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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는 잘 있습니다 Sep 20. 2020

노력하면 될 것 같지? 아니야. 세상은 운이야.

글로 쓴 자화상

너희들 노력하면 될 것 같지? 아니야. 세상은 운이야.


사법고시를 10년 준비하다 인터넷 강의 강사가 된 법과 사회 선생님이 그러셨다. 시험의 결과를 좌우하는 것은 운이라고. 물론, 백 퍼센트의 운으로 노력 없이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은 불가능하니 그가 한 말이 과장된 것이라는 것을 찬호는 알고 있었으나 그 후 삶의 여러 순간에서 여러 차례 낙방을 했던 그는 그때마다 그 강사의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인내는 쓰나 그 열매는 달다'

중학생이었던 어린 찬호의 책상에 붙어 있던 글귀였다. 찬호는 이 말을 신봉했다. 그는 새벽잠을 쫓으며 이를 악물고 공부하여 반에서는 1등, 그리고 전교에서는 열 손가락 안에 들었고 그는 그 글귀가 마음에 들었다. 하늘은 찬호가 참고 인내한 만큼의 결과를 항상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특목고에 진학하고 입시를 준비하면서 그는 자신이 인내한 만큼 합당한 열매를 항상 맛보지는 못한다는 것을 차츰 알게 되었다.  찬호의 전교 등수는 어느새 반 등수가 되어있었고, 성적표를 자신 있게 부모님께 보여드렸던 예전과 다르게 이제 그는 성적표를 가방 속에 숨기게 되었다.

고3이 되자 찬호는 노력 이외에  '운'이라는 것이 결과에 개입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독 찬호는 실전에 약했다. 걱정과 불안감이 심했던 그는 연습에는 강했지만 실전에서는 늘 긴장감을 다스리지 못했다. 8월이 되자 '1학기 수시'라는 제도로 옆 반 한 친구는 수능을 보지 않고도 먼저 대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2학기가 되자 먼저 대학생이 되어 학교에 나오지 않는 친구들의 빈 의자가 점점 늘어만 갔다. 찬호는 친구들의 빈자리를 보며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수능. 그 해 수능에서 평소 모의고사 점수보다 월등히 높은 점수를 받아 명문대에 입학한 친구들이 많았으나 찬호는 그들에게 진심 어린 축하를 해줄 수 없었다. 그는 그들과 반대로 평소 실력보다 형편없는 점수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 후 찬호는 재수, 삼수, 편입을 시도하였으나 결국은 그가 원하는 대학교에 가지 못하였다. 남들이 그에게 왜 재수, 삼수, 편입 했는지 물어보면 그는 '열심히 하지 않아서'라고 답했다. 그 이외의 말은 남들이 듣기에 구차한 변명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들에게 찬호는 열심히 하지 않아 대학을 늦게 들어간 사람에 불과했다. 사실, 다른 사람들보다 유독 찬호는 자신 자신을 엄격하게 패배자로 치부해버렸다. 그가 그동안 새벽잠을 줄여가며 공부를 했고, 수업 시간에 졸지 않고 집중했으며 매일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했던 시간들은 이미 무의미한 일들이 되어 그의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에게 그 시간들은 노력이 아니었다.

대학생이 된 그는 더 이상 노력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는 조용히 대학에 다녔고 그렇게 조용한 날들이 이어졌다. 어느 날 그는 길을 가다  지하철 문에서 익숙한 글귀를 보았다.

'인내는 쓰나 그 열매는 달다'

 그는 그 글귀가 신물이 나고 역겹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세상은 운이라던 강사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 맞아. 세상은 운이야.'


그는 지쳐버렸다. 그는 자신에게 더 이상 실망하는 것이 두려웠다. 실패할 때마다 좌절을 겪었던 찬호는 이미 자존감이 땅에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때마다 다시 자신을 부추겨 겨우 일어났고 새로운 목표를 향해 빠르게 나아갔지만 돌아오는 것은 똑같았다.

 그는 노력해도 실패할 것이 뻔하니 더 이상 자신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들이 취업준비를 할 때  그는 누구나 쉽게 들어갈 수 있는 직장에 취직했다. 그러나 그의 직장과 직업이 그가 원하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그는 이직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그의 꿈은 교사였다. 사범 대학을 졸업한 그는 교사 자격증은 있었으나 결코 임용고시를 봐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미 많이 무너져버린 자존감과 체력으로 대학 입시도 아닌 고시 공부를 한다는 것이 가당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시 공부는 끝을 기약할 수 없어 길면 3년, 5년, 혹은 더 길게 준비하는 사람들을 그는 숱하게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오랜 고민 끝에 고시 공부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안될 거야, 또 실패하면 어떡하지? 이번에도 실패하면 나는 일어날 수 없을 거야'라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임용고시 준비를 시작했다. 뒤늦은 결정 때문에 시험일까지 고작 6개월이 남아 있었으나 그는 매일 직장인처럼 도서관으로 출퇴근하였고 마지막 도전이라는 생각으로 시험을 치렀다. 그 결과 1차 시험에서 1점 차이로 낙방하였으나 여느 때와 다르게 찬호는 시험에 떨어졌어도 억울하거나 속상한 마음보다 기쁜 마음이 더 컸다. 불과 1점이 부족한 것이니 1년만 더 공부하면 합격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후 찬호는 상반기에는 대체 강사로 일하면서 고시 공부에 필요한 돈을 벌었고 하반기부터 다시 공부에만 집중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듬해 1월 임용고시에서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그가 합격하자 많은 변화가 생겼다. 그가 다녔던 대학교에는 그의 이름이 적힌 현수막이 내걸렸고 그는 합격생 사례 발표회에 불려 다녔다. 누군가는 그에게 합격수기를 써달라 하였고 주위 지인들은 그가 쓰던 책들을 주라고 요청했다. 심지어 그가 썼던 지저분한 오답노트나 암기 단어장까지도 비싸게 돈을 주고 살 테니 팔라는 이도 있었다. 그는 이런 변화 속에 자신이 신격화되고 영웅이 된 느낌이었다.

그는 객관적으로 생각해보았다. 그가 임용고시를 준비했던 준비 기간 전체  중 어떤 날은 열심히 하였으나 집중이 되지 않아 책 한 장 펴 보지 않고 쉰 날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합격하자 어느새 그의 모든 일분일초는 오로지 공부에만 집중한 것 마냥 미화되어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그리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는 아주 노력을 한 사람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그것은 단지, 그가 합격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의아했다. 그가 입시를 준비하던 때도 그는 고시생 못지않게 열심히 했었다. 그러나 내가 그때 쏟아부었던 노력들은 왜  인정받는 못했는가? 왜 사람들은 낙방한 사람들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을까? 심지어 찬호 자신조차도 자신이 열심히 하지 않아서 낙방했다고 생각해왔다. 반대로 이번 임용고시에서 그는 자신이 매우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노력에 합당한 결과를 얻었다고 인정하고 있었다.

그는 결과로 인해 노력의 가치가 인정되는 세상의 논리가 부당하다고 생각하였다. 동시에 이렇게도 질긴 자신과의 싸움에서 결국은 자신의 노력을 인정받고 끝맺음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지인들의 부탁으로 그가 보았던 책들을 정리하기 위해 창고 문을 열었다가 오랫동안 열지 않은 박스 하나를 발견하고 그 안이 궁금해졌다. 그것은 찬호가 중고생 시절 썼던 일기장과 친구들과 주고받았던 편지들이 담겨있는 보관함이었다. 그 안에서 그는 유독 꼬깃꼬깃 구겨진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인내는 쓰나 그 열매는 달다'

그는 이 글귀를 읽으면 불쑥 치밀러 오르 분노와 혐오감이 이제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종이에 적힌 글귀는 그대로이나 자신의 마음이 이렇게 변화했다는 것에 놀라며 상자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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