한 후 ‘맞죠?’ 하는 표정으로 둘을 내려다보았다. 선배는 끄덕였지만 진희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니요. 저는 주스 마실게요. 키위주스요”
진희의 말에 선배는 반응하지 않았고 카페 주인은 의아하다는 듯 진한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곧 받은 주문서를 들고 물러났다.
진희는 아까보다 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선배 저 사실은...”
“알아 나 알고 있어”
“무얼...? 네? 정말요 어떻게?”
“어떡하다 보니 네 모니터도 보이고 네 과자 우적거리는 모습도 보이고 네 고민하는 낯빛도 보이는데 모를 수가 있니”
힘겹게 이어갈 말을 선배가 가져가 주었다.
진희는 상황에 맞지 않게 두 눈이 시큰해져 와 창밖 쉴 새 없는 도로 위로 시선을 돌렸다. 선배는 그런 그녀를 위해 한 번 더 먼저 말을 건넸다.
“진희야, 네가 무슨 마음이든 나는 네 맘과 같아. 뭐든 그건 널 위한 거였으면 해”
선배는 오래전부터 이 말을 해주고 싶었던 것 같았다. 준비 없이 꺼내든 어설픈 위로가 아니었다. 선배가 기다려준 시간을 생각하니 그녀의 진심 어린 배려에 진희는 용기가 났다.
“선배, 나만 위하는 게 맞는 걸까요?”
“응. 널 위하는 게 가장 맞는 일이야”
진희는 선배 말에 그만 시큰거리던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이런, 선배 미안해요. 나 왜 울지. 주책이다 정말”
“내가 좀 감동스럽긴 하지”
진희는 이어진 선배의 실없는 유머에 햇살 못지않은 따뜻함을 느꼈다. 흐르는 눈물은 멈춰지지 않았다. 아니 맘껏 울어보고 싶었다.
“선배, 나 좋은 엄마는 이미 탈락인지도 몰라. 하지만 누구보다 성의 있는 엄마가 되려고”
“그래. 그럼 좋은 사람은 내가 할게. 난 무조건 좋은 이모가 될 거야”
선배의 말에 이번엔 진희도 어이없는 웃음이 터졌다. 그렇다 선배라면 분명 좋은 이모가 될 테다. 선배가 사준 키위 주스 한 잔을 남김없이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어떤 상념도 들어서지 않았다.
지하철 임산부 좌석에 앉으니 자연스레 손이 배 위에 올려졌다. 긴 지하철이 꿈틀거려도 속은 울렁임 없이 차분하기만 했다. 진희는 선배 덕분에 막막하던 기분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제부터 나는 둘이다. 언제가 셋 혹은 넷이 되는 날이 올 수도 있다. 그때까지 아니 그날이 오지 않는다 해도 괜찮다. 둘도 충분하니까’
진희는 지금 웃는다. 그 웃음을 따라 그녀 안의 작은 생명이 움튼다.
신의 선물처럼 그리 소망하던 특별한 관계가 진희에게로 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