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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후 Feb 15. 2022

추사 김정희의 숨결을 느끼다

- 예산 화암사와의 인연

1년 전, 예산 화암사와의 만남과 인연


화암사와의 인연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아니었나 싶다. 약 1년 전쯤, 정말 우연히 이 암자 앞에 다다르게 된 사연 때문이다. 추사고택을 둘러보고 다음 여행 코스인 예당호수로 향하던 길이었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가고 있었지만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길안내였다. '지름길을 알려 주려나 보다..' 생각하고 험한 산길을 운전해 오르는 동안 생각이 많아졌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다 보니 작은 암자가 하나 보이기에 차도 쉬게 할 겸 잠시 멈췄다. 그때 암자로 이어지는 돌계단 쪽에서 하얀 고양이 한 마리가 반기듯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고양이가 참 예쁘네~."

사진을 찍기 위해 다가가니 고양이는 돌계단 쪽으로 조금씩 이동했고, 그런 고양이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화암사 입구에 다다르게 되었다.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러 대웅전에 올라간 낭군님을 기다리며 요사채(절에 있는 승려들이 거처하는 집) 마당을 서성이는데 수더분한 인상의 비구니 스님이 인기척을 느끼고는 나오셨다. 스님의 발자국 소리를 들은 걸까? 순식간에 스님 주변으로 세 마리의 고양이들이 몰려들었다. 길냥이들을 보살펴 주시는 마음 따뜻한 스님이셨다. 

쌀쌀한 날씨에 몸을 움츠리고 있는 게 안쓰러워 보이셨는지 스님이 잠시 들어왔다 가라셔서 얼결에 스님이 기거하시는 요사채 안으로 들어갔다. 배가 고픈 걸 어떻게 아셨는지 방금 전 다녀간 어느 보살님이 사 가지고 왔다는 샌드위치와 절에서 만든 식혜를 내어주셔서 맛있게 먹었다. 뒤따라 들어온 낭군님은 스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더니 1년 전 돌아가신 시아버님을 위해 등을 달고 싶다 했다. 이렇게 우리 부부와 화암사의 인연은 이어졌다.



임인년 입춘절에 다시 찾은 예산 화암사


주차장에서 암자로 올라가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돌계단을 통해 요사채로 직접 오르는 길과 향나무 오른편 길을 통해 추사의 필적 바위가 있는 곳으로 바로 가는 방법이 있다. 이번에도 우리 부부는 요사채로 향하는 돌계단으로 올라갔다.

요사채의 바깥 모습은 매우 소박하고 정갈하다. 여름철엔 꽤 바람이 통할 듯한데, 추위가 가시지 않은 입춘 무렵의 암자는 찬 찬바람을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개인집이면 비닐로라도 가림막을 할 수 있으련만, 사찰이라 그럴 수도 없겠구나 싶어 괜스레 마음이 쓰였다.

한옥 특유의 처마와 지붕이 주는 분위기도 썩 좋은데 이곳에는 추사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기까지 하다. 세한도와 무량수각이라는 현판이 그것이다. 단순히 추사 고택 근처에 자리 잡은 암자여서가 아니라 화암사는 추사가 어린 시절부터 자주 드나들면서 불교와의 인연을 다진 곳이라고 한다. 영조의 부마였던 추사의 증조할아버지 김한신(비운의 사도세자의 누이동생 화순옹주의 부군)이 중건하고 영조가 화암사라 명명했다는 암자이다.


제주도에 귀양 중이던 1846년 화암사 중건을 지시한 것을 보면 추사가 이 절에 대한 마음이 깊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석산 화암사 상량문>과 '무량수각', '시경루' 현판이 지금도 남아있는데 원본은 수덕사에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옛집과 어우러진 현판이 제법 멋스러워 보이기에 현판 위주로만 사진을 몇 장 더 찍어보았다.

화암사는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가 이곳을 별사전으로 하사 받으면서 원찰이 되었다. 가문의 복을 빌기 위한' 절이 되었던 것이다. 이후 1846년 중건을 하게 되는데 이때 제주 유배 중이던 추사는 '화암사 중건 상량문'과 함께 '무량수각' 현판, '시경루' 현판을 써서 보낸다.

                                          - 김정희 선생 필적 암각문 종합 안내문 중에서


대웅전과 약사전, 오층 석탑과 석상, 그리고 범종이 이 암자의 전부이다. 그 아래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요사채가 화암사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건물이다. 언제 지어진 건물인지는 모르지만, 오랜 세월이 묻어 있는 옛집이 마음에 쏙 든다. 일 년 전과 마찬가지로 우리 부부는 요사채에서 스님과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주지 스님께서 챙겨주신 절 달력과 입춘대길이라 쓰인 입춘첩을 받아 들고는 기분 좋게 스님과의 시간을 마무리했다.


오후 햇살이 따스하기에 추사 김정희의 필적 암각문을 천천히 둘러보기로 했다. 암자 뒤편 병풍 모양의 바위에는 추사의 필적이 커다랗게 새겨져 있다. 부처님이 계시는 집이라는 뜻의 '천축고선생댁'과 '시경'이라는 글씨다.

추사는 이곳을 자신의 이상향으로 만들고자 했다. 때문에 자신이 가장 존경했던 스승인 옹방강을 상징하는 여러 문구들을 이곳 병풍바위와 쉰질바위에 새겨놓았다. 소통파를 존경했던 옹방강, 그리고 소동파와 옹방강을 존경했던 추사. 이런 추사는 자신이 존경했던 소동파와 옹방강을 이 오석산에 흔적으로 남겨두어 자신의 학문의 뿌리 또는 이상향 내지는 선경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이는 화암사 중건 상량문에도 나타나는데 마지막 부분에 보면 '소봉래의 선경을 꾸며 주소서!'라는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 김정희 선생 필적 암각문 종합 안내문 중에서



암자 뒤편으로 나 있는 내포문화숲길에는 추사의 또 다른 필적 암각문이 있다. 산책도 할 겸 천천히 숲길을 걸었다. 숲길이 끝나는 지점 즈음에 추사 김정희의 두 번째 필적 암각문인 '소봉래 추사제'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실학자였던 그가 추구했던 이상향에 비해 그의 삶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 학자로서의 삶을 걸었던 그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추사의 필적 암각문을 다 돌아보고 다시 화암사로 돌아왔다. 화암사 앞으로 펼쳐진 예산의 들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옛날 이 지점 즈음에서 추사는 어떤 생각에 잠겼을지 잠시 상상해 보았다. 어지러운 세상을, 고단한 민초들의 삶을 걱정하고 있었을까?

요사채를 나서는 문은 마치 이상향에서 속세로 이어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이 문을 통과해 나는 다시 속세에 속하는 몸이 되었다. 인연이란 게 무언지,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1년 전 우연히 서울 봉은사에 들렀다가 발견한 추사의 마지막 글씨('판전'이라는 봉은사 현판 글씨)를 만난 직후 이곳에 또한 우연히 오게 된 사연 등등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실질적인 한 해의 시작이라는 입춘에 갑자기 이곳 화암사를 찾게 된 연유도 궁금해진다.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오면 올수록 마음이 편안해지는 작은 암자 화암사. 추사 고택에 매화가 필 무렵 아이들의 손을 잡고 꼭 다시 다녀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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