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번째 달리기
나보다 2년 먼저 달리기를 시작해 지금까지 꾸준히 해오고 있는 친구가 어제저녁 한 말이다. 러시아보다 혹한이라는 이 며칠 한국의 날씨에 과연 아침 달리기를 할 수 있을까 내가 물었기 때문이다. 어제는 한파 핑계로 수영을 했다지만, 하루를 더 건너뛸 수는 없다. 뛰다 보면 땀나고 다 똑같다는 말에 마음 덤덤히 가다듬고 밖으로 나갔다.
숫자에 너무 뜨악했던 탓인지 차가운 칼바람은 느껴지지 않았다. 일단 평소에 하지 않던 머플러로 코 아래를 덮고 천천히 출발했다. 추운 날 부상을 당하기 쉬운 발목과 무릎 스트레칭을 단단히 해둔 것은 물론이다. 익숙한 길을 한두 걸음씩 뛰기 시작했다. 그저께 지났던 도로 한 편의 줄줄이 트럭들. 심야 운송을 맡아 밤새 달렸을 대형 화물차들의 운전석엔 주인들이 눈을 붙이고 있다.
도로를 가볍게 뛰고, 자전거 도로에 들어서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번갈아 땅에 닿는 두 발은 주인의 말을 아주 잘 듣도록 훈련되어 있다. 몇 겹이나 껴입은 옷과 목도리를 두른 얼굴은 둔하지만 두 발만큼은 내 뜻대로 움직여줬다. 문제는 호흡이었다. 차가운 공기가 코와 입으로 들어와 가슴을 찌릿하게 했다. 그 느낌은 찬 바람을 맞는 것보단, 서서히 냉동실 벽이 얼어가는 것과 비슷했다. 어느 순간부터 서늘한 느낌에 달리는 속도가 줄어들었다. 그래도 두 발은 마지막 한 걸음까지 내 뜻대로 따라와주었다.
유명한 마시멜로우 실험이 있다. 어린아이들을 상대로 눈앞의 마시멜로우를 먹지 않고 참는 대신 2개의 마시멜로우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15분만 눈앞의 욕망을 참으면 달콤한 과자를 2배 많이 얻을 수 있다. 이 실험에서 끝까지 참고 2개의 마시멜로우를 얻은 아이들은, 참지 못하고 눈앞의 것을 먹어버린 아이들보다 학업성취도가 뛰어났다. 얼마나 많은 성취를 할 수 있는가는 지능보다는 '자기통제력'에 좌우되는 경향이 높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말하는 친구와 내 뜻대로 혹한을 가르며 달려준 두 발을 생각하며 이 실험을 떠올렸다. 그리고 달리기의 반환점에 항상 철새들이 머물던 장소를 보고서는 마지막으로 먼 거리 이동을 떠났을지 모를 철새들을 생각했다. 철새들은 한 번에 약 6000km의 거리를 이동한다. 하지만 이동에 걸리는 시간은 1~2주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들은 먹는 것도 자는 것도 미뤄둔 채 밤낮으로 하늘을 날아서 오는 것이다. 하루라도 지체되면 오늘과 같은 추위를 만나 꼼짝 못 하고 갇히게 되기 때문이다. '자기통제력'이 생존과 직결된 문제인 경우다.
매일 달리겠다는 나의 의지도 강력한 자기통제력을 요구한다. 의지만으로 부족한 것이 충분히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두 다리의 근육으로 채워진다. 나는 오늘도 정해진 만큼 달릴 것이고, 그것이 바로 지금 이 순간 기록할만한 이야기 즉, 나만의 마시멜로우로 돌아올 것이다. 이것을 계산하는 나의 머리와 어렵지 않게 움직이는 두 다리가 만나 오늘의 달리기를 가능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