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부자들>과 <쉰들러 리스트>
19금 영화의 관람객 수가 900만을 넘었다. 2016년 기준 대한민국 성인 인구수는 3천700만. 어림 잡아 4명 중 1명은 이 영화가 보여주는 현실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미래 자동차와 조국 일보는 극장 문을 나선 우리들의 현실이다.
<미국의 민주주의> 서문에서 토크빌은 이렇게 말한다. 개인은 자신의 이해가 걸린 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제대로 판단할 줄 안다. 부당한 권력에 의해 자신의 이익이 침해당할 경우, 지방 정부나 언론, 어떤 형태의 정치적 결사를 통해 의사를 밝힐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 부정하게 탈취되고, 억압적이라고 여기는 통치에 복종하면 개인은 민주주의를 주장할 수 없게 된다. 자기 자신에게 가장 좋은 선택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능력이 마비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돈과 권력이 더러운 것이란 사실에 대해 생각했다. 정치, 경제, 언론 권력이 얼마나 추악하게 공생하고 있는지 새삼-깨달았다. 영화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고, 입소문을 타고 영화표를 끊은 관객들 역시 그것을 기대했다. 돈과 권력의 나쁜 쓰임새. 하지만 <내부자들> 이전에 <베테랑>이 있었고, <부당거래>, <범죄와의 전쟁>이 있었다. 사실 우리는 볼만큼 봤다. 조국 일보의 주필은 대중들에게 '고민거리'까지 적당히 안배해서 던져준다. 작년 노동법 개정 앞에는 국정 교과서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현실과 미래에 대해 심사숙고할 여유를 과거사 교과서 싸움에 빼앗겼다. <내부자들>의 흥행 덕분에 대한민국 성인의 4분의 1이 잠시나마 하나의 문제의식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얻었다. 이제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 대답은 부정적이다. 그 이유를 '냄비 근성'이나 '개돼지_같은' 의지의 차원이 아니라 '상상력의 한계'에서 찾고자 한다.
웹툰 송곳의 한 대사처럼, 다들 나쁜 것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배워나오는 것 같다. 권력의 나쁜 성질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우리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이다. 더 나쁜 것은 인기 드라마, 1000만 영화와 같이 잘 빠진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은 나쁜 것들을 더 쉽게 배운다는 점에 있다. 조국 일보, 미래 자동차. 우리의 현실과 비슷하게 그려질수록 더욱 그렇다. 아주 작은 권력이라도 손에 들어오면 자신이 보고 배운 대로 휘두르려 한다. 권력의 비리 폭로형 콘텐츠가 가져올 수 있는 작지 않은 부작용이다. 사람들은 권력의 폭력성을 무의식 중에 배우고 흉내내기 쉽다.
하지만 권력의 좋은 쓰임에 대한 것은 다르다. 충분히 숙고하고 상상할 시간이 있어야만, 그리고 의식적으로 배울 기회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특히 국민 대중의 힘, 합리적인 통치 권력의 경험이 적은 대한민국에겐 좋은 권력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하다. 개인 자신의 이익과 국가, 기업, 언론 권력의 이해를 일치시켜본 경험이 없는 국민들은 권력을 무조건 의심하거나, 으레 무소불위로 휘둘러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 사람을 살리는 권력은 없고, 가두고 억압하고 죽이는 권력만 있다. <내부자들> 역시 영화의 4분의 3 이상이 권력의 추악함을 전시하는데 할애된다. 그리고 그것을 폭로하는 결말은 한 순간의 카타르시스로 끝나버린다. 여기서 권력의 다른 모습을 상상할 여지가 없다. 영화 속 권력은 잘못 쓰이거나, 또 다른 폭력인 복수의 수단일 뿐이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오스카 쉰들러 역시 <내부자들>의 그들처럼 권력의 정점에 올라 있었다. 타고난 사업적 수완과 수려한 외모, 쉽게 호감을 얻어내는 능력은 살벌한 나치의 통치 하에서도 먹혀들었다. 그는 권력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뇌물을 비롯한 온갖 부정을 저지르면서도, 자신의 사업적 성공과 약간의 자유만 보장된다면 거리낄 게 없는 사람이었다. 영화의 전개를 통해 쉰들러 또한 한때 권력을 탐했다가, 그것을 수단으로 권력자에게 일종의 '복수'를 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자신이 한때 권력자들을 회유해 축적한 전 재산과 인맥을 통해 1,100명의 유대인들을 포로수용소에서 빼돌려 살린 것이다.
사실 실제 인물 쉰들러에 대한 평가는 갈린다. 그가 순전히 더 큰 돈을 위해 유대인들을 살렸다는 말이 있고, 종전 후 이혼을 하고 몇 차례 사업에 실패했다는 개인사까지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적어도 영화 속 '오스카 쉰들러'라는 인물이 자신이 가진 권력을 '용도 변경'할 것을 결정하는 순간은 관객들에게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먼저 쉰들러의 심경에 변화를 주는 여러 인물들이 중간중간 배치된다. 자신의 사업을 위해 스턴이라는 유대인이 꼭 필요했던 그는 나치오부터 몇 번이나 스턴을 구해내는 과정에서 유대인이 처한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매일 아침 일어나 유대인을 사격 총으로 사냥하는 사령관 아몬 괴트의 존재는 쉰들러가 자기 자신을 돌아볼 계기가 된다. 가정부 헬렌의 기구한 운명과, 가족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애걸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은 쉰들러와 관객들의 마음을 조금씩 두드렸다.
쉰들러가 자신이 가진 힘으로 나치 권력에 복수하는 장면은 이보다도 훨씬 더 정교하고, 차분하게 그려진다. 나치의 잔혹성과 수용소의 공포가 배경으로 물러날 만큼 쉰들러의 힘이 새롭게 쓰이는 과정은 세밀하게 묘사된다. 그는 처음엔 한 명, 두 명 아무도 모르게 사람들을 빼돌린다. 찜통 같은 기차에 타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고무 호스로 물을 뿌리기도 한다. 자기 자신도 이해하지 못할 감정에 휘둘리기도 하며 우왕좌왕한다. 유대인 소녀에게 입을 맞췄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기도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내면은 더 단단해지고, 유대인을 구하기 위한 그의 계획은 구체적인 형태로 완성된다. 자신의 공장 노동자 명단에서 시작해, 그의 돈으로 사 올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람 수 1,100명의 이름이 적힌 '쉰들러 리스트'다. 그의 계획은 중간에 틀어지고, 또 다른 강압에 흔들린다. 하지만 강한 의지와 철저한 계획으로 한 단계씩 준비된 복수는 마침내 성공한다. '쉰들러 리스트에' 이름이 적힌 사람들은 죽음의 수용소 대신 생명의 땅으로 넘어간다.
쉰들러의 복수는 권력의 추악함을 폭로하고 물 먹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힘을 거꾸로 생명을 살리고, 부정을 막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쉰들러 리스트'는 권력의 좋은 쓰임에 대한 상상의 지평을 넓혔다. 원래 힘이란 저렇게 쓰일 수 있구나, 거대한 권력도 쓰임에 따라 부패하지 않을 수 있구나 라는 희망을 준다. 순간의 카타르시스를 포기한 대신 권력의 양면성을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냈다.
관객인 우리는 미래 자동차의 회장도, 조국 일보의 주필도, 신정당의 대선후보도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의를 위해 출세를 포기한 검사도, 남의 팔을 자르고 복수를 위해 감옥까지 들어간 깡패도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누군가의 아버지로, 누군가의 상사로, 누군가의 선배로서 가진 작은 권력을 선하게 사용할 수 있는 지혜이다. 우리 사회의 큰 악을 폭로하고, 같은 악으로 복수하는 내용의 영화는 그런 지혜를 가르쳐 주지 못한다.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선한 권력에 대한 상상력이다. 그리고 영화보다 영화 같은 현실 속 작은 희망들이다.
"이 이야기는 실제 실화이고, 당시 폴란드 지역에서 살아남았던 유대인들은 약 4,000명이었으며 그중 쉰들러가 구해낸 유대인들은 1,100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