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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지숙 Dec 07. 2020

서른 한 살, 파이어족이 되기로 결심

맥시멀리스트야말로 미니멀리스트가 되기 쉽다

  "세상 신기한 물건들 죄다 너네 집에 있어"


  자각하지 못했지만 취업 후 3년 동안 나와 내 남편은 맥시멀리스트로 살았다. 꼭 필요한 물건만을 산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필요가 아닌 '흥미'과 '재미'가 소비의 주된 동기였다. 지금은 녹이 슬어 잘 당겨지지 않는 로잉머신이 대표적이다. 한창 운동을 하면서 친해진 우리는 집에 로잉 머신만 있으면 매일 <하우스 오브 카드>에 나오는 열정적인 부부처럼 운동을 할 줄 알았다. 머리에 묶어 복싱연습을 하는 고무 공이나, 와플 머신, 옥상에 빨래걸이가 된 해먹과 결국 중고로 팔아버린 와인 냉장고 등 리스트를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매달 새롭게 채워지는 돈이 있으니 그만큼 새로운 물건을 사도 거리낌이 없었다. 카드빚을 밀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 이것저것 물건을 사들이는 재미에서 만족감을 느꼈다. 이정도는 살 수 있지, 혹은 이런 것도 사봤다는 자기만족을 위해 몇달치 월급이 통째로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이젠 아끼고 아껴 마흔이 되기 전에 은퇴를 하겠다는 결심을 했으니 달라져야 한다. 스마트폰 결제로 얼마나 쉽게 새로운 물건을 집앞으로 배달 시킬 수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우리가. 더이상 재미를 위한 소비가 아닌 최소한의 예산으로 최대 만족을 이끌어내는 '미니멀'한 씀씀이로 순식간에 돌아설 수 있을까?


  사실 내년 초에 목돈이 필요했던 우리는 올해 5월부터 소비 예산을 줄이기 시작했다. 필요한 저축액을 먼저 정해두고, 최소한의 용돈과 공용 생활비라는 틀 안에서 돈을 쓰기로 했다. 6개월째, 지붕 수리와 같이 목돈이 들어가는 변수가 있었지만 그런대로 줄어든 소비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이제는 40살 이전 은퇴를 위해 좀더 본격적으로 돈을 모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미 타이트하게 예산이 짜여진 지금보다 더 획기적으로 소비를 줄이는 게 가능할 지 우리도 아직 모르는 일이다. 


 다만 작은 위로가 되는 것은, 우리가 맥시멀리스트로 살아온 지난 3년이 후회되기보다는 이 길로 들어서기 위해 '필요한 경험'이었다는 깨달음이다. 사실 우리는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이미 모두 사들였다. 집과 자동차, 바닷가 별장과 2개의 서핑보드. 대출금을 갚는 문제를 차치하고서 큰 돈이 추가로 들어갈 소비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셈이다. 더욱이 그동안 자잘한 물건들을 양껏 사모은 경험으로, 그런 소소하고 새로운 경험으로 확장되지 않는 1회성 소비들이 생각보다 우리에게 큰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걸 확실하게 깨달았다. 


 나는 내게 잘 맞는 기초 화장품이 무엇인지 알고, 다행히 그것은 비싸지가 않고, 내가 편하게 입을 수 있는 기본 옷들은 이미 내 옷장에 들어있고, 이제는 오래 두고 입을 비싼 한 두 가지 아이템만 계절별로 구입하면 되고, 멀리 여행을 떠나 쫓기듯 값비싼 것들을 즐기지 않아도, 열평짜리 바닷가 집에서 라면에 맥주를 마시는 게 훨씬 더 편안한 만족감을 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비의 무궁무진한 세상을 헤매며 나에게 더 어울리는 무언가를 찾는데 시간과 돈을 쓸 이유가 맥시멀리스트로 사는 기간 동안 하나둘씩 줄어든 셈이다.


  이제는 집에 사둔 커피 머신으로 원두를 갈아 내린 커피를 텀블러에 담아 차를 타고 출근을 한다. 유행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내 몸에 편하고 따뜻한 옷과 신발을 입고 하루를 시작하며 내 손에 잘 익은 필기구와 몇년째 재구입하는 다이어리에 글을 적는 즐거움을 만끽한다. 점심은 간단하게 구내식당에서 먹고, 습관적으로 들어가던 커피숍을 지나친다. 퇴근해서는 지난 주말에 장을 봐둔 음식들로 저녁밥을 차리고, 몇달 전에 사둔 식기세척기로 설겆이를 빠르게 끝낸 뒤 남편과의 느긋한 저녁 시간을 보낸다. 금요일 저녁이면 다시 별장으로 가서, 샵에 보관해둔 보드를 들고 바다에 나가 하루 종일 놀다 들어온다. 무언가 더이상 비싼 돈을 들여 새로운 물건을 소비하지 않아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일상이다. 


  관건은 이런 평화로운 일상을 앞으로 몇 년 동안 꾸준히 유지할 수 있느냐다. 예상치 못한 변수는 생기기 마련이고, 맥시멀리스트의 습관이 언제 다시 고개를 들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모든 리스크를 감당할 필요가 있을 만큼 더 큰 가치가 있는 가능성에 투자하기로 했다. 일단 그것이 실현되면, 나머지 일들은 계획을 완성해 나가는 중간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의지에 따라, 언젠가는 그렇게 되고 마는 '확실한 미래'가 된다는 거다. 파이어족의 궁극적인 목표는 매일 해변가에 누워 뒁굴거리는 것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가장 창의적이고 열정적인 시간을 마음껏 보낼 수 있게 되는 것. 그 때의 나를 위해 조금 더 '의식적인 소비'를 해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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