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석천의 <정의를 부탁해>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최근 영화 <동주>를 본 사람이라면 그의 시가 결코 ‘쉽게’ 씌어지지 않았음을 알 것이다.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렸던 그는 누구보다 어렵게 시를 써내려 갔을 것이다. 하지만 쉽게 씌어지는 것이 부끄러운 것은 시뿐만이 아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해 국가 권력의 강제력을 수반하는 사회 규범. 바로 법 조항에 따라 쓰여지는 법조문이 또한 그러할 것이다.
법조문이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법학을 전공했지만 정작 대학시절 ‘김수영과 이성복과 황지우의 시집을 뒤적이다 늦은 밤 도서관 문을 나섰’다는 25년 베테랑 기자 권석천은 그의 책을 통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자기 주장을 하기보다 논쟁하는 이들의 말을 귀담아듣기를 좋아했다는 그는 80 여 개 칼럼을 통해 어렵게 제 목소리를 들려준다. ‘정의란 무엇인가?’ 질문을 던지고 답을 하기보다 ‘정의를 부탁한다’는 그의 책 제목이 진실되게 느껴지는 이유는 법을 전공하던 대학시절부터 25년간 기자라는 이름으로 살아오는 내내 방황하고 애쓰고 헤매었다는 그의 솔직한 자기고백이 담긴 서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판결문을 쉽게 쓰는 법조인이 늘어나는 현실을 걱정한다. 그는 먼저 한 편의 칼럼에 특목고 – 명문대 출신의 법조인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몇몇의 목소리를 담았다. 명석한 두뇌와 성실한 노력으로 비교적 수월하게 판결문을 쓰는 법조인의 숫자는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법조문이라는 기존의 틀을 넘어서 더 큰 정의에 대해 상상하고 고민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의란 객관성, 중립성, 논리성, 합리성 너머의 가치이다. 솔로몬의 재판이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이유는 그가 아이를 둘로 나누라는 판결 속 ‘작은 정의’를 통해 생모가 누군지 밝혀내는 ‘큰 정의’를 실현했기 때문이다.
“대원외고-서울대 나온 판사는 판결문은 잘 쓰는데 누가 승소인지 판단을 잘 못한다” (한 부장판사의 말)
“대원외고요? 일 잘하고 예의도 바르죠. 다만 걱정되는 부분은.. 어떤 게 논리적이고 판례에 맞느냐부터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재판기록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파 들어가고 누굴 보호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아요. (법원장 출신 변호사 말)”
큰 정의는 법의 상상력에서 비롯된다. 판결문이 쉽게 써져선 안 되는 이유는 철저한 응징과 보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회복과 화해, 반성이라는 더 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기존에 없던 창의적인 방법을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법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피해자와 가해자 나아가 사회 전체가 정의를 실천하며 살아가기 위해서 법이라는 형식 논리에서 벗어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기존의 논리와 합리성을 뛰어넘는 시도들은 그것을 둘러싼 주체들의 이해와 지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헌법’이라는 위대한 규범을 갖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서로에게 정의를 부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법의 가식에는 회의적 태도를 취해도 되지만,
법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냉소적 태도를 취해선 안 된다.
- 알비 삭스 <블루 드레스>
나는 일찍이 더 큰 정의를 위해 서로에게 양해를 구하며 법적 상상력을 발휘한 판결문들을 알고 있다. 가장 최근의 사례로는 미국 연방법원에서 동성애 결혼을 합법화하면서 내린 판결문이 있다. 작년 6월 미국의 연방법원은 다음과 같은 판결문을 발표했다.
결혼보다 심오한 결합은 없다. 결혼은 사랑, 신의, 헌신, 희생 그리고 가족의 가장 높은 이상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혼인관계를 이루면서 두 사람은 이전의 혼자였던 그들보다 위대해진다.
오랫동안 동성애 결혼을 반대해왔던 미국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을 바꾼 것일까? 여전히 일부 기독교 보수 단체들은 연방법원의 판결을 부정하고 있다. 찬성 5명 반대 4명이었다. 단 한 사람의 지지를 얻어낸 것만으로 많은 것이 바뀐 것이다. 동성애 결혼을 허용하는 판결문에서는 ‘가족과 결혼’이라는 더 큰 가치로 동성 간의 사랑을 묶어냄으로써 반대론자들을 설득했다. 동성애자들이 청원하는 이유는 그간 ‘이성 간의 결합’으로 정의되어왔던 결혼 제도를 멸시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와 보수주의자들 이신성 시 여기는 가족과 결혼을 깊이 존중하기 때문에 자신들 역시 그것을 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법적 수사는 보수적이었던 한 대법관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 자신의 가치관 안에서 동성애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주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 이질적인 것을 더 큰 정의의 이름 아래 하나로 묶어내는 상상력이다.
이보다 오래된 사례로 남아공의 <진실화해위원회>가 있었다. 나는 인종차별 정치 아래 잔혹 행위의 가해자가 진실을 밝힐 경우, 그의 죄를 용서해주기로 한 그들의 합의야말로 법의 테두리 안에서 실험할 수 있는 가장 큰 정의였다고 생각한다. 그들은‘회복적 정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응보가 아닌 화해, 처벌 대신 진실을 밝히는 일이 중요하다는 데국 민적 합의를 이루었다. 기존의 법적 논리로는 아파르트헤이트라는 끔찍한 과거를 청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인물이라도 사람들 앞에 자신이 저지를 죄를 낱낱이 고백하면 용서해주었다. 피해자는 작은 사람들을 위한 위원회에서 자신이 겪은 일들에 대해 진실을 말할 기회를 얻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텔레비전을 통해 전 국민에게 전달되었다. 이 과정에서 모든 사람이 역사적 사건의 증인이자 책임이 있는 관계자가 되었다. 가해자 역시 스스로 저지른 비 인륜적이 고잔 혹한 행위에 대해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과정에서 ‘수치의 처벌’을 충분히 감당하게 되었다. 피해자와 가해자 나아가 전 세계가 공통의 역사를 갖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공정한 피해보상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동성애자가 결혼 제도와 가족 공동체를 신성시 여긴다? 작은 사람들을 위한 위원회와 ‘수치의 처벌’? 기존의 판례와 법조문을 아무리 논리적으로 조합한다고 해서 이런 판결문이 나올 수 있을까. 나는 법에는 문외한이지만 주어진 과제를 효율적으로 해치울 고민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답안일 것이라 생각한다.
판결문은 한 편의 시만큼이나 씌어지기 어려운 것이어야 한다. 법의 논리가 어떤 문제에든 쉽게 적용되면 어떤 폐해가 생기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권석천 기자는 법을 공부한 사람답게 한국의 주요 법적 분쟁 사건에 대해 빠짐없이 논평을 남겼다. 2013년 서울 중앙지법은 판결문을 통해 종북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 북한과 연관되었다고 인정된 사건들에 있어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입장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
–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는 사람들
– 주체사상을 신봉하고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부정하는 반사회세력
앞의 두 문장에 주목하자. 법적 합리성을 앞세운 모호하고 광범위한 정의만으로 국민 대다수를 막연한 공포로 몰아넣을 수 있는 게 판결문이다. 2008년 촛불집회 참가자들과 ‘광우병’ 보도를 했던 MBC <PD수첩> 제작진들은 형사재판에 넘겨졌지만 헌법불합치, 1,2,3심 모두 무죄 판결을 내렸다. 논객 미네르바 역시 허위사실 유포죄로 법의 심판을 받았지만 무죄, 위헌으로 풀려났다. 판결문에 앞서 법의 잣대가 일반 시민들에 게까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자기 내부의 합리성은 꼭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실제 재판 과정은 실험적이고 모험적인 가설들로 시작해 의심과 논쟁을 거쳐 어떤 실수의 가능성도 없다고 생각하는 마지막 순간에 판결문으로 작성된다.- 알비 삭스 <블루 드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