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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다샤 Aug 15. 2020

수상한 집 - 광보네

5 -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어떻게 이렇게 어려운 결정을 하셨어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텐데 대단하시네요.”


“돈이 아깝지는 않으셨어요?”


광보 삼춘의 사연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수상한집을 찾아와 광보 삼춘과 이야기를 나눌 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다. 특히 언론사의 기자들은 더욱 더 그렇다. 국가로부터 받은 배상금을 자신이나 가족을 위해 쓰지 않고 자신과 같은 아픔과 상처를 위해 기념하는 일에 돈을 쓰는 것에 대해 모두가 힘든 결정이라고 한다. 가난하게 생활하고 천대받고 멸시받으며 생활했던 수십 년의 시간을 생각한다면 번듯한 집도 사고, 아이들에게 그동안 고생했던 보상으로 배상금을 나눠줄 법도 한데 그는 단 한 푼도 개인이나 가족을 위해 쓰지 않고, 모두를 위해 내놓았다. 그게 보통의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몇 억의 돈을 흔쾌히 내놓았다는 결과만을 놓고 보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결과만을 놓고 보았을 때 생기는 오해다.   

   

어제도 한 명의 기자가 와서 인터뷰를 하자고 했다. 지역 인터넷 신문사였는데, 30여분 인터뷰를 마치고 나가는 기자 뒤에 한마디를 한다.


“뭘 자꾸 어려운 결정, 어려운 결정 그래? 수상한집 짓는 것이 뭐가 어렵다고...”


요즘 부쩍 듣기 싫어하는 눈치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어려운 결정이라는 것은 본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어려운 결정이라는 것이다. 광보 삼춘의 입장에서 보면 어려운 결정이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적어도 결정의 순간에는 아무런 고민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가 수상한집을 짓자고 결정하기까지의 과정을 이해하면 그의 결정이 세상사람들 생각하듯 돈 아깝다는 생각 들지 않았을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는 혼자가 아니다. 가족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적어도 일본에서 결혼을 하고 아이도 두었다. 1986년 보안대에 잡혀갔을 당시 화북동(화북동 4204번지) 집에는 남겨진 아내와 아이들이 있었다. 잡혀간 후 70여 일간 그 독하다는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견뎌낸 그였지만, 허위자백을 인정하지 않으면 광보 삼춘 가족을 연행해 똑같이 고문한다는 협박에는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광주교도소를 거쳐 전주교도소로 이감되어 91년 출소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그가 전주교도소에 머무는 동안 가족은 단 한 번도 면회 오지 않았다. 여자 홀몸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생활하는 것이 보통이겠느냐는 생각에 면회 한 번 찾아오지 않는 아내와 가족들을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제주에서 광주, 전주까지 면회 한번 오려면 적어도 3일을 잡아야 한다. 3일 벌이를 하지 못하면 그 기간만큼 굻어야 한다. 그런 처지를 이해하면서도 같은 방에 있던 동료 재소자들이 면회 왔다는 말을 들을 때는 그저 부럽기만 했다.      


그렇게 몇 년간을 버텨냈고 결국 출소일이 다가왔다. 

출소 당일에도 그는 혼자였다. 기차를 타고 전주에서 목포로, 다시 배를 타고 목포에서 제주로 향했다.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그가 살던 화북1동 4204번지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집은 낯설었다. 몇 년간 떨어져 살았던 시간의 공백 때문만은 아닌 듯 했다. 훌쩍 커버린 아이들도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아내도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렇게 없는 사람 취급받던 그는 며칠 만에 집을 나왔다. 그리고는 아버지가 벽돌 하나하나 손수 쌓아 지은 도련동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것이 가족과 지냈던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 그는 부모님과 20여 년간 살았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도 그는 그 집에서 살아야 했다. 광보 삼춘은 자신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섭섭했다. 모진 고문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가족을 지키기 위함이었는데 돌아보니 그것이 모두 허망한 일인 것만 같았다. 그는 가족과의 교류 없이 20년간 지내게 되었다. 딱 한번 딸아이가 집으로 찾아와 결혼한다는 말을 전하기에 그는 막일 하며 모았던 돈을 결혼자금에 보태라며 모두 건넸다. 혹시나 가족과의 관계가 나아질까 하는 기대감은 곧 거둬야 했다. 결혼식 이후로 다시 연락은 두절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가족과 다시 연락을 시도한 것은 2017년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직후였다. 그는 본인의 잘못이 아닌 보안대의 조작에 의해 간첩이 되었다는 것이 증명된 것만으로도 가족이 자신을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국가의 잘못을 인정받았고, 이제 배상금으로 가족과 다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아내와 함께 사는 딸 아이 집을 찾았다. 어렵게 수소문해 찾아간 가족의 집에서 그가 들을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광보 삼춘과 엮이거나 상관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었다. 가족들은 왜 광보 삼춘을 받아들일 수 없을까?


한참 후에 아내의 지인을 통해 그 이유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가족이 왜 나를 피하는가, 참 섭섭하다 생각했는데 그게 나밖에 생각 못한 거란 걸 알았지.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면 죽어도 버텼어야지 왜 허위자백을 했느냐는 거냐. 나는 살았지만 내가 간첩이라고 허위 자백한 그날부터 가족들은 고통 속에 살아가야 했다는 거야. 가장 힘들 때 내가 없었으니 가장으로써 책임을 하나도 하지 못한 것이지. 그러니 무슨 낯으로 가족을 보겠어.”


그의 잘못도, 가족도 아니다. 그저 그를 잡아가고, 고문하고 가뒀던 국가기관이 잘못한 것이다. 무죄가 되어도 가족은 그를 용서하지 못한다. 그에게 무죄는 아직도 진행형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국가배상금을 어떻게 할 것인지 쉽게 결정할 수 있었다. 그는 이 집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내 잘못이 아니다. 당신 잘못이 아니다. 우리 잘못이 아니다.’ 수상한집을 통해 이곳에 오는 사람들에게 광보 삼춘은 그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수상한집을 만들게 되어 좋지. 이젠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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