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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지숙 Jul 05. 2020

[10책] 여행의 이유

김영하.코로나시국에여행.반칙

  "김영하의 책읽는 시간 팟캐스트입니다."


  대학 시절 가장 많이 들었던 팟캐스트는 김영하가 진행하는 방송이었다. 나긋한 목소리로 스페인과 뉴욕, 한국과 중국 문학을 오가며 담담하게 소개하는 이 프로그램은 중독성이 있었다. 그가 쓴 소설만큼이나 그의 목소리와 화법에 큰 매력을 느꼈다.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라 방송용 ai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김영하는 그 자신의 좋은 스타일을 언제나 넘치거나 모자람 없이 선보였다.


  코로나로 계절 휴가는커녕 신혼여행도 가지 못한 내게 이 책은 너무나 감미로웠다. 밀리의 서재에서 단독으로 공개한다는 소식을 들었을때만 해도 별 관심이 없던 책이었다. 하지만 170페이지의 짧은 산문집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나는 너무나 만족스럽게 먹던 식사의 마지막 한숟갈을 먹어버린 아쉬움을 느꼈다. 작가의 말까지 아끼고 아껴 읽고 나니 장 그르니에의 <섬> 앞장에 쓰여있던 문장이 생각났다. 나는 아직 이 책의 첫장을 보지 않은 이름모를 젊은이가 부럽게 느껴졌다.


 사실 김영하가 쓴 여행에 대한 에세이는 지금 시국에 반칙이다. 그의 글은 뽐내거나 늘어놓지 않고, 처음부터 깔끔하게 짜여진 구조를 따라 정돈되어 있다. 비정상적인 일상이 반년 가까이 이어지고, 2020년의 하반기가 시작됐지만 우리 모두는 아직 올해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혼란스럽다. 당장 7월 여름 휴가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허둥지둥하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띄는 가운데, 여행의 이유에 대해 몇가지 꼭지로 깔끔하게 정리해 들려주는 김영하의 글은 이유없이 안도감을 준다.       


 여행지에서 보고 들은 것, 먹고 경험하고 만난 것들에 대해 풀어쓰는 건 어렵지 않다. 해외여행이 일상이 된 지금 세대는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여행작가 노릇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축적된 여행의 경험을 한단계 높은 차원의 이야기로 풀어낼 줄 아는 작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 책의 제목은 <여행의 이유>이지만, 그의 전작인 <읽다>, <보다>, <말하다> 시리즈처럼 우리가 당장 오늘 맞이하는 현실과 일상에 더 큰 울림을 준다. 내가 여행에서 얻고자 하는 게 과연 완전히 새로운 경험에 도취되거나 추구했던 바를 성취하는 것일까. 김영하가 말한 것처럼 낯선 이에게 환대받는 경험을 통해 안정감을 느끼는 순간 자체가 아닐까.


 6주 이상 긴 시간을 여행하는 걸 배가본드, 방랑자의 여행이라고 한다. 21살 3달 동안 인도에 다녀온 뒤로 방랑객의 여행에 대한 목마름은 크게 없었다. 한달 동안 제주도 게하에서 스탭으로 지낼때도, 취업이 되지 않아 막막했던 시간을 때울만한 곳이 필요했을 뿐 방황을 더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오히려 요즘 어지러운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여행자의 만족감을 느낀다. 일상에서 매일 새롭게 일어나는 예상치 못한 일들에 더 큰 집중력과 애착이 생긴다. 31살 지금의 나에겐 정신없이 닥쳐오는 현실과의 마찰 가운데 평온한 일상으로 끊임없이 돌아오는 모든 여정이 곧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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