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보드 & 한국화
10장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이 오늘의 과제였다. 나는 3가지 다른 버전의 이야기를 생각해 두었고 발표 순서는 제일 마지막이었다. 먼저 첫 번째 사람의 이야기에 '형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그다음 사람의 이야기는 주인공의 집을 '형사'가 급습하는 결말로 끝났다. 나는 내가 만든 첫 번째, 두 번째 버전의 이야기를 지웠다. 거기에도 '형사' 캐릭터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쓸 것 같은 설정은 버려라'
언론사 작문 글쓰기에서 자주 들었던 조언이었다. 무조건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을 쓸 것. 많은 사람들이 떠올린 이야기라면 일단 참신성 면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미련 없이 앞의 두 사람이 똑같이 사용한 설정을 버렸다. 마지막으로 남은 버전의 것은 남들과는 달랐지만, 이미지를 자의적으로 해석했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내가 세 가지 이야기 가운데 한 가지를 고른 이유를 함께 발표했다. 그리고 한 사람으로부터 앞의 코멘트를 받았다.
나는 정면 돌파하려 하지 않았다. 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참신한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좀 더 솔직해지자 내가 요령을 부렸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애초에 연관성이 없는 이미지들을 조합해 개연성 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작업은 굉장히 까다롭다. 그림의 세부 요소들을 충분히 파악한 뒤에 그것들을 과장이나 축소 없이 하나의 맥락으로 엮어내는 것은 구성 면에 있어 많은 고민을 필요로 한다. 나는 소재의 참신성만을 주목했고, 결과적으로 쉬운 선택을 했다. 남들과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그것을 더 재미있고 그럴듯하게 업그레이드시킬 것을 고민하기보다 '남들과 다르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기를 기대했다.
내가 첫 작문을 썼을 때 얼마나 많은 설정을 고민을 했던가. 또 얼마나 '더 그럴듯하게' 보일 것을 고민했던가.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런저런 설정을 짜 맞춰 '이 정도면 됐다', '충분히 색달라' 하고 만족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특별한 예술가가 되려는 게 아니다. 대중의 취향에 맞춰 '뻔한 이야기를 뻔하지 않게 전달할' 방법을 고민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 이미 사람들이 한 번쯤 들어봤을 이야기를 재가공해서, 디테일을 살려서, 여기에 편집의 묘를 더해서 재미있게 만들 고민을 해야 한다. 나는 그런 고민을 정면 돌파하기 위해 역량을 쌓기보다, 적당히 편하게 요령을 부리려 했다. 오늘 그걸 인정했다.
한국의 초상화는 '요령부득'이란 말의 의미를 보여준다. 털 한 오라기, 옷고름의 무늬 하나 실제와 같지 않으면 전혀 다른 인물이 된다는 당대의 인식은 하나의 신념이었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기에 앞서 온 신경을 집중해 인물의 모습을 관찰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화폭에 그대로 옮기기 위해 오랜 시간 심혈을 기울였을 것이다.
중국의 초상화 역시 극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이지만, 한국의 것을 따라오지 못한다고 한다. 일례로, 한국의 초상화는 그림만 보고도 해당 인물이 앓고 있는 병이 어떤 것인지 정도가 심한지 문진이 가능할 정도라고 한다. 중국의 초상화는 굉장히 '그럴듯하게', '현실에 있을법한' 모습으로 그려졌지만 실제 인물의 병색까지 담아내진 못한 것이다.
하얀 바탕에 단순한 형태의 '*표구' 역시 한국화의 '정면돌파' 정신을 보여준다. 비어 있는 흰 바탕에 놓고 보아야만 그림 자체에 집중할 수 있다. 그래서 전통 한국화는 소박하고 단정한 표구에 걸려 있을 때 가장 잘 감상할 수 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를 겪으며, 이름난 그림 대부분이 일본식의 화려한 색깔과 장식을 가진 표구에 새로 붙여지게 되면서 본래의 맛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요즘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한국 그림들은 어딘지 초라하고, 옹색해 보인다. 그림보다 바깥 테두리에 더 신경이 쓰이기 때문이다. 화려하게 꾸미려는 요령보다, 그대로의 작품이 더 감동적이다.
* 표구(表具)란 종이·비단·세면(細綿=統) 등에 쓰인 서화(書畵)를 보존하기 위하여 얇고 질긴 종이를 밀착시켜 안감을 대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