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한 실패’가 필요하다
이제 중학교 3학년인 과외 학생의 어깨가 축 처졌다. 고민되는 일이라도 있느냐고 물었더니 지난 중간고사 성적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전반적으로 쉬운 문제들이었는데 실수를 하는 바람에 등수가 쭉 미끄러졌다고 그런다. 곧잘 상위권에 드는 아이였기에 압박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는 생각부터 들었지만 뒤이어 그가 내뱉는 말들이 27살 내가 얼마 전에 했던 생각과 똑같아 가슴이 철렁했다.
뭘 잘해서 칭찬을 들어도 기쁘지가 않아요.
어차피 작은 실수만으로 모든 게 어그러질 수 있는데,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앞으로도 그런 나쁜 일들이 반복될 거라는 생각을 멈출 수 없어요.
‘실수’가 곧 ‘모든 것의 실패’로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전적으로 성과지향적인 발상이다. 결과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은 고질적인 문제를 낳는다. 한 끗이라도 어긋나면 모든 것이 어그러질 것만 같은 두려움은 먼저 현실에 대한 인식을 왜곡시킨다. 이로 인해 지나치게 안전지향적인 선택을 하게 되고, 눈앞에 닥친 문제를 새롭게 설정하고 낯선 방식으로 접근하는 발상 자체가 어려워한다. 가장 우려되는 결과는 성장과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경험의 축적, 즉 ‘정직한 실패’의 경험마저 되도록 피해 가는 선택을 반복하는 경향이 생기는 것이다. 16살의 소년과 27살의 청년이 피부로 체감하고 있는 이 두려움은 현재 대한민국 대부분의 구성원 사이에 공유되고 있다.
최근 구조조정의 몸살을 앓고 있는 조선, 해운 산업 역시 지난 20여 년간 이 같은 두려움에 쫓겨왔다. 2000년대 한국은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성공 사례’ 즉 '아시아의 기적'이라는 타이틀을 이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써왔다. 이 시기 조선업계 1위로 올라선 후 10년 정도 독주체제를 이어왔던 한국의 조선 산업은 세계 1위부터 4위까지를 석권해 독과점의 우려까지 나올 정도였다. 숙련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방식의 ‘정직한 실패’를 거듭하며 창조적 역량을 성숙시켜야 하는 단계에 올랐다. 하지만 세계 3대 조선사와 STX는 자기들끼리의 수주 경쟁에 매몰되어 무리하게 단가를 낮추는 방식으로 산업 점유율을 지키는데 급급했다.
두려움에 쫓겨 열심히만 살아온 사람은 위기를 성장의 기회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2000년대 후반 세계경제에 위기가 닥쳤고, 선박 건조 주문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위기 상황에 닥치자 생산단가를 낮추는 것만으로는 생산성을 높이기 어려운 한계에 도달했다. 이미 해외 사업자들 사이에선 한국 조선사에 수주를 맡기면 4조 원 규모의 사업을 3조 원만 들여해 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자기들끼리 수주 경쟁을 하느라 최종 낙찰 가격이 저절로 곤두박질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조선업계를 주도하고 있는 사이, 단순히 가격 경쟁력이 아닌 차별화된 기술력과 프로젝트 설계 역량을 강화했더라면 스스로의 발목을 잡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다. 더욱이 조선, 해운 산업과 같이 국제 경제 정세에 영향을 크게 받는 분야라면 당장의 수주사업의 규모만큼이나 ‘정직한 실패’를 가능케 할 실험적 과제들에 관심을 쏟았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정직한 실패’ 대신 과거의 성공 경험을 ‘재탕’ 하려는 실수를 범했다. 사업 다각화를 꾀하며 시작한 ‘해양 플랜트’ 산업에서 과거 조선 산업에서의 실력과 가격 경쟁력을 생각하며 정직하게 시행착오의 경험을 쌓는 과정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그 결과 어렵게 따낸 사업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고 또 다른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2000년대 말 조선산업의 부진으로 위기에 빠진 조선업계는 불과 2~3년에 걸쳐 앞다투어 해양 구조물 건설 사업에 뛰어들었다. 2012~2013년 당시 국내 조선사들의 평균 매출의 50~75%가 해양 플랜트 사업에서 나왔다고 하니 업계의 무게중심이 ‘선박 건조’로부터 크게 이동했던 것을 알 수 있다. [1]
해양 플랜트 사업은 바다 위에 대형 구조물을 짓는 일로 일견 큰 배를 만드는 조선사들이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일처럼 보였다. 그러나 바다 위에 정박해서, 해상부터 해저 수천 미터 아래 구조물을 짓는 일은 고도로 특화된 공정과 기술을 필요로 했다. 우리나라 조선사는 전체 공정인 EPCI, 엔지니어링(Engineering), 구매(Procurement), 시공(Construction), 설치(Installation) 가운데 ‘시공(Construction)’ 분야에서만 참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시공 일만 맡아서 하기에는 마진이 크게 남지 않았다. 과거 조선업계에서 단시간에 일본을 따라잡은 ‘성공경험’이 있던 조선사들은 해양플랜트 사업 역시 몇 년 안에 쉽게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뒤쳐져서는 안 된다는 두려움이 왜곡된 현실 인식을 낳았다. EPCI 각 공정은 수십 년간 직접 도면을 그리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노하우를 쌓아온 기업들이 있었다. 그들이 오랜 시간을 거쳐 축적해온 경험의 힘을 우리나라 조선사들은 ‘얕잡아’ 본 것이다.
결국 욕심대로 해양플랜트 사업 전 공정을 맡아서 하게 된 국내 조선사들은 ‘경험 부족’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 했다. 국내 조선사들은 차별화된 기술력도, 프로젝트 설계 능력도 없어 시공기간을 단축시키는 이른바 ‘가격 경쟁력’으로 승부를 봐야 하는데, 해양 플랜트 사업을 실제 진행하는 과정에서 예상보다 훨씬 많은 시행착오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그동안 충분한 시간을 들여 크고 작은 실수를 하며 문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고민을 해오지 않았기에 막상 실전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들로 번진 것이다. 공사 기간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이에 따라 발생하는 추가 비용이 급증했다. 이런 식으로 건설된 구조물은 안정성에 대한 신뢰를 얻긴 어려울 것이다.
‘정직한 실패’의 필요성을 과소평가 해온 결과, 대한민국은 작은 실수로 어그러질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누구보다 성과에 목을 매지만 정작 이를 위해 필요한 실패 경험을 축적하는 데 무심했다. 작은 실수를 용납하기보다 패배자 낙인을 찍기 좋아하고, 경쟁의 목표가 성장이 아닌 순위를 다투는 일 자체가 되었다. 작은 실수가 모든 것을 어그러뜨릴 것이란 두려움은 당장 눈 앞에 닥친 현실 문제를 직시하고 진짜 대안, 창의적인 대안을 떠올리는 방법을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과거의 작은 성공 경험에 매몰되어 그것을 재탕, 삼탕하고 멋진 실패를 위한 시도는 우습게 보고 있다. 그러나 저성장, 위기의 만성화, ‘가격경쟁력’의 한계에 직면한 우리는 뒤돌아서야 한다. 두려움에 쫓겨 빨리 달리는 일보다 한 템포 천천히 주변 지형지물을 살피며 걸어나가야 한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도 겪고 있는 크고 작은 실수와 실패들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충분히 고민해야 한다.
[1]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축적의 시간>, 지식노마드, 2015 내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