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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지숙 Mar 08. 2016

무량수전에서 돌아오는 길

3. 뜻밖의 인연 - 샤오스(小時)와 뤄하이(若海)


 무량수전에서 내려오는 길 위에서, 뜻밖의 사람들을 만났다. 카메라를 든 두 사람이 한 여자 모델을 촬영하고 있는데 말하는 것을 들어 보니 중국 사람들이었다. 나풀거리는 중국식 복장을 입고, 영화배우처럼 진하게 화장을 한 여자가 부석사 경내의 풍경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한국 사람도 몇 명 찾아오지 않는 평일 오전의 부석사에서 중국인 세 사람의 모습은 눈에 확 띌 수밖에 없었다. 무량수전에 올라가던 관광객들도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지켜보고 섰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일밖에 남아있지 않았던 나는 말을 한 번 건네 보기로 했다.

이게 어느 시대 복장인 것 같아?


  간단히 자기소개를 하고서 그들의 작업에 대해 물었다. ‘중국 한족의 전통복’을 주제로 촬영 중이라는 설명 뒤에 질문이 이어졌다. <중국의미술> 수업 시간에 봤던 미인도가 떠오른 덕분에 답을 맞힐 수 있었다. 양귀비로 대표되는 당나라 시대의 한족 전통 복색이라고 했다. 내가 자기들과 비슷한 또래에 혼자 여행을 왔다는 이야기를 듣더니, 차로 함께 올라가자는 말이 나왔다. 버스와 기차로 4시간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야 했던 내겐 더없이 좋은 제안이었다. 다만 자신들의 촬영이 해가 지는 풍경을 찍는 것으로 마무리되어야 하니 그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 직접 모델의 화장을 하고 있는 샤오스


 이때까지만 해도 그들이 그저 학생들로 취미 삼아 사진을 찍는 건 줄 알았다. 하지만 서울에서 몇 시간이나 떨어진 이 곳 부석사까지 찾아와 촬영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한국에서 유명한 4대 사찰 중 하나라고 들어서” 중국 사이트에 그렇게 설명이 되어있었다는 대답을 들었지만 그래도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서 차로 3시간을 달려 내려왔다는 이야기인데 며칠간의 짧은 일정에 소화하기는 쉽지 않은 여정이었을 것이다. 오직 이곳 부석사의 무량수전에서 내려다본 풍경을 담기 위해 그 먼 길을 찾아왔다니. 나는 되지 않는 중국어로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이며 부석사에 관한 역사에 대해 알려주려 애썼다. 왠지 그렇게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한국에서 ‘전통적’인 게 무엇일까? 설명해 줄 수 있어?
@ 샤오스의 작품 가운데 하나_위챗 게시글

 알고 보니 이들은 취미로 사진을 찍는 게 아니었다. 진수생(進修生) 과정 중에 있는 샤오스(小時)가 개인적으로 일을 하는 것이었다. 진수생은 대학 본과 과정을 마치고, 석사과정에 진입하기 전에 1년간 예비 공부를 하는 과정이다. 일과 공부를 병행할 수 있는 준비기간이라고 볼 수 있다. 영상제작을 전공으로 공부한 그녀는 돈을 받고 사진을 촬영해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번 한국 방문은 그 일정 가운데 일부였다. 그리고 그녀의 대학 동기 뤄하이(若海)는 예능 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 찍는 일을 하고 있었다. 관광지에서 우연히 만난 나를 자신들의 차로 흔쾌히 초대한 것 역시 그들이 찍는 화면의 좋은 소재거리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선족 기사가 딸린 커다란 벤에 올라타면서부터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뒷좌석에 조명을 켜두고 우리 세 사람의 대화를 그대로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질문이 이어졌고, 대화는 그 꼬리를 물었다.


 한국적인 것은 무엇인가. 한국사람들은 왜 한복에서 멀어졌을까. 현대 사회에서 전통적인 것이 사라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처음에는 온전히 한국적인 것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했다. 나는 방금 우리들이 구경하고 온 ‘부석사’와 같은 조형물들이 한국적인 미를 설명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중국의 고궁 박물관, 자금성의 규모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인공물이지만 한국적인 것은 자연 그대로를 풍경과 주제로 받아들이는 조화 가운데 아름다움을 추구한다고 대답했다.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자연미. 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했던 바를 들려주었다.


 한국에서 전통적인 것들이 사라져간 이유에 대해서는 일제 시대라는 단절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우리들의 전통은 우리들의 선택에 의해 순리대로 사라져간 것이 아니다. 많은 것들이 우리의 의지나 선호와 관계없이 쓸려나갔다. 그 자리를 빠르게 매운 것이 서구의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였다. 결과적으로 우리만의 자생력을 키워나갈 기회를 빼앗겼고, 그 여파가 오늘날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들에 대한 독자적인 해결법을 찾지 못하는 상황으로까지 이어진 것 같다. '전통의 미'란 단순히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내 또래의 중국 사람들에게 우리나라의 문제에 대해 설명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정리되는 바가 있었다. 방송 PD를 꿈꾸며 닥치는 대로 읽어왔던 텍스트와 영상에 대한 내 생각이 하나로 관통되는 느낌이었다. 우리 역사의 치부에 대해 이야기하려니까 조금 부끄러운 생각도 들었다. 좋은 면에 대해 자랑스러운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도 부족하지 않을까. 복잡한 심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이야기하고 싶었다. 적절한 중국어 표현이 떠오르지 않으면, 조선족 기사 아저씨가 도움을 주셨다. 일단 하고 싶은 이야기가 끊기지 않으니까 어휘나 표현의 부족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들은 한 번도 투표를 해본 적이 없어. 그리고 관심도 없지.
@ 샤오스의 작품 가운데 하나 - 위챗 게시글


동갑내기인 뤄하이는 연방 중국에도 역시 ‘문제가 많다’는 말을 반복했다. 한국적인 것에 대한 질문, 전통적인 것이 사라져가는 상황에 대한 반추는 자연스레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문화적인 것의 문제는 곧 사회, 경제적인 문제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언어와 전통을 공유하지만 살아온 시대가 다른 사람들보다 말과 국적이 다른 같은 세대의 사람들끼리 통하는 바가 더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가치와 흐름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흔들리는 차 안에서 연신 “문제가 많아. 정말 문제가 많아”라는 말을 반복하는 일 뿐이었지만 그것을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청년 세대는 기본적으로 기성 사회에 대한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정작 그 불만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다른 문화적 배경 속에서 어떤 현상으로 나타나며, 공통의 근원적인 뿌리가 무엇인지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다.


 근 10년간 한국이 겪은 문제들을 중국은 더 빠른 속도로 통과 중이다. 개방을 미뤄온 만큼 충격파도 클 수밖에 없다. 빠링허우(80后), 지우링허우(90后) 젊은이들이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학습하는 속도는 엄청나며 그 반대급부로 부작용 역시 심각하다. 빈부격차, 세대 간의 갈등, 노동 시장의 문제. 그들은 우리 사회보다 더 심하게 앓고 있으며 문제의 해답을 찾아가는데 필요한 민주 정치의 길도 요원하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더 희망이 있어 보인 것은 그들이 가진 자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 스스로를 고립시켰을지언정 자신의 것을 먼저 주장하는 내부적인 힘이 남아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의 역사와 전통 안에서 스스로 답을 찾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온고지신할 수 있는 과거의 것이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아 원래부터 그것이 별 것 아니었던 것처럼. 혹은 고릿적 옛날에나 의미가 있었을 '역사의 환영'으로밖에 상기되지 않는다.


미국, 네팔, 베트남, 일본과 한국 촬영은 마쳤고
다음 달부턴 유럽, 아이슬란드 일정이 잡혀있어

@ 인도, 네팔에서의 촬영 - 위챗 게시글


 샤오스는 세계 각국을 배경으로 한족의 전통 의상을 입힌 모델의 사진을 찍어 왔다. 150센티가 겨우 넘을 체구에 묵직한 캐논 카메라를 짊어지고 무량수전 앞 안양루의 난간 끝에 기대서 끈질기게 셔터를 누르던 그녀의 모습은 앞으로 오랫동안 기억될 것 같다. 그녀는 현재 남아 있는 문헌이 얼마 되지 않지만 한족의 전통 화장법과 복색을 스스로 연구해서 촬영 콘셉트를 잡는다고 했다. 오늘 나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처럼, 직접 세계의 각 나라를 찾아가 그들이 생각하는 ‘전통적인 것’에 대해 묻고 그 대답을 기록하며 나름의 답을 정리해갈 것이다. 몇 시간의 촬영으로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서도 카메라가 돌아가자 다시 또렷한 정신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모습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한국에선 공부랑 일을 함께할 수 없어?
@ 직접 화장을 하고 전통 복색을 입힌 인물 사진을 찍는 샤오스

 나 역시 방송 프로그램을 연출하고 싶고, 내 이름을 걸고 기사와 글을 쓰고 싶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벌써 몇 학기째 졸업을 미루고 취업 준비 중이다. 나보다 2살 많은 샤오스는 벌써 자신만의 필모그래피를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었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졸업을 미루는 중이라는 내 이야기가 이상하다고 묻는 그녀 덕분에 지금까지 내가 ‘무엇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 열심히 준비한 끝에 결국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그리고 지금 나 혼자서 시작해볼 수 있는 일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어느 자리에 가서, 어떤 명함을 파지 않아도 계속해나갈 수 있는 일에 대해 처음부터 생각을 정리해봤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하루하루 완성해나가는 것. 어떤 회사에 적을 두는 취업(일정한 직업을 잡아 직장에 나감)과 동시에 ‘나의 일’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꼈다.


人生的遗憾

 마지막으로 두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화제가 다양해서 즐거웠다. 이날 마침 가방에 챙겨둔 책이 중국 노벨상 수상작가 모옌의 작품이었다. 두 사람은 한국어로 쓰인 그의 작품 '열세 걸음'이 신기한지 사진으로 찍었다. 우리는 장이머우 감독의 '5일의 마중'이란 영화에서 좋았던 한 장면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중국 대중가요, 희곡(戱曲)을 검색해 들으며 서로 같은 것을 즐겼던 경험을 나누었다. 언제부터인가 어떤 콘텐츠를 접하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방법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는데, 뜻밖에 만남을 갖게 된 친구들과의 대화하는 데 그 습관이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한국인인 내가 양귀비가 부른 <梨花頌>을 추천하며 '인생의 한(人生的遗憾)'이 느껴지는 곡이었다고 덧붙이니 두 친구들이 나를 굉장히 흥미롭게 쳐다봤다. 무량수전은 그곳에 오르면서부터 내려와 집에 돌아오기까지 나에게 좋은 추억들을 많이 만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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