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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지숙 May 08. 2021

一年百讀_2권<나혜석_조선여성첫세계일주기>

즐겁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


가격: 12,800원

분량: 총 232p

출판사: 가갸날     

글쓴이: 나혜석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동경 유학생이자 서양화가. 1년 8개월 동안의 세계여행 기록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외교관 남편을 있었고, 4명의 자식을 낳았지만 파리에서 터진 연애사건으로 이혼을 하고 무연고 행려병자로 생을 마쳤다고 들었다.      


 이 책은 남편의 추천으로 읽었다. 카페에 앉아 책을 펼친 자리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었다. 여행지에 대한 소개보다는 그녀의 시선이 드러나는 문장에 집중해 읽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의 이야기라는 게 새삼 놀랍다. 2021년, 이 책 속 그녀의 나이를 살고 있는 나는 유럽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지금 당장 내가 세계일주를 한다고 해도 그녀와 같은 현대적인 시선으로 사람과 풍경을 바라 볼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다.      


 떠나기 전의 말

 내게 늘 불안을 주는 네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나. 둘째, 남녀 사이는 어떻게 살아야 평화스럽게 살까. 셋째, 여자의 지위는 어떠한 것인가. 넷째, 그림의 요점은 무엇인가. (...)

 내게는 젖먹이 어린애까지 세 아이가 있고, 오늘이 어떨지 내일이 어떨지 모르는 70 노모가 계셨다. 그러나 나는 심기일전의 파동을 금할 수 없었다. 내 일가족을 위하여, 내 자신을 위하여, 내 자식을 위하여, 드디어 떠나기를 결정하였다.  

- p7     


 마흔 전에 은퇴를 계획 중인 나와 남편은 일 년에 한 달은 여행을 하기로 했다. 일 년 내내 새로운 곳을 떠도는 것은 우리 체질에 맞지 않는 것 같고, 12달 중에 한 달은 마음이 가는 나라나 도시에 머물고 싶다. 바다 근처라면 서핑을 하고, 그렇지 않다면 공원이나 공연장을 찾아다닐 것이다. 중요한 건 사람이다. 어떤 사람들과 만날 것인가. 어떤 이야기와 어울리며 시간을 보낼 것인가. 몇 개의 나라를 다니고 얼마나 오래 여행을 하는가보다. 얼마나 재밌고 멋진 사람들과 시간을 보낼 것인가가 훨씬 더 중요하다.      


 나혜석은 한 프랑스 부부의 집에 머물면서 보고 들은 것이 많았다. 각자의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온 부부는 늦은 시간까지 조잘조잘 비둘기처럼 이야기를 나눴다. 여러 장의 신문을 앞에 두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고, 아내는 매달 잡지와 신문에 기고한다. 어린 아들은 딸과 똑같이 집안일을 돕고 유쾌하고 자유로운 일상을 살아간다. 걸어서 갈 수 있는 미술관엔 거장의 작품들이 걸려있고 그것을 바라보며 수많은 심상을 떠올린다.      

  구미 만유 1년 8개월 동안의 나의 생활은 이러하였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서양 옷을 입고, 침대에서 자고, 스케치 박스를 들고 연구소를 다니고, 책상에서 프랑스어 단어를 외우고.(...)

  그 기분은 여성이요, 학생이요, 처녀로서였다. 실상 조선 여성으로서는 누리지 못할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장애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p87     


 나혜석의 인생은 이 여행 이후 사실상 나락으로 떨어진다. 안타깝지만 그녀에게는 자신의 인생을 홀로 감당할 수 있을 만한 경제적인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남편이 아닌 사람과의 열애설이 터지면서 사회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고 곤궁한 생활을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녀의 글과 그림이 제값에 팔리기만 했더라면. 이렇게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던 그녀가 말년에 홀로 외로운 시간을 보내야했을까. 여유가 있다면 대부분의 시간 외롭지 않게 보낼 수 있다. 돈보다 가치 있는 것이 있지만,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나혜석의 일생은 나에게 그런 단단한 교훈을 남겼다.      


 뒷머리가 가벼워진 뒤로 이유 없이 마음이 들뜬다. 더 많이 움직이고 더 크게 움직이고 싶은 충동이 든다. 점점 더 많은 것을 경험해보고 즐기고 싶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과 내 마음에 드는 활동을 하는 데 점점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몸도 마음도 그 어떤 때보다 기운이 넘치는 요즘 어떻게 하면 그런 미래를 살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금요일 저녁이면 강원도 별장으로 넘어와 시간을 보낸 지 4년째. 지금도 생의 4분의 1은 여행하듯 살고 있지만, 그 안에서도 정해진 일상을 꾸리는 데 더 관심이 늘어간다.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영화를 보다 잠들어도, 아침에 일어나 중국어 수업을 듣고 나면 또 새로운 의욕이 생긴다. 근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면서도 새로 책을 한 권 읽고 이렇게 글을 한 편 쓰면 또 새로운 에너지와 흥밋거리가 생긴다.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서핑 수업을 들을 계획이다. 자유 시간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시간을 어떤 이야깃거리로 채워나갈 수 있을 것인가.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훨씬 더 다양한 것들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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