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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지숙 Dec 12. 2020

서른 한 살, '은퇴 계획'이 버겁게 느껴질 때

현재를 누리며 미래를 앞당기는 게 가능할까

  나는 매년 이맘때쯤이면 계획병이 도진다. 11월의 끝이 보일 때쯤, 미리 그 다음해에 무엇을 할 것인지 그려보는 것을 좋아한다. 내 인생을 스스로의 생각대로 꾸려나간다는 느낌이 좋고 지난 몇 년 동안 그렇게 연말에 세운 계획들이 나름 소기의 성과를 냈기 때문에 더 그렇다. 월급날을 중심으로 세워지는 계획들이 많지만, 그 가운데서 내가 나의 삶을 이끌어 나간다는 자신감을 얻기 위해 더 다양하고 구체적인 계획들을 꼼꼼하게 세우려고 애쓰는 편이다.


  보통 나는1년에서 길어봤자 5개년 계획을 세워왔다. 어떤 일의 성과를 확인하기에 그정도의 시간은 필요하고, 나 뿐만 아니라 주위의 친구나 회사 동료들도 새해 다짐 정도로, 혹은 중장기의 자금이나 운동 계획, 외국어 공부와 같은 목표들을 어렵지 않게 떠올리고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다양한 수단과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서른 한살을 지나는 이 때 은퇴를 계획하는 '동료'나 '성공담'을 찾는 일은 그렇지가 않았다.


  처음 조기 은퇴를 상상하며 느꼈던 설렘이 어느 순간 불안감과 조급함으로 바뀌었다. 내가 정말 이룰 수 있는 계획인가, 이런 삶에 대한 목표가 정말 현실적인 것인가. 매일 계산기를 두드리며 계획을 세워봐도 과연 이대로 5년 이상의 시간을 버텨낼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계획이 모습을 갖추면 갖춰갈수록 더욱 그러했다. 높은 강도의 절약과 공격적인 투자, 그리고 외부 변수에도 무너지지 않고 그 계획을 온전히 지켜나가도 실현 가능할까 말까 한 10년짜리 장기 프로젝트.


  좋은 투자처 같아 보이는 아이템을 발견했지만, 그것에 진짜 내 현재 가능성을 모두 쏟아붓는 결단을 내리려니 며칠째 잠이 오지 않았다. 정년에 은퇴할 생각이라면 모르겠지만 나에겐 '성공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몸이 굳는 느낌이었다. 이번에 실패한다면, 다음은 없을텐데. 내가 꿈꿔온 조기 은퇴는 영영 물건너 가는 것이 아닌가. 아니면 이보다 훨씬 더 나은 선택지가 있는데 나의 조급한 마음 때문에 일을 그르치게 되는 것은 아닌가. 결국 지금의 내 선택을 몇년이 지나 후회하게 되지는 않을까.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성공을 담보할 수 없는 이런 시기를 잘 버틸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게 과연 내가 원하던 길로 이어져 있는 것일까. 현재를 온전히 누리지 못한다면 남들보다 조금 일찍 직장을 떠난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머릿속에서 뱅글뱅글 도는 생각이 깊이 잠들지 못하게 하고, 깨어 있는 시간 동안의 일에도 징중력을 떨어뜨렸다. 누가 나에게 강요한 것도 아닌 이런 고강도의 은퇴 준비를 지금 이 나이에 고민하는 게 어리석은 건 아닌가. 스스로도 질문하면서 자신을 다독이는 일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되고 있다.


 보통 파이어족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이런 고난 끝에 조기 은퇴로의 험난한 여정을 마치고 원하던 삶을 살게 되는 '성공 스토리' 여야 할 것 같은데. 그 과정을 이제 들어서기 시작한 초입에서 남긴 생생한 기록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21살 인도로 배낭여행을 떠나서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밤에 머리를 누일 때까지 일기장에 참 많은 기록을 남겼다. 앞으로 내가 어떤 길을 걷게 되고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고 어떤 풍경에 말문이 막히게 될지 알지 못하면서도, 아니면 그런 순간순간을 지나는 동안에 남긴 작은 기록들이 결국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애초에 조기 은퇴는 이루기 어려운 목표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걷는 '좁은 길'을 웃으면서 걷는 건 더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현재를 온전히 누리면서 미래를 앞당기는 일. 어느 파이어족보다 더 이상적인 목표를 세우고 끙끙앓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만큼 아끼고 계획하고 노력하는 인생은 사실 이른 은퇴를 꿈꾸지 않는 수많은 보통 사람들도 살아내고 있는 삶이다. 단지 그 길의 끝에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풍경이 조금 다를 뿐이다. 지나치게 겁내지 말고, 덤덤하게, 이런 위기 의식을 조금 즐기면서 가는 것도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선 나 자신을 다독이기 위해 쓰는 이 글과 같은 기댈 곳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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