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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까지 나에게 은행은 커다란 저금통이었다. 가지고 있는 돈을 얼마든지 넣어둘 수 있는 크고 안전한 금고 정도였다. 예금과 인출, 이체에서 적금까지가 내 은행 업무의 전부였다. 그런 사람이 가지고 있는 예금보다 훨씬 큰 돈을 은행으로부터 빌려야 했다. 계약서를 쓸 때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도대체 나의 무엇을 믿고 그 큰 돈을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처음 대출에 대해 물어보기 위해 회사 1층에 위치한 은행을 찾아갔을 때 나는 누가 내 통장의 잔고를 알고 피식 비웃지는 않을까 겁부터 났다.
은행 직원은 내가 첫 월급통장을 만들러갔을 때과 똑같이 나에게 친절했다. 대출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몇가지 질문을 하고, 필요한 서류를 안내해주었다. 은행이 빌려준 돈은 내 통장을 잠시 거쳐 원래 집 주인의 계좌로 들어갔다. 너무 짧은 시간이어서 정말 그 돈이 내 이름이 붙은 돈인지 은행이 나에게 빌려준 것이 맞는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파트 명의를 바꾸는 데 그렇게 많은 서류가 필요하고 그 업무를 대신 처리해줄 누군가를 고용하기 위해 또 돈이 든다는 사실은 계약서를 쓴 뒤에야 알게 되었다. 대출금의 일부는 몇가지 서류와 서류 사이에서 증발했다.
국토부의 실거래가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소형 아파트의 감정 평가액이 얼마가 나올 것인가. 그 액수에 따라 대출이 가능한 금액이 정해진다. 내가 예상한 금액보다 적으면 그 돈은 고스란히 고금리 신용대출로 메꿔야 할 판이었다. 가지고 있는 돈에 맞는 가격을 찾는 게 아니라, 아파트 가격에 가지고 있을 돈의 양을 맞추는 이상한 계산법이 시작되었다. 대출에 대한 이자로 다달이 얼마씩을 내는데 어차피 한달에 몇번씩 찾아가는 양양의 숙박비를 생각하면 그게 더 싸게 먹힐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엄마나 아빠를 이해시키는 건 불가능한, 내 머릿속에서만 손해보지 않는 장사였다.
별장을 사는 건 가족 누구에게도 비밀이었다. 명품 구두나 가방 정도였으면 입이 간지러워서라도 말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아파트를 지르고 나니 세상에서 가장 입이 무거운 사람이 되었다. 비밀 프로젝트인 까닭에 여러 사람의 자문을 구하지 못했던 게 지금 생각해보면 다행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더할 나위 없이 기특한 선택이 되었지만, 입사한지 1년도 되지 않아 연봉에 맞먹는 금액을 빌려 부동산을 산다는 건 그리 추천할만한 일은 아니었다. 집 계약을 한번이라도 해본 사람에겐 '상식'일 것들을 나는 처음부터 하나씩 찾아봐야 했다. 내 힘으로 대출 일정에 맞춰 무사히 계약을 해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