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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지숙 Feb 03. 2022

한 영웅의 이야기

<나는 피해호소인이 아닙니다> 서평

   

    

지은이김잔디

분량: 306페이지     

출판사: 천년의 상상


 이 책의 서평을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 2020년 7월 9일 그날 오후 북부지검장과의 팀 약속을 가는 길에 몇 개의 지라시를 받았다. 박원순 시장의 실종과 MBC에서 방영예정이라는 미투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현실감이 없는 이야기였다. 이후 장례식과 국가인권위의 발표, 몇 번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1년 반이란 시간 동안 ‘고 박원순’ 관련 크고 작은 사건들이 법원 문턱을 오가는 걸 지켜봤다. 판결에 대해서 서울시 공보 담당자에게 코멘트를 요청했던 기억이 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기만 했다. 우연히 찾은 작은 책방에서 가장 먼저 이 책에 손이 갔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나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충격적인 사건 자체에만 관심을 가졌기에, 뒤늦게나마 그녀의 긴 이야기를 알고 싶어졌다.      


 김잔디. 300페이지에 걸쳐 그녀가 하는 이야기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한두 문장의 뉴스와 보도자료, 몇 분 남짓의 기자회견으로는 알 수 없었던 그녀의 삶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피해호소인’이 아니라 피해자고, 그 사실을 고백하고 온전히 받아들인 다음 스스로의 힘으로 원래의 삶을 되찾아가는 생존자다. 5부에 걸친 이야기는 한 영웅의 삶을 보여준다. 먼저 그녀가 겪은 현실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똑똑히 알려주고, 피해자로 남은 생을 살아가는 과정은 또 얼마나 절망적인지 설명해준다. 그녀는 이렇게 하나하나 제대로 알려주지 않으면, 아니 이렇게 똑바로 진실을 이야기해도 이해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이 책을 세상에 내 준 그녀에게 정말 감사하다. 


 "잠들기 전, 
 자꾸 떠오르는 불쾌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 생각하다가  
 베개를 적시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일입니다. 
 애써 웃으며 넘어가려고 하지 마세요. 
 참다 보면, 돌이키기 어려운 순간이 생길 수 있습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 2021년 3월 17일 기자회견문 중에서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고인이 되었다. 그는 책임을 질 용기조차 없어 스스로 삶을 던졌다. 그에게 수년 동안 위력에 의한 성추행을 당했던 김잔디는 서울시청으로 복귀했다. 그녀는 깊이 찔린 상처를 자기 손으로 꿰매고 붕대를 감아 회복했다. 고 박원순 시장은 자신에 대한 ‘고소 예정’ 사실을 알게 된 지 하루 만에 현실의 고통에서 도망쳤다. 김잔디는 그 후로 500일이 넘는 시간을 매일 피해자로 인정받기 위해 목숨을 끊어야 하나 괴로워해야 했다. 세상은 살아남은 그녀를 더 잔인하게 공격했다. 그녀는 아직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상이 공개되고, 각종 사진과 영상으로 음해당하고, 누군가에게 겁탈당하는 악몽에 시달렸다. 그런 끔찍한 고통의 시간은 앞으로 얼마나 더 이어질지 알 수 없다. 어째서 피해자가 가해자보다 더 큰 고통을 인내해야 하는가.      


  결국 김잔디는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을 바꾸고,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얼굴마저 바꿔야 했다. 어쩌면 평생 약을 먹어야 할지 모른다. 언제 어떤 순간에 그날의 악몽이 떠올라 공황 상태에 빠질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자신의 삶을 살기를 선택했다. 죽음보다 끔찍한 고통이 무엇일까. 그녀의 생존 기록을 따라 읽어가면서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삶은 그의 죽음보다 결코 쉽지 않았다.      


"비참했다. 숨이 가빠졌다. 억울했다. 
내가 고작 이것밖에 안 되다니. 더 크게 소리 지를걸.
그러지 못했던 내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아니지. 
내가 죄책감을 느끼면 안 되지.
나한테 죄책감을 느끼게 하면 안 되지.
멈출 수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이었어" 
- 49p     

 며칠 전 헤어지자는 여자 친구를 흉기로 찌른 뒤 19층 아파트에서 떨어뜨려 살해한 30대 남성은 첫 재판에서 심신미약을 주장했다. 보통의 남성이 여성을 추행하거나 폭행하고, 살해하는 사건은 교통사고만큼 일상적인 뉴스가 됐다. 자신보다 어린 여성에게만 발현되는 선택적 ‘분노조절장애’인 남성들을 마주치면 피하는 게 상책이지 않을까 고민한다. 똑같이 목소리를 높이거나 위협적인 표정이라도 지으면 당장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그런 하루를 보낸 뒤에는 쉽게 잠이 들지 못한다. 그때 이렇게 말했어야 했는데. 적어도 이렇게 받아쳤어야 하는데. 그렇지만 그러다가 죽을 수도 있는데?     

 

  결국 피해자는 물컵 하나 엎어버리지 못한 자기 자신을 괴롭히다 지쳐 그 기억 자체를 잊어버리려고 한다. 가해자는 애초에 기억하지 못하고, 피해자는 기억을 외면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지켜낸다. 어느 누구도 피해자를 대신해 가해자에게 응당한 처벌을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왜곡된 현실에 오랫동안 눈감아 오다보니 ‘피해호소인’이라는 말도 안 되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그것은 인간적인 삶의 존엄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피해자의 권리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인지부조화의 발현이었다.       


 “시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미친 짓이다. 언론에 조명되었던 성폭력 피해자가 본래의 일터로 돌아가는 일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분들이 어디에선가 잘 살고 계시더라도 그 잘 사는 모습이 조명되지는 않는다. 나는 그러한 관습이나 관행, 우리 사회의 모습을 깨고 싶다.”
- 237p     

  <나는 피해호소인이 아닙니다>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마지막 장에 있다. ‘이 구역의 미친년은 나다’로 시작하는 5부의 이야기는 피해자가 생존자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여실히 보여준다. 김잔디는 끔찍한 현실에서 살아남았다. 어느 누구도 그녀의 삶을 파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본래의 일터로 돌아가는 엄청난 계획을 실행으로 옮겼다. 시청의 어느 부서에서 한 사람의 몫을 해내는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김잔디의 얼굴도 목소리도 알지 못하지만 그녀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출근을 해서 직장 동료와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점심 식사 후 한 잔의 커피로 숨을 돌리는 한 사람. 남들은 보지 못하는 큰 용기로 덤덤히 일상을 살아내며, 때때로 무너지는 자신을 끊임없이 쌓아올리는 영웅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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