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6.26 필리핀행 비행기 위에서
1. 필리핀 마닐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가 추락하면 탈출할 수 있는 비상구 바로 앞 자리에 앉았다
기내에 헛소리를 하는 사람이 비행기에 타고 있다. 영어로 헛소리를 하고 있다
혼자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부르고 있다. 어디 문제가 있는 사람인 것 같다.
함께 탄 사람들은 순간순간 얼마나 마음을 졸이고 있을까.
그가 소리를 지를 때마다, 비행기가 떨어지는 것처럼.
여기서 20분을 더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덩달아 조마조마한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아까 비행기에 오르기까지
면세점에 들어서기 전까지
잘못된 것이 없는데
계속 조마조마해지는 것이
이런 저런 시험을 준비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여권을 챙겨오지 않았으면 어쩌지, 수화물 무게가 초과되면 어떡하지
내 짐에 생각지도 못한 물건들이 있어, 검색대를 통과하다 거부당하면 어쩌지
죄 지은 것도 없는데 조마조마한 마음이 된다.
시험을 준비하고 그 결과를 기다리를 과정과 비슷하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가슴이 쿵쾅쿵쾅 도망이라도 치고 싶어진다.
옆에 앉은 아빠가 말했다. 비행기가 막 속도를 높이기 시작한 때였다.
"개콘할 시간이다"
한국시간으로 9시 30분을 지나면서 비행기가 운행 고도가 조금씩 올랐다.
아빠는 주말에 즐겨보던 프로그램 시간을 기준으로
지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를 가늠했다
2. "비상구 옆에 앉은 사람은, 책임감이 있어야 하고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고 적혀 있다
책임감을 갖고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위급 상황에 크게 당황하지 않으며 차분하게 대처할 줄 알아야 한다고 적혀 있다. 그래서 내가 아니라 아빠가 그 자리에 앉았다. 비행기가 떨어지면 아빠 옆에 꼭 붙어 있어야지.
승무원이 안내하는 비상탈출 방법을 열심히 들었다.
구명조끼를 머리에 쓰고, 밸트를 허리에 한바퀴 감아 버클을 채운다.
양쪽에 달린 끈을 잡아당기면 공기가 주입된다.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끈을 잡아 당겨야지.
바다 위에 둥둥 떠올라 구명조끼를 챙겨 입는 나를 상상했다.
이렇게 깜깜한 밤에 바다에 떨어지면 정말 무서울 것 같은데
안전 수칙 책자를 읽고 있는 아빠 옆에 더 가까이 붙어 앉았다.
3. 비행기가 떠오르는데
밤 아홉시가 넘은 공항을 달리는 비행기는
창문 밖으로 어둠과 작은 불빛, 그 위로 더 큰 어둠과 붉은 조명들을 보여주었다
서서히 빨라지는 비행기가 떠오르는 순간 함께 떠오르는 시간이 있었다.
몇 년전 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도
이렇게 밤 시간에 하늘을 날았다
나는 이렇게 어두운 창문을 보면서 떠올랐었다
한숨 자고 일어났을 때 창문엔 별이 보였다
박제된 빛- 나는 그렇게 일기에 적어두었다.
이렇게 둥실 떠오르는 시간들이 가장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해준다
하늘을 떠다니는 시간동안 가장 많은 것을 떠올릴 수 있다
비행기를 타고 떠오르는 순간을 위해
사람들은 여행을 떠나는지 모르겠다고 엄마는 이야기했다
내가 발을 붙이고 등을 기대고 살아가는 일상의 높이는 일정하다
그저께 학교 외곽도로를 따라 달리면서 오른 오르막의 높이도 기껐해야 수십미터였다.
하지만 비행기를 타고서는 수백 킬로미터를 떠오를 수 있다
단번에 이렇게 높이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일생에 몇번이나 있을까
비행기를 타는 것만으로 이번 여행은 성공이다
충분히 제 몫을 했다
"참고로 저희 비행기는 PR 457입니다.
오늘은 2016년 6월 26일 입니다."
뒤이어 기내식이 나온다는 방송이 나왔다
4. 지금 이렇게 피곤한 시간에 가장 많이 쓸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이렇게 어지러운 시간에 가장 명확한 말들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욕심을 내고, 안달복달을 하고, 안간힘을 짜내며 무언가를 이뤄왔다
내가 지금 애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열심이었을 때는
집에 돌아와서 그 시간들을 떠올려보면
한달에 하루쯤은, 나 자신이 굉장히 특별한 사람처럼 타고난 재능을
운명적인 순간들을 만나 끌어내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제는 물이 차오르면 넘어가는 물레방아처럼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이 임계점을 넘는 순간순간들을 기다리고 기다리며 기대한다
하늘에서 떨어진 재능보다, 우연히 그렇게 된 영화 같은 일들보다
내가 한발, 한시간 더 애써서 살아낸 덕분에 찾아온 마일리지 같다는 생각.
그래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값을 치르고, 귀찮아도 적립카드를 꺼내어 챙겨 모은 마일리지.
내 인생에 빛이 난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모두 마일리지로 바꿔 얻은 선물 같다.
생각이 지나간 그대로, 사람들을 보고 느낀 그대로
그것들을 받아 적는 것만으로 손이 바빠
구조를 갖추려기보다 모양새를 다듬으려기보다
그저 잘 기록해두려는 성실한 자세로 글을 쓴다
이상하다. 애써서 무언가를 얻어왔다는 이야기를 내용으로 쓰면서
그것이 쓰이는 과정은 애쓰지 않고 받아 적는 식이라는 것이. 이상하다
수첩 위에 인상을 남기는 것이. 나의 최선인 상황이다.
5. 여권을 펼쳐보다 파키스탄 비자를 발견했다
날이 더운날, 이태원 대사관 언덕을 혼자 올라 설레는 마음으로 받은 비자였는데
생각보다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나의 높이가 부담스러워서
비자 기간이 만료되고도 한참 후의 어느 날, 쓸모가 없어진 여권을 찾으러 갔다.
용기가 없어서 포기했던 일들은 평생을 나를 따라다닐 것 같다.
항상 아쉬운 건 '용기를 내야할 때'라는 걸
정작 그 선택을 내리는 순간에는 충분히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뒤늦게, 용기를 내었어야 했나. 잘한 결정이 맞을까. 뒤늦게. 아쉬워지는 것이다.
후회와 아쉬움이 남지 않는 인생을 살려 노력해야 하지만
후회와 아위움이 남지 않는 인생은 끝까지 살아봤자
결국, 후회스러울 것 같다.
내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후회와 아쉬움이 없는 인생을 살기 위해 아둥바둥해왔을까.
그때는 또 그런 후회가 들 것 같다. 또, 이상하다.
후회와 아쉬움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갈림길에 멈춰서 본 적이 없다는 이야기
그만큼 내 양 손에 따로 잡힌
내 발길을 두 갈래로 나누는
동시에 똑같은 무게로 소중한 것들을 눈 앞에 마주한 일이
얼마 없다는 말이 되니까.
한쪽 길을 가지 못한 아쉬움이 없다면
욕심이 나는 두 가지 길을 한 가슴에 품어 본 적이 없다는 이야기
그런 외길 인생이 나는 싫다
계속해서 탐이 나는 두 길 가운데 서고 싶다.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해서 계속해서
더 나은 쪽으로 나아갈 수 없어도 괜찮을 것 같다
이렇게 후회와 아쉬움이 남으면
또 다음 갈림길에서 다른 선택을 해볼 수 있겠지
6. 콜카타에서 40시간을 달려 갠지스로 향하던 길이었다
기차 위에서 40시간을 머무르며 갠지스로 가까워지던 길이었다
엉거주춤 겨우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얼굴을 기어오르는 바퀴벌레를 손으로 훑어내며 잠을 잤던 그 곳에서
나는 나이를 먹는 일에 대해 어떤 기대를 갖기 시작했다.
정오에 가까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간신히 눈을 훔치는 세수를 하고
손수건으로 물기를 대충 닦으며 내 짐이 묶여 있는 기차칸으로 이동하던 중이었다
기차칸과 기차칸 사이 덜컹거리는 공간이 있었다
그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풍경이 있었다
개나리색 갈색, 황토색 초원이 깔려 있고
실개천이 지류로- 지류로 뻗어내려가고 있었다
시계를 보지 않고도 정오를 지나고 있는 줄 알려주는 햇살이
황토색과 갈색과 개나리색의 빛을 한꺼번에 불붙였다
그 초원이 얼마나 넓은지
기차가 달리고 달리고 계속해서 달려도
나는 같은 풍경을 한참이나 볼 수 있었다
그 광경이 입이 벌어질만큼 아름다웠다
내가. 만약 이렇게 나이를 들어
오늘처럼 이렇게 꼬질꼬질 나이를 들어.
언젠가 기차 칸을 넘어가는 순간에
이런 아름다운 광경을 만날 수 있다면
인생이란 게 때때로 그런 순간을 허락하는 것이라면
계속해서 나이를 들어봐도 나쁘지 않겠구나.
30이 되고 40이 되어도, 내 아름다운 시간이 숱하게 지난 뒤에도
그리 낙담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겠구나.
일찍이 그런 풍경들을 만난 나는
그 풍경을 알기 전의 나를 질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