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파 경보가 내린 날엔 수영장으로
"잘 지내고 있나요.
나는 잘 지내요."
5년 만에 한파 경보가 울렸다. 바깥 기온은 -18도, 체감기온은 그보다 아래였다. 문밖을 나선 사람들은 '잘 지내기' 어려웠다. 이른 아침 수영복을 가방에 챙겼지만, 마음이 무거웠다. 새파란 레포츠 가방 안에 들어있을 남색 수영복과 흰색 모자. 하늘색 수경까지 나를 부담스럽게 했다. 계획대로라면 오전 일정을 마치자마자 관내 수영장을 찾아 이동해야한다. 역에서 700미터 남짓한 거리를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몸이 차가워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물은 언제나 얼음보다 따뜻하다. 아무리 물이 차갑게 느껴져도 영하로 떨어지는 바깥 날씨보다는 따뜻하다는 소리다. 한파주의보가 내린 바깥에 서 있기보다 실내 수영장에 들어가 있는 편이 덜 고통스럽다. 일일 자유수영으로 입장해서 옷을 갈아입을 때까지도 마음이 무거웠지만, 일단 물에 들어가는 순간 아침나절의 걱정이 우습게 느껴졌다. 수영복 차림으로 물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 앙고라 니트에 거위털 잠바를 입고 바깥에 서있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몸이 더 가볍게 느껴졌고, 더 자유롭게 움직였고, 무엇보다 한결 따뜻했다. 기록적인 한파에 수영장에 가는 것이 더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이란 걸 배웠다.
이만큼 추운 날엔 영화 <러브레터>가 잘 어울렸다. 눈이 끝없이 내렸고, 눈밭이 배경이었고, 주인공들은 눈 위를 뛰어다니거나 추운 날씨 때문에 감기에 걸렸다. 찬 공기에 눈물이 맺혔던 아침, 따뜻한 물을 가르며 헤엄쳤던 오후를 보내고 마지막으로 눈이 펑펑 쏟아지는 풍경의 영화를 보는 동안 온도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물방울에 대해 생각했다. 영화 속의 눈은 분명 수영장의 물보다 차가울텐데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주인공이 학창시절 미끄럼을 타고 내려온 눈 덮인 비탈길의 모습이나, 겉옷이 벗겨진 채로 눈밭을 달려가 눈 덮인 산을 향해 소리치는 여주인공의 모습은 충분히 따뜻하고 뜨거워 보였다.
사실 지면의 온도는 공기 중의 수증기가 눈으로 변하는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저 높은 하늘 위 대류층에서 차가운 공기를 얼마나 만나느냐가 결정적이다. 수증기가 얼음 결정으로 맺힌 뒤에는 몇 백 미터 정도는 영상의 공기층을 만나도 여전히 눈인채로 떨어진다. 우리가 땅 위에서 보게 되는 눈송이는 사실 저마다 차갑고, 따뜻한 공기를 얼마나 맞았느냐에 따라 결정의 모습이 제각각이다. 하지만 우리 눈에는 모두 똑같은 백색의 차가운 눈송이로 보이는 것이다.
<러브레터>의 여주인공 (와타나베 히로키)은 자신이 사실 연인(후지이 이츠키)의 첫사랑과 많이 닮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더군다나 연인의 첫사랑은 그과 동명이인이다. 히로키는 자신이 운명적인 두 사람의 사랑 사이에 끼인 대용품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괴로워한다. 사고로 세상을 떠난 남자의 속마음은 더이상 확인할 길이 없다. 하늘 높은 곳에서 만들어진 눈송이는 벌써 지면으로 떨어져버렸다. 그 사이에 어느 차가운 공기와 얼만큼의 따뜻한 공기를 만나 끝내 어떤 모양의 얼음 결정이 되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떤 것이 먼저였고 나중이었는지는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